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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독서노트

독서노트 : 떨림과 울림(1)

물리학자의 눈을 통해 바라본 경이로운 우주와 세계 그리고 우리

by CalmBeforeStorm

떨림과 울림

김상욱 저| 동아시아| 2018년 11월 07일


이 책은 물리학의 원리와 우주의 본질을 인간적인 감정과 연관지어 표현하고 있으며, 물리적 현상들이 우리 일상과 얼마나 깊이 연관되어 있는지를 성찰하게 합니다. 물리학의 엄밀한 법칙들이 인간적인 설렘과 연결되는 순간, 과학의 경이로움이 더욱 생생하게 다가옵니다. 자연과 물리학의 본질을 이해하고 싶은 독자들에게 일독을 권하는 과학책입니다.

* 아래의 독서노트는 책에서 감명깊게 읽었거나, 인사이트를 받은 부분을 발췌하였습니다.

** 본 독서노트는 분량이 많아서 3회에 나누어 업로드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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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동은 우주에 존재하는 가장 근본적인 물리현상이다.

공학적으로도 많은 중요한 응용을 갖는다. 따지고 보면 전자공학의 절반 이상은 진동과 관련된다. 이공계대학에서 배우는 수학의 대부분이 진동을 이해하기 위한 것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진동은 떨림이다. 비슷한 말이지만 그 느낌은 다르다. 진동은 차갑지만, 떨림은 설렌다. 진동은 기계적이지만 떨림은 인간적이다.


우주의 본질을 보려면 인간의 모든 상식과 편견을 버려야 한다. 그래서 물리는 처음부터 인간을 배제한다.

이 책은 물리학이 인간적으로 보이길 바라는 마음으로 썼다. 인문학의 느낌으로 물리를 이야기해보려고 했다. 나는 물리학자다. 아무리 이런 노력을 했어도 한계는 뚜렷하다. 그래도 진심은 전해지리라 믿는다. 내가 물리학을 공부하며 느꼈던 설렘이 다른 이들에게 떨림으로 전해지길 바란다. 울림은 독자의 몫이다.



우주는 어둠으로 충만하다.

빛은 우주가 탄생한 후 38만 년이 지나서야 처음 그 존재를 드러냈다. 빅뱅이 있은 직후, 초기 우주는 너무 뜨거워서 우리가 오늘날 물질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것은 존재할 수 없었다.


우주가 팽창함에 따라 온도가 낮아졌고, 물이 얼음이 되듯 ‘물질’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빅뱅 이후 38만 년쯤 지났을 때 수소, 헬륨과 같은 원자들이 생겨났고, 이때부터 빛도 존재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이전에는 빛과 물질이 한데 뒤엉킨 어떤 ‘것’이 있을 뿐 빛은 홀로 존재할 수 없었다. 이때 탄생한 빛은 지금까지 우리 주위를 떠돌고 있다. 이 빛을 우주배경복사라 하며, 그 발견에 노벨물리학상이 주어지기도 했다. 우주는 38만 살 되던 해, 자신의 모습을 빛에 남겨 놓은 것이다.


뉴턴은 운동법칙을 만든 것으로 유명하지만, 빛을 제대로 연구한 서양의 첫 과학자이기도 하다. 진동수가 다른 빛은 굴절하는 정도가 다르다. 이것을 ‘분산’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유리 표면에서 빨강색 빛은 조금 꺾이고 보라색 빛은 많이 꺾인다. 그래서 빛이 (유리로 만든) 프리즘을 지날 때 색깔별로 분리된다.


뉴턴은 프리즘을 가지고 흥미로운 실험을 했다. 빛이 프리즘을 통과하면 무지갯빛으로 분리된다. 분리되어 나온 빨간빛만 다시 프리즘에 통과시키면 더 이상의 분리는 일어나지 않는다. 이제 뉴턴은 분리된 무지갯빛 전부를 렌즈로 모아서 프리즘에 반대로 다시 보내보았다. 그러자 흰빛으로 되돌아왔다. 즉, 흰빛은 여러 색의 빛이 모인 것이다. 빛은 그 자신이 이미 모든 색을 가지고 있다. 물체가 색을 갖는 이유는 특정한 색의 빛만 반사시켰기 때문이다.


우리는 불과 150년 전 빛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그 후 50년도 채 지나지 않아 빛은 물리학을 근본부터 허물기 시작했다. 빛은 보는 사람의 움직임과 상관없이 일정한 속력을 가지고 있었고, 파동의 떨림이 아니라 단단한 입자라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빛이 야기한 혁명이 종료되었을 때, 우리 앞에는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이 놓여 있었다. 물리학의 역사에서 빛은 언제나 빛나는 존재였다. 지금까지 당신이 읽은 이 글도 당신 눈에 들어간 빛에 불과하다.



시간과 공간

시간과 공간은 138억 년 전 거대한 폭발과 함께 생겨났다. 시간에 시작점이 있다면 그 시작점 이전의 시간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시간은 우주의 본질적인 것인가, 아니면 보다 더 본질적인 것의 부산물인가? 어떻게 시간과 공간을 기술하는 이론이 가능할까? 시간과 공간은 기술의 대상이 아니라 기술의 기본전제가 되어야 할 것 같은데 말이다.


물리에 쓰이는 언어는 그것이 일상 언어로서 갖는 의미와 다를 때가 많다. 아인슈타인이 생각한 시간과 공간의 의미는 상당히 실용적이다. 시간이란 시계로 읽은 두 사건 사이의 간격이다. 공간이란 자로 읽은 두 지점 사이의 거리다. 이 정의에는 시간과 공간의 본질이 무엇인지는 들어 있지 않다. 엄밀히 말해서 이것은 시간과 공간 그 자체가 아니라 시간과 공간을 기술하는 물리량을 의미한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이것뿐이니까.


1미터를 정하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1미터 길이의 막대기를 만드는 것으로는 불충분하다.

막대기를 잃어버리면 낭패가 될 테니까. 그래서 사람들이 생각해낸 것은 이런 인공물이 아니었다. 자연에 있는 기준. 누구라도 자연을 측정해서 얻어낼 수 있는 것으로 기준을 정의하려 했던 것이다. 초기에는 지구의 자오선(북극과 남극을 포함하는 둘레) 길이를 기준으로 삼았다.


하지만 자오선 길이는 재기도 힘들었을 뿐 아니라, 자오선이 파리를 지나는지 런던을 지나는지에 따라 차이가 있다. 오늘날 1미터는 빛의 속도와 시간으로 정해진다. 정해진 시간 동안 빛이 이동한 거리가 1미터라는 식으로 말이다. 시간으로 길이를 정하는 셈이다. 앞서 상대성이론에서 이야기했듯이 빛의 속도는 불변이다. 그래서 초속 2억 9,979만 2,458미터라는 숫자로 정해버렸다. 이렇게 길이는 시간이 된다. 그렇다면 1초는 어떻게 정하는가? 시간의 기준도 빛으로 정한다. 현재 1초의 정의는 세슘 원자가 내는 특정 진동수의 빛이 9,192,631,770번 진동하는 데 걸린 시간이다.


언젠가 미래에 인류문명이 멸망하더라도, 이 정의를 본 누군가는 1미터를 정확히 복구해낼 수 있다는 의미다. 물론 90억 번가량의 진동을 정확히 셀 수 있어야 하므로, 엄청난 정확도로 진동수를 알고 있어야 한다. 2005년 노벨물리학상은 존 홀과 테오도어 헨슈에게 주어졌다. 이들의 업적은 정확한 진동수를 갖는 빛을 만든 것이다. 최근 이 방법을 사용하여 진동수를 19자리까지 알 수 있었다. 비유하자면 서울과 뉴욕 사이의 거리를 원자 하나의 크기보다 작은 오차로 잴 수 있다는 뜻이다.


물리는 사물의 이치를 탐구하는 학문이다. 그 대상은 쿼크가 존재하는 극도로 작은 세상에서 은하와 우주라는 거대한 규모에 걸쳐져 있다. 지금 우리는 단지 몇 개의 법칙으로 이런 모든 규모의 공간에서 일어나는 ‘것’들을 이해할 수 있다. 자, 물리에 대한 흥미가 생겨나지 않는가?



세상은 왜 존재할까?

존재하지 않는 것에는 이유가 필요 없다. 하지만 무엇인가 존재한다면 왜 그것이 있어야 하는지 설명이 필요하다. 300년 전 고트프리트 라이프니츠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 무언가 있는 것보다 자연스럽다고 생각했다. 결국 그는 존재의 이유를 창조자에서 찾았다. 물론 세상이 무無라고 해도 설명이 필요하다고 주장할 수 있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다면 그런 질문을 할 주체, 아니 질문 자체도 존재하지 못할 것이다. 우주의 신비를 탐구하는 물리학자라면 세상이 왜 존재하는지 답할 수 있을까?


존재하지 않는 것에는 이유가 필요 없다. 하지만 무엇인가 존재한다면 왜 그것이 있어야 하는지 설명이 필요하다. 우리는 누가 왜 연극을 제작했는지, 아니 왜 우주가 존재하는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우주가 항상 존재하고 있었는지, 아니면 어느 순간부터 존재하기 시작했는지는 알고 있다. 철학자 칸트는 그의 책 『순수이성비판』에서 우주에 시작점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두 정당화될 수 있어 이율배반이라고 했다. 우주에 시작점이 있다면 무한한 시간 가운데 하필 그 순간 시작했을 이유가 없고, 시작점이 없다면 모든 사건 이전에 똑같이 무한한 시간이 있어야 하므로 모순이라는 것이다. 즉, 이성으로는 답을 알 수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우주의 시작점에 대한 질문을 과학적 탐구대상으로 만들었다.



빅뱅이론

빅뱅이론이 처음 소개되었을 때, 물리학자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는 것을 언급해두어야겠다. 우주에 시작이 있다는 사실이 바로 기독교의 창조론을 닮았기 때문이다. 실제 1950년대 기독교계에서는 빅뱅이론이 창조론과 모순되지 않으며, 나아가 그 증거라는 주장도 있었다. 아인슈타인의 경우 상대성이론이 팽창우주의 가능성을 보인다는 사실을 알고, 자신의 방정식에 ‘우주상수’라는 것을 억지로 집어넣어 우주의 팽창을 막기도 했다. 훗날 자신이 저지른 최악의 실수라고 했지만 말이다.


사실 스티븐 호킹의 중요한 업적의 하나는 블랙홀과 빅뱅 같은 특이점이 실제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인 것이다. 빅뱅이론은 우주가 한 점에서 시작하여 팽창해왔다고 이야기한다. 그 이유는 모른다.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에 어느 날 “꽝!” 하고 우주가 나타난 것이 아니다. ‘꽝’ 하는 소리와 빈 공간이 존재한다는 개념조차 빅뱅과 함께 생겨났다


과거의 우주를 보면 우주가 줄곧 팽창해왔음을 알 수 있다. 더구나 우주의 팽창속도는 점점 더 빨라지고 있다. 애덤 리스, 브라이언 슈밋, 솔 펄머터는 이 관측 결과로 2011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우주가 팽창하는 양상은 우주의 미래에 대해 중요한 함의를 갖는다. 이대로 간다면 우주는 그냥 영원히 팽창하기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주에 들어 있는 물질의 양이 유한하다면 우주는 점점 희박해질 것이고 결국 아무것도 없는 것이나 다름없이 될 것이다. 현대 우주론이 말해주는 암울하다면 암울한 우주의 미래다.


빅뱅이 왜 그렇게 중요한지 묻는 분들이 있다. 물리학자에게 역사란 초기조건과 법칙을 알면 정해지는 이야기다. 작가 T. S. 엘리엇은 “우리의 탐험이 끝나는 때는 우리가 시작한 장소가 어디인지 알아내는 순간이다”라고 종종 말했다고 한다. 공을 던질 때, 위치와 속도가 정해지면 공이 날아갈 궤도와 떨어질 지점이 정해진 것과 비슷하다. 물론 큰 규모에서 대강의 역사만을 알 수 있다. 카오스이론과 양자역학은 역사의 디테일을 모조리 예측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해준다. 우리가 현재 가진 물리법칙은 빅뱅이라는 초기조건으로부터 우주의 역사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암흑물질

이렇게 만들어진 별들은 모여서 은하를 이룬다. 우리 은하는 태양과 같은 별을 1,000억 개나 가진 거대한 별 집단이다. 은하를 이루는 별들은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돌듯 은하 중심 주위를 돈다. 뉴턴의 중력법칙에 따르면 은하 중심에서 멀어질수록 별의 회전속도는 작아져야 한다. 하지만 실제 관측해보니 속도가 거의 변하지 않았다.

감히 뉴턴의 중력이론이 틀렸다고 주장할 사람은 없기 때문에, 아직 우리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다고 과학자들이 합의한 상태다. 즉, 별의 속도를 예상보다 빠르게 만들어주는 추가적인 물질이 은하의 내부에 숨어 있다는 거다. 이들이 눈에 보였다면 이런 문제는 애초 생기지도 않았을 거다. 우주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이러한 암흑물질의 총량이 우리가 아는 물질 총량의 5배가 넘는다.



세상은 왜 존재하는가?

세상은 왜 존재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의 단서는 빅뱅이 일어나는 순간에 있을 거다. 현대물리학은 빅뱅 이후 ‘1,000억 분의 1초’가 지난 다음부터 적용할 수 있다. 그 이전의 엄청나게 짧은 시간 동안을 기술할 수 있는 물리이론은 아직 없다. 물리학의 성배나 다름없는 통일장이론 혹은 양자중력이론이 나온다면 ‘1,000억 곱하기 1,000억 곱하기 1,000억 분의 1초’까지 빅뱅에 근접하여 우주를 기술할 수 있게 된다.

이 찰나와도 같은 시간 속에서 우리는 우주 존재의 이유를 찾아낼 수 있을까?


스티븐 호킹이 쓴 『시간의 역사』의 마지막 문장이다. “만약 우리가 (우주가 왜 존재하는가 하는) 물음의 답을 발견한다면 그것은 인간 이성의 최종적인 승리가 될 것이다. 그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신의 마음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존재는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

어린 시절 가장 두려웠던 상상 가운데 하나는 죽음이었다. 내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면 몸이 허공에 붕 뜨며 세상이 하얗게 변하는 느낌이 들었다. 죽는 순간, 내 앞에 존재하는 이 모든 것들이 다 사라지고, 나의 이런 생각, 느낌조차 없어진다니. 이보다 더 황망한 일이 있을까? 하지만 물리를 공부하고 원자를 알게 되면서, 죽음을 다른 측면에서 바라보게 되었다. 죽음뿐만이 아니다. 원자를 알게 되면 세상 만물이 달리 보이기 시작한다.


서양 철학사는 탈레스의 말로 시작된다. “만물의 근원은 물이다.” 철학 최초의 질문은 만물의 근원, 즉 물리에 관한 것이었다. 이 질문에 데모크리토스는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유사한 답을 찾았다. “관습에 의해 (맛이) 달고 관습에 의해 쓰며, 관습에 의해 뜨겁고 관습에 의해 차갑다. 색깔 역시 관습에 의한 것이다. 실제로 있는 것은 원자와 진공뿐이다.”


세상은 텅 빈 진공과 그 속을 떠도는 원자로 되어 있으며 나머지는 모두 관습, 즉 인간 주관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데모크리토스는 유물론자였다. 그는 세상 모든 것, 즉 영혼조차 원자로 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고대 그리스시대 철학자의 말이 실험과 수학으로 뒷받침되는 현대물리학과 같은 무게를 가질 수는 없겠지만, 그가 핵심을 짚은 것은 분명하다. 우리 주위에 보이는 모든 것이 원자들의 모임에 불과하며 불멸하는 것은 영혼이 아니라 원자다. 사물이 가진 특성은 원자들이 배열하는 방식에서 나온다. 원자가 없다면 세상도 없다.


데모크리토스의 눈으로 본 세상은 허무하다. 원자들은 빈 공간에서 기계적으로 움직일 뿐 거기에 어떤 목적이나 의미는 없다. 하지만 원자들의 기계적인 운동은 세상만사를 일으킨다. 지금 읽고 있는 이 문장은 종이에 인쇄되었거나 모니터 화면을 채우고 있을 것이다. 이들 매체는 모두 원자로 되어 있다. 이 문장을 읽는 순간, 뇌 속의 신경세포들은 여러 가지 전기신호를 만들어낸다. 신경세포도 원자로 되어 있다. 신경세포의 전기신호조차 원자로 되어 있다. 소듐과 칼륨이온이 신경세포의 세포막을 넘나드는 것이 전기신호다. 이들은 그냥 자연법칙에 따라 움직였을 뿐 거기에 어떤 목적이나 의도는 없다. 인간의 사유도 원자로 만들어진 몸에서 일어난 일이다.


죽으면 육체는 먼지가 되어 사라진다. 하지만 원자론의 입장에서 죽음은 단지 원자들이 흩어지는 일이다. 원자는 불멸하니까 인간의 탄생과 죽음은 단지 원자들이 모였다가 흩어지는 것과 다르지 않다.


누군가의 죽음으로 너무 슬플 때는 우리 존재가 원자로 구성되었음을 떠올려보라. 그의 몸은 원자로 산산이 나뉘어 또 다른 무엇인가의 일부분이 될 테니까. 모든 것이 원자의 일이라는 말에 허무한 마음이 들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허무함이라는 감정을 느끼는 그 순간에도 이 모든 일은 사실 원자들의 분주한 움직임으로 이루어진다. 모든 것은 원자로 되어 있으니 원자를 알면 모든 것을 알 수 있다.


원자의 구조는 단순하다. 가운데 원자핵이 있고, 그 주위를 전자들이 돈다. 태양과 그 주위를 도는 행성들로 이루어진 태양계와 비슷하다. 원자핵은 양성자와 중성자로 구성되어 있는데, 양성자 수에 따라 원자의 종류가 정해진다. 양성자가 하나면 수소, 두 개면 헬륨, 8개면 산소, 이런 식이다.


양성자의 수를 원자번호라고 한다. 지금이라면 양성자 하나 있는 원자에 ‘수소’가 아니라 ‘1번’이란 이름을 붙였을 거다. 우주에 존재하는 원자는 대부분 원자번호 1번인 수소다. 구조가 가장 간단해서 그렇다. 두 번째로 많은 원자는 2번 헬륨이다. 이 둘을 합치면 우주에 존재하는 원자의 거의 100%가 된다. 나머지를 다 합쳐봐야 오차 정도의 양에 불과하다. 이 오차에 탄소, 산소, 질소, 금 같은 익숙한 원자 대부분이 포함된다. 원자번호가 클수록 많은 양성자를 좁은 핵 안에 욱여넣어야 하므로 만들어지기 어렵다. 그래도 92번 우라늄까지는 자연적으로 만들어질 수 있다. 하지만 93번부터는 자연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불가능하다.


‘우라늄’이라면 낯익은 이름이다. 우라늄 원자핵에 중성자를 넣어서 핵이 둘로 쪼개지면 원자폭탄이 된다. 핵이 쪼개지는 대신, 핵 내부에서 전자가 밖으로 튀어나오는 베타붕괴가 일어날 수 있다. 이 경우 원자번호가 하나 커진 93번의 새로운 원자가 만들어진다. 1940년 원자핵실험에서 93번 ‘넵투늄’이 발견되었다. 넵투늄에서 또 한 번 베타붕괴가 일어나면 94번이 만들어진다. 북한 핵 관련 뉴스의 단골메뉴 ‘플루토늄’이다. 우라늄, 넵투늄, 플루토늄은 태양계 행성 천왕성(우라누스), 해왕성(넵튠)과 소행성 명왕성(플루토)의 이름을 차례로 딴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새로운 원자는 그 양이 너무나 적기 때문에 그 존재로만 의미가 있다. 101번 원자를 만들려면 99번 원자가 필요하다. 당시 99번 원자를 얻기 위해 94번 플루토늄에 알파입자를 쏘는 실험을 3년간 계속해야 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멘델레븀은 17개에 불과했다고 한다. 현미경으로 봐도 안 보인다는 얘기다. 1960년부터는 원자를 만드는 새로운 방법이 도입된다. 102번 원자를 만들기 위해 23번과 79번을 융합하는 거다(23+79=102).


사람은 한순간이라도 숨을 쉬지 않으면 살 수 없다. 숨을 쉰다는 것은 산소를 들이마시고 이산화탄소를 내뱉는 것이다. 공기 중을 떠다니는 산소는 산소 원자 두 개가 결합한 형태로 존재하는데 이를 산소 분자라 부른다. 산소 분자가 코를 통해 허파에 다다르면 헤모글로빈이라는 단백질과 결합한다. 코, 허파, 헤모글로빈 모두 원자로 되어 있음은 물론이다. 헤모글로빈은 단백질인데 그 한가운데 ‘철’ 원자를 품고 있다. 철을 공기 중에 두면, 녹이 슨다. 산소가 헤모글로빈과 결합하는 것은 바로 철이 녹스는 과정이다. 피의 붉은색은 바로 철이 녹슬어 생긴 것이다.


산소는 반응성이 큰 원자다. 다른 원자를 만나면 바로 결합한다. 따라서 산소가 홀로 몸속을 어슬렁거리며 다니는 것은 위험하다. 산소가 몸을 이루는 원자들과 마구 결합하여 망가뜨릴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산소를 활성산소라 부른다. 노화의 주범이며, 죽음의 이유이기도 하다. 아이러니지만 몸의 모든 세포는 에너지를 얻기 위해 산소를 필요로 한다. 헤모글로빈은 위험물 산소를 운반하는 특별호송차량인 셈이다. 산소 이외의 원자들은 그냥 혈액을 타고 이동한다. 산소만 예외다.


헤모글로빈의 구조를 보면 정확히 산소 분자에 들어맞는 빈 공간을 가지고 있다. 질소나 염소 같은 다른 분자는 여기 들어갈 수 없다. 산소만을 위한 열쇠구멍이라고 보면 된다.

하지만 산소와 비슷한 크기의 분자가 오면 실수로 그 자리를 차지할 수도 있다. 일산화탄소가 그 예다. 일산화탄소는 산소 원자 한 개와 탄소 원자 한 개가 결합한 것으로 산소 원자만 두 개 결합한 산소 분자와 비슷하다. 로미오와 줄리엣 자리에 이몽룡과 성춘향이 들어간 셈이다.


이 때문에 일산화탄소는 독毒이다. 연탄가스를 마시면 죽는 이유다. 헤모글로빈을 통해 산소가 아니라 일산화탄소가 운반되기 때문이다. 반면, 일산화탄소와 이름이 비슷한 이산화탄소는 이런 문제가 없다. 이산화탄소는 산소 원자 두 개에 탄소 원자 한 개, 도합 원자 세 개가 모인 구조다. 산소 원자 두 개를 위한 공간에 절대 들어갈 수 없다. 로미오와 줄리엣 자리에 삼총사가 들어갈 수 없는 것과 같다


생명 현상의 모든 것은 원자들의 운동으로 이해할 수 있다. 우리 몸과 공기도 예외는 아니다. 생명의 핵심물질인 DNA조차 원자로 되어 있으며, 그 구조를 밝히는 것에서 현대생물학이 탄생했다. 세상 무엇이든 그 존재의 작동 방식을 알려고 하면 결국 답을 구하는 여정에서 원자를 만나게 된다. 모든 것은 원자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 오른손 집게손가락 끝에 있는 탄소 원자 하나는 먼 옛날 우주 어느 별 내부의 핵융합반응에서 만들어졌다. 그 탄소는 우주를 떠돌다가 태양의 중력에 이끌려 지구에 내려앉아, 시아노박테리아, 이산화탄소, 삼엽충, 트리케라톱스, 원시고래, 사과를 거쳐 내 몸에 들어와 포도당의 일부로 몸속을 떠돌다, 손가락에 난 상처를 메우려 DNA의 정보를 단백질로 만드는 과정에서 피부 세포의 일부로 그 자리에 있는 것일지 모른다. 이렇게 우리는 원자 하나에서 우주를 느낀다.


겉보기에 똑같아 보이는 100원짜리 동전들도 엄밀히 말해서 똑같지 않다. 공식적으로 5.42그램의 질량을 가져야 하지만 1억 분의 1그램까지 잴 수 있는 정밀저울로 측정하면 차이가 날 것이다. 1억 분의 1그램까지 질량이 같더라도 두 동전은 다르다. 원자 개수를 세어보면 차이가 있을 테니까. 원자 개수마저 똑같아도 여전히 다르다.


100원 주화는 구리 75%, 니켈 25%로 이루어지는데 구리와 니켈 원자들의 상대적 배치가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상대적 배치마저 같아도 여전히 다르다. 구리와 니켈에는 동위원소가 있기 때문이다. 동위원소란 화학적 성질은 같지만 질량만 다른 원자다. 결국 우리 주위의 물체에 대해 원자 수준까지 내려가서 비교하면 같다는 말은 무의미하다. 결국 겉모습이 완전히 똑같은 물체라도 원리적으로 서로 구분 가능하다.


데모크리토스는 원자가 더 이상 쪼개지지 않는 가장 작은 단위라고 생각했다. 서양철학의 전통에서 원자는 쪼개지면 안 되는 거였다. 하지만 전통은 깨지기 위해 있는 거라고 하지 않았던가. 원자도 무언가로 이루어져 있다는 발견으로부터 양자역학은 시작된다.



모든 전자는 똑같다.

전자는 더 이상 나뉠 수 없는 물질의 최소단위다. 우리는 숨을 쉴 때마다 한 번에 500밀리리터 정도의 공기를 들이마신다. 여기에는 대략 아보가드로수의 전자가 들어 있다. 아보가드로수란 ‘1’ 뒤에 ‘0’이 23개나 붙은 어마어마하게 큰 숫자다. 그런데 이 많은 전자들은 서로 완전히 똑같다. 앞에서 똑같아 보이는 물체들이 사실 다르다고 하더니, 전자는 완전히 똑같다고 하는 이유가 뭘까? 전자는 물질의 최소단위다. 전자는 색도 모양도 없다. 그 내부에 더 작은 세부구조 따위도 없다. 그래서 모든 전자는 똑같다.


모든 전자는 똑같다. 더구나 전자는 양자역학으로 기술된다. 양자역학이 기술하는 원자 세상은 우리의 경험과 상식이 통하지 않는다. 하나의 전자가 동시에 여러 장소에 존재할 수 있으니 말이다. 당신은 절대로 서울과 부산에 동시에 있을 수 없지만, 당신 몸을 이루는 전자는 그럴 수 있다. 이제 구분 불가능한 전자들을 양자역학으로 다루면 전혀 예기치 못한 결과가 얻어진다.


파울리의 배타원리는 전자들이 원자 내에서 어떻게 배치되어야 하는지를 설명한다. 호텔 1인실에는 한 사람, 2인실에는 두 사람이 들어가야 하는 것처럼 양자역학적 상태에 몇 개의 전자가 들어갈 수 있는지를 결정해준다. 전자들의 공간적 배치는 중요하다. 다른 사람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느냐가 당신의 평판을 결정하듯이 다른 원자와의 관계가 원자의 특성을 결정한다.


원자는 중심에 엄청나게 작은 원자핵이 있고 그 주위를 많은 전자들이 둘러싸고 있다. 다른 원자가 보기에는 주변에 있는 전자들만 보인다. 결국 전자 배치가 원자의 특성을 결정한다는 의미다. 전자 배치가 유사한 리튬과 나트륨이 모두 물에 닿으면 격렬히 반응하고, 마찬가지로 불소와 염소가 모두 독인 이유다


우리는 전자가 그 자체로 질량과 전하를 갖는 실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전자가 호랑이 형상과 같은 결과물에 불과하다면 어떨까? 그렇다면 서로를 구분하는 것이 무의미할 거다. 이들은 기호라 완전히 똑같기 때문이다. 전자는 무엇의 결과물일까? 물리학자들은 이 ‘무엇’을 ‘전자장electron field’이라 부른다.


이런 식으로 전자를 기술하는 방법이 ‘양자장론quantum field theory’이다. 오늘날 양자장론은 이론물리학의 중요한 뼈대다. 양자장론이 보는 세상은 이렇다. 전자장에서 전자가 만들어진다. 전자는 실체가 아니라 전자장이 만들어내는 결과물이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비유하자면, 전자는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전자장의 일부분에 해당하는 형상에 불과하다. 따라서 모든 전자는 서로 구분할 수 없이 똑같다.



최초의 생명

우리는 우주의 시작에 대해 알고 있으나 최초의 생명에 대해 알지 못한다. 생명이 우연의 산물인지 필연적 귀결인지조차도 알지 못한다. 생명이 당연해 보인다면 그건 단지 생명이 넘치는 지구에 당신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의 기본단위는 세포다. 인간이 모여 사회가 되듯이, 세포가 모여 생물이 된다. 물론 세포 하나로 이루어진 생명체도 있다. 아니, 대부분의 생명체는 세포 하나로 구성된 단세포 생물, 세균이다. 세균은 지구상 어디에나 있다. 세포는 원핵세포와 진핵세포로 나뉜다. 이 둘의 차이는 핵막의 존재 여부다. 핵막은 DNA를 둘러싼 막이다. 핵막을 가진 진핵세포는 중요하다. 인간이나 고양이, 고등어, 소나무 같은 모든 다세포생물이 진핵세포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진핵세포의 핵막 안에는 유전물질인 DNA가 들어 있다. DNA 덕분에 인간이 인간을 낳고 돼지가 돼지를 낳는다. 생명체에게 번식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살아 있다는 그 자체다. 생명이 살 수 있도록 에너지를 생산하는 세포 내 기관이 바로 ‘미토콘드리아’다. 닉 레인의 책 제목이기도 하다. 미토콘드리아는 생명의 에너지 생산공장이고, 다세포생물과 성sex을 탄생시킨 주범이며, 세포자살과 노화의 배후세력이다. 다세포생물이라니까 특별한 생물 같지만, 세균이 아닌 모든 생명체, 적어도 눈에 보이는 모든 생명체를 가리킨다. 이런 방대한 주제가 세포 내 하나의 소기관으로 설명된다는 사실이 경이로움으로 다가온다


미토콘드리아의 공생이 아름다운 협력일 거라고만 생각하면 오산이다. 세포는 자살할 수 있다. 자신에게 치명적인 결함이 있거나 심각한 감염이 일어나면 스스로 없어지는 것이 전체를 위해 좋기 때문이다. 이때 미토콘드리아를 붕괴시키는 방법이 이용된다. 미토콘드리아는 세포의 에너지공장이니까 로봇으로 비유하자면 전원을 차단하는 셈이다. 세포 스스로가 자살을 하기도 하지만 외부에서 자살하라는 명령을 받기도 한다.


세포를 죽이는 세포자살을 결정하는 것은 핵이 아니라 미토콘드리아의 유전자다. 세포자살은 다세포생물이라는 사회조직을 유지하는 공권력이다. 쓸모없는 세포가 제때 사라져주지 못하면 생명은 유지되기 힘들다. 미토콘드리아가 없었으면 애초에 다세포생물과 같이 복잡한 생명체가 탄생할 수도 없었다


여성에 대한 차별은 제도뿐 아니라 문화와 의식에도 뿌리 깊이 박혀 있다. 많은 이야기들이 남성의 입장에서 기술된다. 성서의 창세기에 따르면 이브는 아담의 갈비뼈로 만들어졌다. 이는 남성이 인간의 원형이고 여성은 그로부터 만들어진 부수적 존재라는 프레임을 만든다.


하지만 이런 해석은 과학적으로도 틀린 것이다. 태아는 남성호르몬인 안드로겐에 노출되지 않으면 여성이 된다. 생물학적으로 여성이 되기 위해서는 여성호르몬인 에스트로겐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것은 젖가슴과 엉덩이를 만들고 월경 주기를 조율하는 데 필요할 뿐이다. 이런 관점에서 생각하면 인간의 원형은 여성이다. 사실 인간의 원형이 남성인지 여성인지, 혹은 성과는 무관한 것인지 그것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남성이 인간의 원형이라는 프레임이 과학적으로도 잘못된 설명이라는 거다.


‘남자는 끊임없이 정자를 재생산하는 역동적 존재이고, 여자는 태어날 때 가진 난자를 소모하기만 한다. 정자는 경쟁하며 이동하는 동적인 존재이지만, 난자는 정자의 선택을 받는 수동적 존재다.’ 과연 그럴까? 임신 20주째 여성 태아는 700만 개에 달하는 난자를 갖는다. 이후 난자는 끊임없이 죽어서 사춘기가 될 즈음이면 40만 개만 남는다. 난자의 죽음은 계속되며 잘해봐야 불과 450개만이 배란에 성공한다.


그 많던 난자는 다 어디로 갔을까? 이것은 자체 경쟁을 거쳐서 최상의 난자만을 남기는 과정이다. 정자 역시 치열한 경쟁을 거쳐 수정에 이르게 되지만, 잘해야 몇 시간의 경쟁일 뿐이다. 난자는 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경쟁한다. 태아에게 있어 정말 중요한 것은 난자이기 때문이다.


인류의 근현대사는 인간 평등의 범위를 확대하는 투쟁의 역사다. 그런데 인간이 왜 평등해야 하냐고 묻는다면 당신은 대답할 수 있을까?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보면 이런 질문에 답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 수 있다. 필자는 전문가가 아니니까 오히려 용감하게 답할 수 있을 거다. 모든 인간이 평등한 이유는 생물학에서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각 개인이 가진 문화적, 사회적 겉모습을 벗고 벌거벗은 호모사피엔스로 섰을 때, 대기업 CEO와 지하철 정비노동자 사이의 차이를 말하기는 쉽지 않을 거다.


유전자 수준으로 가서 보면 차이를 구분하기 더욱 힘들어진다. 모든 인간의 유전자는 다른 사람과 평균적으로 99.5% 정도 같다고 한다. 유전자만 보아서는 두 사람을 차별할 근거를 찾기 힘들다는 의미다. 유전자까지 오면 인간과 침팬지 사이의 평등도 문제가 된다. 침팬지의 유전자는 인간과 99%가 같다. 참고로 남자와 여자도 유전자의 99%가 같다. 인간의 평등이 생물학적인 근거 때문이라면, 우리는 이제 평등의 범위를 다른 생물종으로 넓혀야 할 시점이 온 것인지도 모른다.


자연은 크기에 따라 다른 물리학을 필요로 한다. 우리가 사는 크기의 세상은 뉴턴이 만든 고전역학으로 기술된다. 원자의 크기가 되면 양자역학이 필요하다. 여기서는 하나의 원자가 동시에 두 장소에 존재하는 마술을 부린다. 우주적 규모가 되면 일반상대성이론이 필요하다. 이제 무거운 물체가 시공간을 비틀고 휘어놓는다. 이들 사이의 경계는 여전히 미스터리다. 물리학에서 크기를 바꾸다 보면 국경검문소를 만난다는 뜻이다.


존재의 크기에 관하여 ‘위상수학’이란 무엇인가 신발을 벗지 않은 채로 양말만 벗는 것이 가능할까? 이론물리학자로서 진지하게 말하자면 답은 ‘그렇다’다. 다만, 양말이 위상수학의 적용을 받는다는 가정이 필요하다. 위상수학이란 대상을 마음대로 늘리거나 줄여도 변하지 않는 성질을 다루는 분야다.


과거와 미래가 함께 인식된다면 “최초의 획을 긋기도 전에 문장 전체가 어떤 식으로 구성될지 미리 알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테드 창의 소설 『네 인생의 이야기』에 나오는 문장이다.


뉴턴의 운동법칙은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일어나는 속도의 변화를 기술한다. ‘0’보다는 크지만 ‘0’이나 다름없는 짧은 시간, 그러니까 무한히 ‘0’에 가까워지지만 ‘0’이 되지는 않는 그런 짧은 시간 간격 말이다. 이런 짧은 시간 동안의 변화율을 미분이라 부른다. 변화를 일으키는 원인은 ‘힘’이다. 힘이 원인으로 작용하여 가속이라는 결과를 만들어낸다. 이처럼 짧은 시간 간격으로 촘촘히 이어지는 인과율의 연쇄는 뉴턴역학을 이해하는 핵심적인 사고의 틀이다.


19세기 중반 윌리엄 해밀턴은 운동법칙을 기술하는 새로운 원리를 제시한다. 물체는 ‘어떤 물리량’을 최소로 만드는 경로를 따라 움직인다는 것이다. 자유낙하 하는 물체를 생각해보자. 뉴턴의 관점에 따르면 물체를 손에서 놓는 순간, 물체는 중력에 의해 가속되어 수직으로 낙하하기 시작한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낙하 속도는 점점 빨라진다.


하지만 해밀턴의 관점에서는 이렇다. 물체는 여러 경로와 과정을 거쳐 땅바닥에 도달할 수 있다. 원형의 경로나 하트 모양의 경로를 따라 낙하하거나, 직선으로 떨어지더라도 처음에 빨랐다가 나중에 느리게 갈 수도 있고 그냥 일정한 속도로 떨어질 수도 있다. 이러한 운동경로가 주어지면, ‘작용량action’이라 불리는 물리량을 계산할 수 있다. 가능한 모든 경로와 과정들에 대해 이 값을 계산해보면, 이 가운데 가장 작은 값을 갖는 경우를 찾을 수 있다. 바로 이때의 경로와 과정이 뉴턴의 관점으로 구한 운동과 정확히 같다. 그래서 그렇게 낙하하는 거다.


이 글만 읽어서는 뭔가 마술 같은 일이 일어난 것 같지만, 수학을 들여다보면 당연한 결과다. 마치 ‘2’를 세 번 더한 것이 ‘2 곱하기 3’과 같은 것처럼 말이다. 결국 뉴턴역학과 해밀턴역학은 물체의 운동에 대해 동일한 결과를 준다. 하지만 철학적으로 미묘한 차이가 있다. 해밀턴역학에서는 작용량을 최소로 만들려는 ‘경향’이 물체의 운동을 결정한다. 그래서 이것을 ‘최소작용의 원리’라고 부른다. 이 원리가 작동하려면 가능한 모든 미래의 경로를 미리 내다보며 작용량을 계산해야 한다. 헵타포드는 이런 틀로 세상을 보고 있었던 거다.


컴퓨터는 기본적으로 앨런 튜링의 아이디어에서 나왔다. ‘0’과 ‘1’의 비트로 표현된 데이터를 하나씩 읽어서 정해진 규칙에 따라 순차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기계를 튜링기계라 한다. 이 순차적 작업 리스트가 알고리즘이고, 이것을 만드는 과정이 코딩이다.


컴퓨터는 뉴턴역학의 방식으로 생각하는 기계다. 여기에 의도 따위는 없다. 알고리즘에 따라 미분방정식으로 기술된 자연법칙처럼 다음 순간을 향해 발을 내디딜 뿐이다. 미래는 모두 다 결정되어 있다.


인공지능은 신경망을 기반으로 한다. 신경망은 인간의 뇌가 작동하는 원리를 모방한 것이다. 뇌는 뉴런이라는 신경세포들로 구성된다. 뉴런은 신호를 전기적으로 전달하는데, 보통 수천 개의 다른 뉴런들과 연결되어 있다. 이들 사이의 연결 부위는 그냥 붙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연결의 세기가 변할 수 있다.


우리가 기억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이 연결 부위가 갖는 세기들의 집합에 불과하다. 연결 세기를 조정하여 기억을 만드는 과정을 학습이라 한다. 뇌의 이런 특성은 인공신경망에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으며 이 때문에 신경망도 학습을 할 수 있다. 학습이란 정해진 입력에 대해 원하는 출력이 나오도록 연결 세기를 조정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최소작용의 원리와 같은 사고방식이다.


“과학은 객관적이어야 한다. 현상을 설명하는 데 어떤 목적인目的因이나 의도를 끌어들여서는 참된 인식에 도달하지 못한다. 따라서 이런 것들은 체계적으로 거부해야 한다.”
생물학자 자크 모노가 『우연과 필연』에서


날아다니는 벌을 보라. 이들은 꿀을 구할 목적으로 꽃을 찾고, 동료들에게 위치를 알려주기도 한다. 자연법칙이 이러한 의도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자연에 의도가 있다는 생각은 근대과학의 기본 태도와 정면으로 배치된다. 우주에 의도가 있다고 하면 모든 과학적 난제가 일거에 해결된다.


우주는 왜 생겨났나? 신의 의도 때문이다. 인간은 왜 존재하나? 신이 원해서다.

고온초전도현상은 왜 존재하나? 신이 그런 현상이 있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실제 많은 문명이 이런 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문제에 답을 해왔다. 우리도 뭔가 이해 안 되는 일이 벌어지면 하늘의 뜻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서양의 근대과학이 특별한 것은 바로 신의 의도를 제거하고 세상을 이해하려 시도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생명이 보여주는 생존의 욕구, 더 많은 자손을 남기려는 의도는 과연 무엇인가?

이에 대해서 현재 우리가 가진 과학적인 답은 ‘진화론’이다. 진화에는 의도가 없다. 주사위 던지듯이 무작위로 모든 가능성이 펼쳐진다. 검은색 나방도 나오고 흰색 나방도 나온다. 세상이 밝을 때는 흰색 나방만 살아남는다. 흰 바탕에 검은 나방은 포식자인 새의 눈에 잘 띄기 때문이다. 세상이 어두워지면 검은색 나방이 살아남는다. 이런 식으로 조금씩 환경에 적응하려고 애쓰는 과정에서 인간과 같이 고도로 복잡한 생명체마저 나올 수 있다.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들도 적응하여 살아남기 위해 선택된 행동일 뿐이다. 그것에 대해 의도라고 부르는 것은 마치 알파고가 이길 의도로 바둑을 두었다는 것과 비슷한 말이다. 진화론의 시각에서 생명은 우연의 산물이다. 우리가 필연이라고 부르는 것은 일어난 사건에 대해 그렇게 해석을 하는 것뿐이다.


알파고의 목적은 바둑에서 이기는 거다. 바둑은 집이 많은 쪽이 이긴다. 수학적으로 말해서, 나와 상대가 가진 집 차이를 최대로 만드는 경향으로 움직이는 기계다. 이를 위해 알파고는 모든 가능한 미래를 미리 가보며 집의 차이를 계산한다. 그 차이가 최대가 되는 경로가 나오도록 연결망의 결합 세기를 조정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걸 알파고의 의도라고 불러야 할까? 알파고를 만든 인간의 의도가 알파고에 의해 발현된 것이라고 해야 할까? 그렇다면 인간의 의도는 또 다른 존재의 의도에서 온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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