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리학자의 눈을 통해 바라본 경이로운 우주와 세계 그리고 우리
떨림과 울림
김상욱 저| 동아시아| 2018년 11월 07일
이 책은 물리학의 원리와 우주의 본질을 인간적인 감정과 연관지어 표현하고 있으며, 물리적 현상들이 우리 일상과 얼마나 깊이 연관되어 있는지를 성찰하게 합니다. 물리학의 엄밀한 법칙들이 인간적인 설렘과 연결되는 순간, 과학의 경이로움이 더욱 생생하게 다가옵니다. 자연과 물리학의 본질을 이해하고 싶은 독자들에게 일독을 권하는 과학책입니다.
* 아래의 독서노트는 책에서 감명깊게 읽었거나, 인사이트를 받은 부분을 발췌하였습니다.
** 본 독서노트는 분량이 많아서 3회에 나누어 업로드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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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역학
원자를 설명하는 양자역학은 뉴턴역학과 사뭇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설명한다. 양자역학에서는 더 이상 뉴턴역학과 같이 결정된 미래란 존재하지 않는다. 인과율이 깨지는 것은 아니지만 모든 것이 인과율의 지배를 받는 것도 아니다. 뉴턴역학에서는 물체의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있으나 원자의 위치를 정확히 아는 것은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양자역학이 불가지론은 아니다. 특정 위치에서 원자가 발견될 확률은 알 수 있다. 확률만을 알려준다는 것은 생명과 관련하여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양자역학적 결과는 우연이 지배한다. 주사위를 던지면 어느 숫자가 나올지 알 수 없다. ‘1’이 나왔다면 ‘1’이 나온 이유 따위는 없다. 그냥 우연이다. 하지만 우리는 ‘1’이 나온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진다. ‘1’이 나온 것은 신의 의도가 아닐까? 그렇게 주장한다고 해도 반박하기는 쉽지 않다. 사실, 있는 것은 보여줄 수 있어도 없는 것을 보여주기는 불가능하다. 마찬가지로 신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는 힘들다.
자크 모노의 생각은 이렇다. 생명현상도 물리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물리법칙은 원자 수준에서 확률만을 알려준다. 생명도 이 확률 법칙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간다. 수많은 가능성 가운데 왜 특정 사건이 일어난 것인지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주사위를 던져 왜 하필 ‘1’이 나왔냐고 묻는 거랑 비슷하다. ‘1’은 가능한 사건 중의 하나일 뿐이다. 이처럼 진화는 우연히 일어난다. 우연으로 선택된 수많은 사건의 연쇄에 의미를, 아니 더 나아가 의도를 부여할 수도 있다. 이렇게 우연은 필연이 된다. 하지만 거기에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소설에서 헵타포드는 과거와 미래를 한꺼번에 본다. 마치 해밀턴역학의 물체가 모든 가능성을 한꺼번에 펼쳐놓고서 최선의 결과를 찾아가듯이 말이다. 그렇다면 헵타포드는 왜 사는 걸까? 소설의 주인공은 헵타포드를 만난 후 그들의 언어를 알게 된다. 그들의 언어를 익혔다는 건 미래를 알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다.
주인공은 그의 옆에 있는 연인이 언젠가 그를 떠나리라는 것을 알고, 태어날 아이가 병으로 일찍 죽으리라는 것을 안다. 그렇지만 살아간다. 그들을 사랑하며 현재를 산다. 미래를 다 아는 존재에게 현재를 산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소설에서 작가는 이렇게 설명한다. “어떤 대화가 되었든 헵타포드는 대화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미리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지식이 진실이 되기 위해서는 실제로 대화가 행해져야 했던 것이다.
세상을 보는 두 가지 관점
물리학에는 세상을 보는 두 가지 관점이 있다. 하나는 지금 이 순간의 원인이 그다음 순간의 결과를 만들어가는 식으로 우주가 굴러간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작용량을 최소로 만들려는 경향으로 우주가 굴러간다는 거다.
두 방법은 수학적으로 동일하다. 동일한 결과를 주는 두 개의 사고방식인 것이다. 후자에 대해 우주의 ‘의도’라고 부르고 싶은 것은 신의 존재를 믿는 인간의 본성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은 일어난 일을 인간이 해석하는 방법일 뿐이다. 두 경우 모두 세상은 수학으로 굴러간다. 수학에 의도 따위는 없다.
시간에 따른 천체의 위치 변화를 정확히 관측하고 기술하려는 노력은 프톨레마이오스, 케플러, 갈릴레오를 거쳐 뉴턴에 이르러 완벽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뉴턴이 만든 역학은 별들의 운동을 기술하는 수학적 도구였다. 천왕성의 궤도가 뉴턴의 이론에 부합하려면 천왕성 바깥에 다른 행성이 존재해야만 했다. 1846년 마침내 천왕성 바깥에 행성이 발견된다. 태양계 마지막 행성인 해왕성이다. 뉴턴역학의 눈부신 성공은 인간이 우주를 이해하고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뉴턴은 계몽주의의 진정한 스타였다.
뉴턴역학은 천체의 운동만 기술한 것이 아니다. 뉴턴역학의 진정한 가치는 그것이 천상과 지상의 운동을 하나로 통합했다는 데 있다. 천체의 운동은 상당히 정확하게 기술할 수 있는데, 지상의 운동도 그렇게 기술하는 것이 가능할까?
1814년 피에르 시몽 라플라스는 자신의 이름을 딴 도깨비를 제안했다.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물체의 위치와 속도를 아는 ‘도깨비’가 있다면, 이 도깨비는 뉴턴역학을 이용해 우주의 미래를 완벽하게 예측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사실 도깨비의 존재 유무와 상관없이 우주의 미래가 정해져 있다는 생각이 중요하다. 이런 우주에 자유의지는 없다. 바로 과학적 결정론이다.
뉴턴역학은 왜 결정론으로 귀결될까? 법칙이 존재한다고 늘 결정론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진화론’이라는 자연법칙은 미래에 대해 아무것도 알려주지 못한다. 뉴턴역학의 결정론적 성격은 그 수학적 구조에서 기인한다. 바로 미분방정식이다. 어느 한 순간의 물체의 위치와 속도를 알면, 다음 순간의 위치와 속도를 알 수 있다는 것이 핵심 아이디어다.
뉴턴법칙에 따른 규칙은 크게 선형線型과 비선형非線型의 두 종류로 나뉜다. 선형의 경우 규칙이 단순하여 미래예측이 쉽다. 한 번에 1미터씩 움직이는 사람은 100번이 지나면 100미터 위치에 있을 것이다. 입력에 정비례하여 출력이 커지는 것을 의미한다. 정비례 관계를 그래프로 그리면 직선이 나오기에 붙은 이름이다. 하지만 비선형의 경우는 다르다. 이 경우 막상 계산을 해보면 숫자가 규칙성 없이 무작위로 나온다는 것을 알게 된다. 따라서 100번째까지 차례대로 일일이 직접 계산해보기 전에 100번째 위치를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카오스’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카오스는 말 그대로 예측하기 힘든 복잡한 운동을 말한다. 100번째 위치는 분명 결정되어 있는데 예측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결정되어 있으니 누가 하든 차례차례 계산기로 두들겨보면 동일한 숫자를 얻는다. 내일 계산한다고 결과가 바뀌는 것도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매우 미묘한 문제와 마주하게 된다. 정해져 있는데 알 수 없다는 것이 무슨 말일까? 우리는 종종 ‘동전 던지기’로 운명을 결정한다. 앞면이 나올지 뒷면이 나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동전이 손을 떠나는 순간 결과는 정해진다. 뉴턴역학의 결정론이다.
그런데 왜 결과를 모를까? 중력하에서 날아가는 물체의 운동에 불과한데 말이다. 앞에서 이미 보았듯이 법칙이 있다고 해서 결과를 언제나 예측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선형의 경우는 예측 가능하지만 비선형은 그렇지 않다. 비선형이라고 모두 카오스는 아니다. 하지만 선형에서는 절대 카오스가 나올 수 없다. 자연의 운동은 대부분 비선형이다. 대부분의 운동을 ‘비선형’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선형 중심의 생각이다. 마치 모든 동물을 ‘비非인간’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다.
카오스에서는 왜 정해진 미래를 예측하는 것이 불가능할까?
질문으로 돌아가자. 카오스에서는 왜 정해진 미래를 예측하는 것이 불가능할까?
카오스를 보이는 물리계는 초기조건의 작은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이제는 널리 알려진 ‘나비효과’다. 동전을 던질 때 앞면인지 뒷면인지를 예측하려면 동전이 손을 떠나는 순간 동전의 초기조건을 알아야 한다. 동전의 위치, 속도, 동전이 기울어진 각도 등이 그것이다. 뉴턴방정식은 이 초깃값들에서 시작하여 한 발짝씩 움직여 최종적인 결과에 이른다. 만약 최종 결과가 초기조건에 따라 대단히 민감하게 변한다면 어떻게 될까? 얼마나 민감해야 대단히 민감한 걸까?
카오스는 초기조건에 지수함수적으로 민감하다. 초기조건이 눈곱만큼만 바뀌어도 그 효과는 금방 은하계의 크기로 커질 수 있다. 뒤집어 말하면 동전 던지기 결과를 정확히 예측하기 위해서 100경 분의 1미터의 정확도로 초기 위치를 알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의미다.
〈나비효과〉는 시간여행을 다룬 영화다. 주인공은 원하는 미래를 만들기 위해 자꾸 과거로 돌아간다. 과거를 조금 바꾸면 미래가 원하는 대로 되리라는 희망 때문이다. 하지만 상황은 언제나 예기치 못한 파국으로 치닫는다. 초기조건에 민감한 물리계는 예측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만약 동전 100만 개를 한꺼번에 던지면 어떨지 생각해보자. 100만 개 가운데 하나의 동전이 어떻게 될지를 추적하는 것은 하나의 동전만 던졌을 때보다 훨씬 더 예측이 어렵다. 100만 개의 동전들이 서로 충돌하며 더욱 복잡한 운동을 만들어낼 것이기 때문이다.
조금 다른 각도로 보자. 100만 개 동전을 일일이 추적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동전들의 ‘분포’를 예측하는 것은 가능하다. 초기에 100만 개의 동전을 모두 앞면이 되도록 하고 동시에 던져보자. 동전들은 서로 부딪히며 복잡한 운동을 할 테니 장관일 것이다. 결과에 대해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다. 누가 하든 상관없이 대략 50만 개는 앞면, 50만 개는 뒷면이 나올 것이라는 것이다.
사실 동전들의 초기조건에 큰 상관 없이 이런 결과가 나온다. 물론 정확히 50만 개는 아니지만 50만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 수학적으로 오차 범위는 대략 1,000개를 넘지 않는다. 이는 전체 동전의 0.1%에 불과하다. 이 정도 오차를 무시한다면 우리의 예측은 상당히 정확한 셈이다. 이처럼 문제를 바라보는 층위를 달리하면, 예측 가능성도 달라진다.
카오스가 있다면 초기조건에 상관없이 동전들은 결국 ‘50 대 50’이라는 통계적 결과로 간다. 이것도 법칙이라면 법칙이다. 법칙이 미래에 대한 예측과 관련이 있는 것이라면 이것도 분명 정확한 예측의 하나가 아닌가. 그런데 이런 예측은 뉴턴역학의 예측과는 조금 다르다는 느낌이 든다. 이 예측을 보장해주는 것은 무엇일까? 모두 앞면이었던 동전들이 복잡하게 운동하고 나면 결국 앞면 50%, 뒷면 50%로 간다는 것을 말해주는 방정식이 있을까? 이제 우리는 예측의 새로운 국면에 들어섰다.
열역학 제 2법칙
자연이 확률적으로 가장 그럴 법한 상태로 진행해야 한다는 것을 ‘열역학 제2법칙’이라 부른다. 이 과정을 정량적으로 표현하면 “엔트로피는 증가할 뿐이다”가 된다.
엔트로피가 증가한다는 것은 통계적으로 가장 자연스러운 상태로 진행한다는 의미다. 이 과정에 카오스가 일어나고 있으며, 지수함수적으로 빠르게 초기조건에 대한 정보가 사라진다. 그래서 엔트로피는 무지의 척도다. 통계적 상태에 도달하면 초기조건에 대한 기억은 모두 잃어버리게 된다. 그것이 확률적으로 가장 그럴 법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뉴턴은 우주에 법칙을 주었다. 하지만 그 법칙은 예측 가능성까지 보장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한 가지 확실한 예측이 있다. 엔트로피는 증가만 한다는 것. 그래서 우리는 내일로 갈 수는 있어도 어제로는 갈 수 없다. 분명히 그러하다.
시간은 왜 한 방향으로만 흐를까?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어도 내일은 온다. 하지만 무슨 짓을 해도 어제가 돌아오지는 않는다. 과학이라면 이런 당연한 자연현상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할 거다. 이 문제에 대한 답을 구하려면 다시 물리학의 아버지 뉴턴에서 시작해야 한다.
뉴턴은 일상적이지도 천문학적이지도 않은 수학적이고 추상적인 ‘절대시간’을 제안하였다. 시간이 세상과 상관없이 우주 어딘가에 존재하는 숫자가 된 것이다. 뉴턴은 그가 제안한 절대시간으로 운동법칙을 썼다. 원리적으로 그의 법칙은 모든 운동을 설명할 수 있다. 그렇다면 시간이 왜 한 방향으로만 흐르는지도 설명할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뉴턴의 운동법칙에서 시간의 방향은 의미를 갖지 못한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뉴턴의 운동방정식은 시간의 방향을 바꾸어도 똑같은 형태를 갖기 때문이다. 즉, 그의 법칙만으로는 시간이 한 방향으로 흘러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이는 뉴턴의 운동법칙에만 존재하는 문제는 아니다. 전자기법칙, 양자역학, 상대성이론 등 이후 발견된 모든 물리법칙들은 시간에 대해 방향성을 갖고 있지 않았다. 공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날아간 사건에 대해 시간을 뒤집어보면 공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날아가는 사건이 된다. 이것은 물리적으로 일어날 수 있다.
루빅스 큐브’라는 장난감이 있다. 정육면체 모양의 퍼즐인데, 모든 면을 각각 하나의 색으로 맞추는 것이 목표다. 색이 한 번 흐트러지면 어지간해서는 맞추기 힘들다. 큐브가 가질 수 있는 형태의 수는 모두 43,252,003,274,489,856,000개, 그러니까 4,000경 정도 된다. 1초에 하나씩 형태를 바꾼다면 모든 형태를 구현하는 데 1조 년이 걸린다. 우주의 나이보다 100배쯤 긴 시간이다. 무작위로 돌려서 우연히 색이 맞추어지길 기대하기는 불가능하다.
큐브를 돌리는 과정이 시간이 흐르는 것과 같다고 생각해보자. 큐브를 돌리는 방향에 제약은 없다. 시계 방향으로 돌린 것을 뒤집으려면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리면 된다. 물리법칙에 시간의 방향성이 없다는 것은 큐브를 돌리는 방향에 아무 제약이 없다는 말과 같다.
실제로 그러하다. 큐브의 색이 맞아 있는 상태에서 시작하여 무작위로 돌리면 색이 흐트러진다. 이런 당연한 사실을 법칙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이것도 법칙이라면, 시간이 왜 한 방향으로 흐르는지에 대한 의문은 해결된다. ‘큐브의 색이 맞아 있는 상태’가 ‘과거’이고, ‘큐브의 색이 흐트러진 상태’가 ‘미래’라고 하면 된다.
큐브를 무작위로 돌리면 과거에서 미래로만 가며, 그 반대 과정은 일어나지 않는다. 시간이 오직 한 방향으로만 흐르는 것, 이를 ‘시간의 화살’이라고 부른다. 운이 어마어마하게 좋아 색이 저절로 맞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지 않느냐고 질문할 수 있다. 시간이 거꾸로 갈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이렇게 생각해보자. 큐브를 70억 개쯤 준비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씩 나누어준다. 이들이 모두 무작위로 큐브를 돌렸을 때 70억 개의 큐브가 한꺼번에 색이 맞을 확률은 얼마나 될까? 사실 시간이 반대 방향으로 흐를 확률은 이보다 훨씬 낮다.
처음 이런 식으로 시간의 화살을 설명한 사람은 루트비히 볼츠만이라는 물리학자였다. 그의 설명에 학계의 반응은 싸늘했다. 시간이 한 방향으로 흐르는 것이 단지 그렇게 될 확률이 크기 때문이라니! 그렇다면 볼츠만의 이 법칙은 확률적으로 옳은 진리란 말인가? 수학적으로 본다면 완전히 틀린 말이라는 뜻이다. 안타깝게도 볼츠만은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우울증에 시달리기도 했지만, 죽을 때까지 그의 이론이 인정받지 못한 것도 그 이유의 하나가 아닐까 추측해본다.
하지만 오늘날 대부분의 물리학자는 볼츠만의 관점을 지지한다. 그래서 여기에 ‘열역학 제2법칙’이라는 멋진 이름을 붙여주었다. 이제 우리는 시간이 왜 한 방향으로만 흐르느냐는 질문에 열역학 제2법칙 때문이라는 우아한 답변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과거에서 미래로 간다는 것은 결국 상태를 이루는 경우의 수가 작은 상황에서 많은 상황으로 간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엔트로피
큐브 이야기를 곰곰이 생각해보면 ‘색이 맞아 있는 상태(과거)’와 ‘색이 흐트러진 상태(미래)’의 차이는 그 상태가 갖는 ‘경우의 수’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색이 맞은 상태는 단 한 가지 경우 밖에 없다. 하지만 색이 흐트러지는 것은 정말 수없이 많은 경우가 가능하다.
당신의 방이 잘 정돈되었을 때의 모습은 단 한 가지이지만, 방이 어질러진 형태에는 상상도 할 수 없이 많은 가능성이 있다. 세 살짜리 장난꾸러기를 방에 집어넣고 1분에 한 번씩 들여다보면 모두 다른 모습이 나올 테니 말이다. 과거에서 미래로 간다는 것은 결국 상태를 이루는 경우의 수가 작은 상황에서 많은 상황으로 간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이 ‘경우의 수’에 ‘엔트로피’라는 이상한 이름을 주면 열역학 제2법칙은 “엔트로피는 증가한다”
S=k lnW 여기서 ‘W’가 바로 경우의 수다. ‘k’는 ‘볼츠만 상수’라는 것으로 단지 단위를 맞추느라 써준 것이고, ‘ln’은 ‘자연로그’라는 것으로 고등학교 이과수학에 나오는 특수함수다. ‘k’, ‘ln’ 둘 다 몰라도 상관없다. 엔트로피는 ‘경우의 수’라는 것이 중요하다. 결국 시간이 한 방향으로 흐른다는 것은 “우주의 엔트로피가 증가한다”라는 말과 같은 의미다.
그렇다면 우주의 엔트로피가 증가하려면 과거의 엔트로피가 작았어야 하는 거 아닌가?
큐브로 이야기하면, 처음에 큐브의 색깔이 맞춰져 있었어야 했다는 말이다. 우주의 큐브는 처음에 누가 맞춰놓은 걸까?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점점 엔트로피가 작아져서 결국에는 엔트로피 0의 상태, 단 하나의 가능성만 있는 상태에 도달하게 된다. 우주가 한 점에서 출발했어야 한다는 말이다. 바로 빅뱅이다. 빅뱅은 천문학적인 관측 증거를 가지고 있지만, 엔트로피와 시간의 방향을 생각해보면 필연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결론이기도 하다. 빅뱅이 왜 있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빅뱅이 없었으면 시간이 미래로 흐를 수 없다.
통계물리
색이 맞아 있는 큐브가 흐트러진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새로운 물리법칙을 고안할 필요는 없다. 큐브를 무작위로 조작하다 보면, 경우의 수가 큰 쪽으로 가게 마련이라는 ‘당연한’ 가정이면 충분하다. 열역학 제2법칙은 법칙 아닌 법칙인 거다. 이런 의미에서 아인슈타인은 열역학법칙이야말로 최후까지도 뒤집히지 않을 물리법칙이라 말한 바 있다. 여기서 핵심은 경우의 수가 많은 것이 쉽게 일어난다는 거다. 이처럼 수가 많다는 것은 그 자체로 새로운 현상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의미다. 이런 것을 다루는 분야를 ‘통계물리’라고 한다. 통계물리는 많은 수의 대상을 통계적으로 다루어 새로운 물리적 현상이나 규칙을 찾는 분야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주위에 있는 셀 수 없이 많은 공기 분자들과 충돌하고 있다. 공기 분자는 소리보다 빠르지만, 우리는 공기 분자와 부딪히고 있다는 것을 인식조차 할 수 없다. 공기 분자가 우리 피부에 가하는 평균적인 충격을 ‘압력’이라 하고, 그들이 가진 평균 운동에너지를 ‘온도’라고 한다. 산에 올라가면 압력이 낮아진다. 우리 몸을 두드리는 공기 분자의 수가 작아지기 때문이다. 우주공간에 나가면 공기가 거의 없으니 압력이 ‘0’에 가까워진다. 날씨가 춥다는 것은 단지 공기 분자의 평균 속력이 작다는 거다.
여기서 반복하여 등장한 ‘평균’이라는 통계적 표현에 주목하자. 이런 통계적 기술이 가능한 이유는 다시 말하지만 우리 주변에 있는 공기 분자가 어마어마하게 많기 때문이다. 작은 방 안에 있는 공기 분자의 수는 대략 10,000,000,000,000,000,000,000,000,000개 정도다. 사실 ‘0’ 몇 개를 잘못 써도 문제없을 정도로 큰 수다. 우리가 사는 세상의 모든 물질은 엄청나게 많은 수의 원자, 분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통계물리는 자연을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알아야 하는 지식이다.
물에 잉크를 한 방울 떨어뜨리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잉크가 퍼져서 물 전체가 뿌옇게 된다. 하지만 가만히 놓아둔 뿌연 물이 맑은 물과 잉크 한 방울로 스스로 분리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잉크가 한곳에 방울로 모여 있는 것보다 퍼져 있는 경우의 수가 많기 때문이다. 즉, 잉크가 퍼져가는 과정은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과정인 것이다. 통계물리의 방법은 잉크의 확산이라는 자연현상과 큐브의 문제를 동일한 방식으로 설명해준다.
하나의 물 분자는 수소 원자 두 개와 산소 원자 하나로 구성된다. 두 개의 수소 원자는 104.5도의 각을 이루며 산소에 붙어 있다. 하나의 물 분자는 이처럼 그냥 꺾인 막대기다. 하지만 물 분자가 무수히 많이 모이면 ‘물’이라는 새로운 상태가 된다. 하나의 물 분자로부터 흐르는 강물의 모습을 상상하기는 불가능하다. 양질전환量質轉換이랄까. 이제 온도를 바꾸면 물이 얼음이 되거나 수증기가 된다. 이것은 물 분자의 집단이 협동하여 만들어낸 새로운 실체다. 하나의 입자는 시작도 끝도 없는 절대시간 위를 움직인다. 여기에는 시간의 방향도 없다.
수많은 입자가 모이면 비로소 시간이 흐르기 시작하고, 새로운 현상들이 창발創發한다. 인간 역시 수많은 입자들이 모여 만들어진 새로운 실체다. 자신이 왜 존재하는지 고민하는 실체다.
보는 것은 믿는 것이다.
양자역학적으로 생각하면 우리는 본 것을 그리는 것이 아니다. 있는 그대로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보았다고 믿는 것을 그린다. ‘보는 것은 믿는 것이다’라는 서양속담이 있다. 보는 것이 왜 믿는 것이라고 했을까? 보는 것은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감각이기 때문이다.
본다는 것은 무엇일까? 눈앞에 있는 스마트폰이 보인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우선 빛이 스마트폰에 맞아 튕겨 나온다. 튕겨 나온 빛은 사방으로 흩어지는데, 그 일부가 우리 눈에 도달한다. 수정체를 통과하며 굴절된 빛은 망막에 스마트폰의 상을 맺는다. 망막에 있는 세포는 빛을 감지하여 전기신호를 발생시키고 이것이 뇌로 이동하면 우리는 보았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본 것’은 본 ‘것’과 같은 것일까? 우리 뇌에 떠오른 심상은 물체와 같은 모습일까?
과학의 역사는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의심하는 데에서 시작했다. 지구는 정말 편평한가? 태양이 정말 돌고 있나?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시간이나 길이가 무엇인지 묻는 것에서 출발한다.
양자역학 태어나다
25세의 베르너 하이젠베르크(1932년 노벨물리학상)가 혜성같이 나타난다. 하이젠베르크는 역사를 바꿀 질문을 던진다. 전자를 직접 볼 수 있을까? 직접 본다면 전자가 정말 움직이는 공처럼 공간을 가로질러 연속적으로 날아가는 것으로 보일까? 과학의 역사를 보라. 당연한 것은 당연하지 않다. 본 적도 없는, 아니 영원히 볼 수 없을 게 분명한 전자가 왜 상식대로 행동할 거라 생각할까? 이제 하이젠베르크는 엄청난 도약을 한다. 전자가 공처럼 행동한다는 기본 관념을 내던지고, 오로지 직접 알 수 있는 물리량들만 가지고 이론을 만들어보기로 한 것이다.
당시 원자를 설명하는 보어의 이론에 따르면 원자 내에는 불연속적인 ‘상태’들이 존재했다. 지구 주위를 도는 인공위성들의 ‘궤도’를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인공위성의 궤도 반지름을 바꾸고 싶으면 엔진을 작동시켜 더 높은 위치나 낮은 위치로 이동하면 된다. 이때 연료만 충분하다면 원하는 곳 어디든 갈 수 있다. 하지만 원자 내의 전자는 특별한 반지름을 갖는 궤도에만 존재할 수 있다.
이유는 모른다. 한 궤도에서 다른 궤도로 이동할 때는 그냥 점프를 해야 한다. 문제는 점프를 하는 동안 궤도 사이를 연속적으로 이동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냥 한 궤도에서 사라져서 다른 궤도에 짠하고 나타나야 한다. 역시 이유는 모른다. 당시 물리학자들이 보어의 이론을 싫어한 것도 당연하다. 전자가 이렇게 점프를 할 때 빛을 흡수하거나 방출한다. 우리가 원자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이렇게 점프할 때 드나드는 빛뿐이다. 빛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점프를 ‘시작하는 상태’와 ‘끝나는 상태’가 반드시 정해져야 한다. 고속도로 통행료를 내려면 입구와 출구를 알아야 하는 것과 같다.
물리에서는 입구와 출구 모두 에너지로 기술된다. 즉, 시작 에너지와 끝 에너지가 필요하다. 가로 방향을 시작 에너지, 세로 방향을 끝 에너지 순서로 이들을 늘어세우면 2차원 격자 모양의 배열이 얻어지는데 이런 숫자들의 배열을 수학에서는 ‘행렬’이라고 부른다. 이제 하이젠베르크는 선언한다. “원자는 행렬이다”라고.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피타고라스는 “만물은 수다”라고 했다는데, 하이젠베르크는 “만물은 수의 배열이다”라고 한 셈이다.
그러나 행렬역학은 원자의 모든 것을 제대로 설명하기 시작한다. 드디어 양자역학이 탄생한 것이다. 하이젠베르크의 행렬역학에서 열기가 채 가시기도 전에 에르빈 슈뢰딩거(1933년 노벨물리학상)는 파동역학을 내놓았다. 전자의 이중성, 그러니까 전자가 입자이자 파동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둔 양자이론이다. 파동역학은 전자의 파동을 기술하는 방정식을 담고 있다. 이 방정식을 ‘슈뢰딩거 방정식’이라고 부른다.
행렬역학은 원자를 추상적인 수학적 구조로 보고, 파동역학은 원자의 본질을 물결과 같은 파동이라 생각한다. 자세한 내용을 알지 못하더라도, 이 둘이 전혀 다르게 생겼다는 것쯤은 금방 알 수 있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방법은 동일한 예측을 내놓았다. 놀라운 일이지만 수학적으로 두 이론이 동일한 구조를 가지기 때문이다. 실제 오늘날 물리학자들은 두 가지 방법 모두를 자유자재로 사용한다.
우리가 앞에서 얻은 결과의 물리적 의미는 무엇일까? 행렬역학은 불연속적인 점프를 내포하고 있다. 전자는 어떻게 두 상태 사이를 순식간에 이동할 수 있을까? 파동역학은 전자가 파동이라고 말해준다. 하지만 전자는 질량을 가진 입자다.
전자의 파동방정식은 전자가 입자라는 명백한 사실과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 더구나 파동은 여러 장소에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 소리를 생각해보라. 하지만 입자는 한 순간 한 장소에만 존재할 수 있다. 전자가 파동이라면 동시에 여기저기 존재할 수 있다는 말이다. 전자는 유령인가.
양자역학의 모든 미스터리를 푸는 열쇠는 바로 ‘본다는 것’에 있다.
측정할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생각해보자. 빛이 스마트폰에 부딪힐 때 무슨 일이 일어날까? 빛이 당구공 같은 크기의 입자라면 부딪힐 때 아파야 한다. 스마트폰에 빛이 부딪히고 튕겨 나올 때 스마트폰이 그 충격으로 움직여야 한다. 당연히 말도 안 된다.
빛에 맞아서 휘청거렸다는 말은 들어본 적 없지 않은가. 하지만 전자와 같이 무지무지 작은 녀석은 어떨까? 실제 전자는 빛과의 충돌로 휘청거린다. 원래 위치에서 벗어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전자에 부딪혀 튕겨 나온 빛을 보고 알아낸 위치는 어떤 의미를 가질까? 전자는 이미 그 장소에 없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은 우리가 느끼고 알 수 있는 현상의 세계 바깥에 모든 사물의 근원이자 본질인 이데아가 있다고 주장했다. 전자에 빛이 닿을 때마다 움직인다면 우리는 전자의 현재 위치를 결코 알 수 없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전자는 어느 위치엔가 분명히 존재할 것이다. 결코 알 수 없지만 존재한다고 믿는 전자의 위치는 마치 플라톤이 이데아를 가정했던 것과 닮아 있다. 결코 알 수 없는데 알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 자체로 모순 아닌가?
알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말아야 한다. 즉, 측정이 대상에 변화를 일으킨다면 전자의 정확한 위치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측정의 부정확성이나 오차가 아니라 본질적인 문제다. 누구도 전자에 교란을 주지 않고 위치를 알아낼 수 없다. 보이지 않는 이데아를 이야기하는 것은 물리가 아니다. 결국 원자의 세상에서 우리는 대상에 대해 모든 것을 완벽히 알아낼 수 없다. 현재의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다면 나중의 정확한 위치를 예측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일종의 불가지론이다. 그렇다면 양자역학은 무엇을 예측하는가?
양자역학의 확률은 수학적으로 완벽하게 결정되는 실체와 비슷하다. 측정할 때마다 전자는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 같지만 결과를 모아보면 슈뢰딩거 방정식이 예측하는 확률분포와 완벽하게 일치한다는 뜻이다. 주사위 던지기를 생각해보면 이해하기 쉽다. 매번 무작위로 숫자가 나오지만 모아보면 각 면이 나올 확률은 정확히 6분의 1이다. 이런 의미에서 양자역학은 완전히 모른다는 의미의 불가지론이 아니다.
리처드 파인먼(1965년 노벨물리학상)은 “이 세상에 양자역학을 정확히 이해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라고 단언했다. 그러니 너무 좌절하지 마시라. 아무튼 이로써 양자역학의 핵심개념은 모두 이야기했다.
‘이것’은 또한 ‘저것’이다. ‘저것’ 또한 ‘이것’이다.
장자는 이것과 저것의 대립이 사라져버린 것을 ‘도道’라고 했다. 대립되는 두 개념이 사실 하나의 개념이라는 생각은 동양인들에게 익숙한 철학이다. 음양陰陽의 조화라든가 중용中庸 같은 것도 대립하는 개념 사이에서 옳은 쪽을 찾기보다 둘을 조화시키는 동양의 지혜다. 논리적으로만 보자면 대립되는 두 명제 가운데 하나가 참이면 다른 하나는 거짓이다. 이런 이분법은 선악 개념에 기초한 기독교에서 친숙하다. 그래서 서양인들은 대립물을 하나로 보는 생각을 이해하기 힘들어하는지도 모르겠다. 20세기 초 현대물리학, 특히 양자역학이 발견한 것은 어찌 보면 동양의 오래된 지혜였다. 서로 양립할 수 없는 두 개념이 혼재하는 것이야말로 자연의 본질이라는 거다.
상보성의 중요한 예는 하이젠베르크가 찾아낸 ‘불확정성의 원리’다. 불확정성의 원리란 물체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정확히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운동량은 물체의 질량에 속도를 곱한 거니까 그냥 속도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위치와 속도는 뉴턴의 역학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개의 물리량이다. 이 원리는 물리학자들이 자연을 이해하는 데 근본적인 제약을 가한다. 이제 물리학자는 우주를 완벽하게 기술하는 전지적 위치에서 주관적이고 확률적이며 불확실한 세상으로 내동댕이쳐진다.
많은 사람들이 양자역학과 동양철학 사이의 유사성에 대해 흥미를 갖는다. 서양 물리학자 프리초프 카프라는 『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에서 그 유사성에 대해 자세히 정리해놓았다. 이런 유사성은 그 자체로 흥미롭지만 과학적으로 의미가 크지는 않다. 과학은 실험적 증거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철학은 생각의 틀을 제공하는 법이다.
‘당구공’의 대립물對立物은 무엇일까? 물리학자의 답은 ‘소리’다. 선문답으로 들릴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입자’의 대립물이 ‘파동’이라는 뜻이다. 당구공과 같은 입자는 무게를 가지고 있지만, 소리와 같은 파동은 무게가 없다. 당구공은 어디 있는지 알 수 있다. 하지만 소리는 어디 있다고 꼭 집어 말할 수 없다. 만약 당구공이 파동같이 행동한다면 여기저기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는 뜻이 된다. 반대로 소리가 당구공같이 행동한다면 소리의 개수를 하나둘 셀 수 있다는 말이다. 입자와 파동이 대립물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서로 전혀 다르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빛은 입자다
첫 번째 증거는 ‘흑체복사’라는 현상이다. 복사輻射란 빛을 내는 것이다. 온도를 가진 모든 물체는 빛을 낸다. 인간도 빛을 내고 있다. 그런데 왜 깜깜한 방에 들어가면 안 보이는 걸까? 사람은 체온에 해당하는 흑체복사, 즉 적외선에 해당하는 빛을 낸다. 인간의 눈은 적외선을 볼 수 없다. 적외선도 전자기파의 일종이다. 적외선을 감지하는 야시경을 쓰면 깜깜한 방에서도 사람이 보인다.
빛이 입자라고 처음으로 용감하게 외친 사람은 당시 특허청 말단 직원이었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1921년 노벨물리학상)이었다. 빛이 입자라는 두 번째 증거는 ‘광전효과’다. 금속에 빛을 쬐면 전자가 튀어나오는 현상이다. 사실 이 실험은 금속에 전자를 충돌시켜 빛이 나오는 실험을 거꾸로 한 것이다.
1905년 아인슈타인이 빛은 입자라고 용감하게 주장했지만, 당시 대부분의 물리학자는 콧방귀조차 뀌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하다. 빛은 파동이니까. 빛이 입자라는 세 번째 증거가 나오자 비로소 물리학자들은 빛의 입자성을 받아들이게 된다. 1920년대 초 아서 콤프턴(1927년 노벨 물리학상)이 빛으로 당구공 실험을 하여 빛이 입자라는 사실을 증명한 것이다.
당구공을 서로 충돌시키면 어떻게 행동할지 뉴턴역학으로 완전히 기술할 수 있다. 콤프턴은 빛이 당구공같이 행동한다는 사실을 보인 것이다. 이제 물리학자들은 서양과학사의 최대 모순에 빠지게 된다. 파동임에 틀림없는 빛이 입자의 성질을 갖는다. 여기서 ‘이중성’이라는 용어가 탄생한다. 흥미로운 일이지만 물리학에 이중성이라는 개념이 탄생하던 1920년대, 예술에서는 ‘초현실주의’ 운동이 시작되었다. 이는 인간의 무의식을 예술로 표현하는 것으로, 프로이트의 심리학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르네 마그리트의 <표절Le Plagiat> 같은 그림을 보면 집 안에 있는 나무 내부에 집 밖의 풍경이 그려져 있다. 공존할 수 없는 개념의 공존은 이 시대의 새로운 사고방식인지도 모르겠다.
전자는 입자다. 무게를 갖는다. 그래서 전자빔을 쬐면 바람개비가 돌아간다. 세상 만물은 원자로 되어 있다. 우리 몸도 원자로 되어 있다. 원자는 전자와 원자핵으로 구성된다. 전자가 파동이라면, 우리 몸이 소리로 되어 있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전자의 파동성은 큰 저항 없이 물리학계에 받아들여진다. 이미 빛의 이중성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빛과 전자는 왜 입자성과 파동성을 동시에 갖는 것일까?
빛과 전자는 왜 입자성과 파동성을 동시에 갖는 것일까? 이 두 성질은 물리적으로 결코 양립할 수 없다.
무선 통신할 때 빛은 파동으로 행동하지만, 광전효과실험에서 빛은 입자로 행동한다. 이 두 실험을 동시에 할 수는 없다. 둘 중에 하나의 실험을 하면 빛은 입자와 파동, 둘 중 하나로 결정된다. 마치 남자냐고 물으면 남자가 되고 여자냐고 물으면 여자가 되는것과 같다.
전자도 마찬가지다. 사실 양성자, 중성자 등 물질을 이루는 모든 기본입자뿐 아니라, 이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원자도 전자와 같은 이중성을 갖는다. 이중성은 자연의 본질인 것 같다. 여기서는 질문이 존재를 결정한다. 보어는 이중성의 이런 특성을 ‘상보성’이라 불렀다.
힌두교의 경전 『우파니샤드』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그것은 움직인다. 그것은 움직이지 않는다. 그것은 멀다. 그리고 그것은 가깝다. 그것은 이 모든 것 속에 있으며 이 모든 것 밖에 있다.” 상보성은 모든 대립물이 동시에 옳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실험을 하면 대립물 가운데 하나로 답이 정해진다. 상보성은 정반합正反合의 철학과도 다르다. 상보성은 정正과 반反이 공존한다고 말할 뿐이다. 둘이 융합하여 새로운 합合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실험을 하면 대립물 가운데 하나만 옳다. 상보성 개념을 제안했던 보어는 1937년 중국을 방문한다. 거기서 그는 태극문양을 보고 큰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양자역학을 이해할 사고의 틀이 서양에는 없었지만, 동양에는 있었던 것이다. 1947년 보어는 물리학에 대한 그의 공로로 덴마크 귀족작위를 받게 된다. 그는 자신의 귀족예복에 태극문양을 새기고 ‘Contraria sunt Complementa(대립적인 것은 상보적인 것이다)’라는 라틴어 문구를 넣었다고 한다.
상보성에 따르면 이렇게 작은 원자의 위치와 속도는 동시에 정확히 알 수 없다. 베르너 하이젠베르크(1932년 노벨물리학상)가 발견한 ‘불확정성의 원리’다. 위치와 속도를 모두 정확히 알 수 없다면 물체의 운동을 정확히 예측할 수 없다.
불확정성의 원리가 옳다면 우리는 원자에 대해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셈이 된다. 한마디로 모른다는 거다. 불확정성의 원리가 말하는 무지無知는 우리의 실험장비나 감각기관의 부정확성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다.
뉴턴의 물리학은 물체의 운동을 완벽하게 기술한다. 우리는 언제 일식이 일어날지, 언제 화성이 지구에 가장 근접할지 알 수 있다. 17세기 이래로 물리학이 승승장구한 이유다. 하지만 원자에 대해서는 결론이 모른다는 거라니. 양자역학이 발견한 물리, 즉 사물의 이치는 결국 불가지론이란 말일까. 아니다. 양자역학은 인간이 만들어낸 모든 과학이론 가운데 가장 정밀한 결과를 준다. 더구나 20세기의 첨단과학은 대부분 양자역학의 자식이다. 양자역학은 그 자신의 원리만큼이나 이중적이다.
<인터스텔라>에서 화제가 된 블랙홀의 모습은 이 영화에서 가장 과학적인 부분이다. 보통 블랙홀이라고 하면 빛조차 빠져나올 수 없으니 보이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영화에서 블랙홀은 휘황찬란한 모습으로 그려지는데 왜 그럴까?
지구나 태양 같은 천체들과 마찬가지로 블랙홀도 구형球形이다. 블랙홀은 물체를 빨아들인다. 빨려 들어가는 물체는 소용돌이에 빨리듯이 빙글빙글 돌며 블랙홀로 들어간다. 이것들은 엄청난 속도로 들어가며 서로 부딪히기 때문에 강렬한 빛을 낸다. 따라서 블랙홀 주위에 토성의 띠와 같이 밝은 빛의 띠가 생기게 된다. 그런데 블랙홀 주변에서는 빛이 휜다. 따라서 빛의 입장에서 블랙홀 주위 공간은 렌즈와 비슷하다.
로또는 1부터 45까지의 숫자 6개를 맞히는 게임이다. 당첨 확률은 대략 800만 분의 1. 동전을 연속으로 23번 던져 앞면만 나올 확률과 비슷하다. 2017년 1등 당첨자의 평균 상금이 세금 빼고 16억 정도라니까 기댓값은 200원에 불과하다. 현재 복권 한 장의 가격은 1,000원이다.
복권의 결과에 승복하는 것은 그것이 우연으로 정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 같은 물리학자에게 우연은 단순한 개념이 아니다. 동전 던지기 정도로 구현할 수 없다는 말이다. 아니, 동전 던지기 결과가 우연으로 정해지지 않는다고? 그렇다. 동전 던지기는 중력하에서 던져 올린 물체의 운동에 불과하다. 교과서에서는 연직상방운동이라 부른다. 고등학교 물리시험 문제의 악몽이 떠오르지 않나? 교과서에서 동전은 크기가 없는 점 하나로 기술된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설정 때문에 학생들이 물리를 싫어한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동전이 크기를 가지면 회전할 수 있기 때문에 대학에 가야 풀 수 있는 어려운 문제가 된다.
뉴턴역학
뉴턴의 운동법칙은 미분방정식으로 기술된다. 미분방정식의 철학은 단순하다. 미분은 기계적인 절차의 기술이다. 오른발 다음에 왼발을 내딛으라는 알고리즘이다. 한 걸음을 제대로 내딛을 수 있다면 걸어서 어디든 갈 수 있는 것과 같다. 정확히는 이웃한 두 시각 속도들 사이의 관계다. 우주는 시간의 시작부터 끝까지 뉴턴법칙이 기술하는 방식으로 손을 맞잡고 늘어선 기다란 시간의 체인이다. 모든 것은 정해져 있다. 뉴턴은 이렇게 세상에서 우연을 몰아냈다.
뉴턴역학은 바빌로니아에 균열을 일으킨다. 자연법칙은 미분방정식으로 기술된다. 세상에 우연이 들어설 자리는 없다. 그러면 자유의지는? 자유의지가 없다면 죄도 없다. 복권의 벌칙에 당첨된 나의 선택에 비난받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우리는 죄를 벌하지 못하는 무법천지의 세상을 살아야 할 거다. 그래서 보르헤스는 회사가 빈틈이 없었다고 한 걸까.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는 뉴턴이 야기한 무법천지의 아수라장에서 세상을 구한다. 바로 ‘영혼’이라는 새로운 복권을 만들어낸 것이다. 영혼은 뉴턴법칙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영혼에는 우연이 있고 자유의지가 있다. 이렇게 근대철학자는 우리에게 죄를 돌려주고 지옥을 리모델링했다.
그렇다면 사과는 떨어지는데 달은 왜 떨어지지 않을까? 지구와 달 사이에도 중력이 작용한다. 따라서 달도 지구로 떨어진다. 달이 낙하한다고? 사과를 야구공 던지듯 수평으로 던지면 포물선을 그리며 낙하한다. 지구가 편평하다면 사과를 아무리 세게 던져도 결국 바닥에 떨어질 거다. 하지만 사과가 낙하하는 거리만큼 땅바닥이 덩달아 밑으로 가라앉으면 사과는 바닥에 닿지 않을 수 있다. 지구가 둥글기 때문에 가능한 이야기다. 날아가며 낙하한 거리가 (지구가 둥글어) 내려앉은 거리와 일치한다면 말이다. 달이 낙하하지만 바닥에 닿지 않는 이유다.
낙하에 대한 단순하고 아름답고 심오한 설명이다. 모든 물체는 서로 끌어당긴다. 따라서 서로가 서로에게 낙하한다. 지구는 태양으로 낙하하고 있지만 태양에 닿지 않는다. 인공위성은 지구로 낙하하고 있지만 바닥에 닿지 않는다. 태양은 우리은하 중심의 블랙홀을 향해 낙하하고 있지만 블랙홀에 닿지 않는다. 뉴턴은 이 모든 사실을 수학적으로 증명하였다. 그 과정에서 F=ma라는 운동법칙을 정립했음은 물론, 이 식을 풀기 위해 미적분이라는 수학마저 만들어냈다
중력이 어떻게 전달되느냐는 의문에 대한 단서는 전자기 현상에서 나온다. 두 개의 자석은 방향에 따라 서로 당기거나 밀어낸다. 이들은 서로의 존재를 어떻게 아는 걸까? 사실 이 질문은 중력에서 했던 질문과 완전히 같은 것이다. 질량이 있으면 주변에 중력장이 존재한다. 마치 거미가 있으면 주위에 거미줄이 있는 것과 같다. 달은 지구를 직접 느끼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만든 중력장을 느낀다. 질량이 움직이면 중력에 변화가 생기며 이 변화는 중력장의 진동으로 전달될 것이다. 그 진동의 이름은 ‘중력파’다.
뉴턴의 운동법칙 F =ma에는 세 개의 알파벳이 등장한다. 힘(F ), 질량(m), 가속도(a)다. 뉴턴에 따르면 이 수식은 왼쪽에서 오른쪽 방향으로 해석된다. 물체에 힘(F )을 가하면 가속(a)된다. 속도가 바뀐다는 의미다. 같은 힘에 대해 질량(m)이 클수록 가속은 작다. 문제는 왜 질량이 여기 있냐는 것이다.
가속되는 사람은 (존재하지도 않는) 힘을 느낀다. 뉴턴의 운동법칙 F =ma를 이번에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가며 해석해보자. 그 사람이 느끼는 가속도에 질량을 곱하여 힘을 얻는다. 결국 이 힘은 질량이 만드는 것처럼 보인다. 질량이 만드는 힘은 중력이다. 결국 운동법칙에 질량이 등장하는 이유는 가속되는 사람이 느끼는 힘이 중력과 같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은 이것을 ‘등가원리’라고 불렀다. 가속과 중력을 구별할 수 없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