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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쨌든 Mar 16. 2020

방학중 교실의 크리스마스 이브

술과 파티의 시절 1

반세기 가까이 살아오면서 술을 많이 먹은 건 아니다. 나는 평소 주량도, 지금까지 먹은 술의 총량도, 아마 평균 한국인보다 낮은 축에 속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청춘의 정말 많은 시간을 술을 먹으며 보냈다. 


지금이야 술집은 거의 가지 않으며,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 간단히 반주를, 진짜 ‘한 잔’만 곁들이는 중년이 되었지만, 젊은 시절 소주집에서, 호프집에서, 바(bar)에서 술 마시며 담배 피우던 내 모습이 문득 떠오를 때면 달콤 씁쓸한 추억에 잠긴다. 


물론 그런 기억이 체계적으로, 시간순으로 죽 이어지는 것도 아니고 장면들과 인물들과 대화들이 선명하지도 않다. 술의 종류나 안주 내용물에 초점이 제대로 맞춰지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 수많던 술판들에 대한 기록이 하나도 남지 않는다면 그 길고 길었던 시간들의 의미는 뭐가 될까. 


술에 얽힌 자서전. 다양한 상황과 감정과 주제가 섞이겠지만, 한 번 시도는 해봐야겠다. 언뜻언뜻 떠오르는 이미지들을 이제부터라도 종종 메모해야겠고, 아주 가끔 남은 술자리 사진을 찾아 조만간 누런 폴더들을 뒤져봐야겠다. 


솔직히 나에게 ‘술’ 하면 가장 선명한 기억은 구토와 끊긴 필름과 숙취와 위염 같은, 객기의 사건들이다. 

하지만 처음 술을 마셨던 ‘상큼한’ 최초의 기억은 수십년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 머릿속에 또렷이 남아 있고, 예전엔 종종 술자리 무용담으로 펼쳐놓던 일화다. 


우리는 고2때 친해진 네 명의 친구들이었다. 고3때도 같이 야간자습을 하며 친하게 지냈다. 그러다가 각자 정신없이 대학입시를 치렀고, 연말이 되어, 두 명은 붙고 두 명은 떨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연말이, 크리스마스가 눈앞에 다가왔다. 


대학에 붙은 두 명은 떨어진 두 명을 보기가 어색하고 미안했지만, 애써 밝은 분위기를 만들며 같이 크리스마스 파티를 하자고 부추겼다. 우리 넷은 사실 반항아 기질이 다분한, 학교에서 말썽쟁이 취급을 받던 아이들이었다. 그래서 모인 아이들이었다. (http://blog.daum.net/uchatn/27 참고) 그러니 우리의 크리스마스 파티도 좀 남다를 필요가 있었다. 졸업 전 마지막 사고를 치며 이 사악한 고등학교에 작별을 제대로 고할 필요가 있었다.


그 동안은 넷 중 하나의 집에서 돌아가며 모이곤 했지만, 졸업 전 크리스마스 파티는 학교에서, 우리가 함께 했던 교실에서, 이브 날 밤에 치르기로 했다. 들키면 안 되니 전등은 켤 수 없고, 대신 촛불을 켜기로 했다. 각자 먹거리와 ‘술’도 가져 오기로 했다. 


우리는 숨을 죽이고 불 꺼진 학교로 숨어들었다. 문이 잠긴 곳도 있었지만 학교에는 개구멍이 많았고 우리에겐 하나하나 틈새를 확인해 볼 시간과 끈기가 있었다. 꽤 늦은 시각에 예전 교실로 몰래 들어갔다. 촛불을 켜고 가져온 음식을 먹으며 난생 처음 마주앙 포도주를 홀짝홀짝 나눠 마셨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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