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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쨌든 Jul 12. 2024

단골 뮤직 바 네 곳

술과 파티의 시절 9

뮤직 바 1 히피풍의 하드록


거긴 히피풍의 바였다. 유흥가 한복판에서 약간 벗어난 골목 지하, 나무껍질이 남아 있는 목재들, 한쪽 벽면 가득 바이널 레코드를 꽂았다. 기둥들 사이로 치렁치렁 늘어진 드림 캐처 같은 장식물들과 몽환적인 영화 포스터들이 걸렸다. 침침한 조명에 탁자마다 촛불이 놓이고 토기 스타일의 잔과 접시를 사용했다. 분위기의 8할은 음악이 했다. 사이키델릭 록 위주의 올드 팝으로 공간을 꽝꽝 채웠으니까.


주변 유흥가에서는 갑자기 의자에서 일어나서 춤을 추는 록카페들이 생겨나고 있었다. 히피풍의 바에서도 춤을 출 수는 있었지만 디제이가 작정하고 분위기를 만들어주지 않는 한, 아무래도 어색한 행동이었다. 고개는 흔들 수 있었다. 서너 명이 모여서 술을 마시다가, 소리 지르며 대화하기에 목도 아파지고 취기도 오르면 저마다 고개를 푹 숙이고 끄덕끄덕 박자를 맞췄다.


그보다는 음악 신청으로 기지개를 한번씩 펼 수 있었다. 디제이 부스 앞까지 가서 조그맣게 잘라놓은 이면지 조각들과 몽당연필을 가지고 와서 일행들에게 나눠주고 나도 쓰기 시작한다. 영어 스펠링 때문에 머리를 쥐어짜다가 생각이 안 나면 한글로 적기도 한다. 종이들을 모아서 디제이에게 갖다주고 난 다음에는 설레며 기다린다. 내 노래가 나오면 환성을 지르며 한 팔을 올리고 고개를 조금 더 격하게 흔들었다.


거기서 처음 데킬라를 마셔보고 나의 최애 독주로 삼았다. 소금을 유리잔 테두리에 묻힌다든가, 손등에 레몬을 짜낸 후 소금을 뿌린다든가 하는 실험 끝에, 이제는 술과 함께 레몬을 그냥 먹는 걸로 정착했다.


뮤직바 2 평론가의 동생


술친구는 수명이 짧은 거 아닐까. 내 인생에 거의 유일했던 술친구랑은 1년도 못 갔으니까. 매일 저녁 바에 나란히 앉아 맥주병 뚜껑을 비틀어따던 짝궁.


그때쯤에는 레코드가 바이널에서 시디로 바뀌었다. 바의 주인은 음악평론가의 동생이었고 바에 진열된 엄청난 양의 시디는 형의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우리가 그집에 매일 가서 죽때렸으면서도 형의 얼굴은 한 번도 못 봤다. 형과 비슷하게 생긴 동생만 지루한 표정으로 바를 지켰다.


거기서 나의 술친구는 애인에 대한 성적 불만을 토로하고, 바람을 피울까 궁리하며 썸을 타다가, 결국은 엉뚱한 인간과 원나잇스탠드를 해버렸다. 그러고서 나서는 결국 더 왁자지껄한 무리를 향해 떠났다. 나도 그 바에서 원나잇스탠드 상대를 만나볼까 하다가, 키스만 하고 도망쳐나왔다.


한편 그 무렵 술친구의 썸 상대는 레이블을 하나 차려 음악 비즈니스를 시작했다. 꽤 번창했고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다음, 내 다른 친구의 남편이 그 레이블을 인수인계 받았다는 걸 알게 됐다.


뮤직 바 3  레논과 감자칩


그 바의 이름은 레논이었다. 오로지 존 레논과 비틀즈의 음악만 트는 바였다. 술은 다양하게 팔았지만 안주는 오직 프링글스뿐이었다. 그래서 그 바를 우리는 프링글스라고 불렀다. 우리는 프링글스를 먹고 싶을 때, 존 레논의 음악을 듣고 싶을 때만 그 바에 갔다. 의외로 꽤 자주 가게 되어서 희한했다. 존 레논도, 프링글스도 그냥 그랬는데, 콱 좁아진 선택의 폭이 이상하게 마음을 안정시켰다.


바텐더는 하얀 벙거지 모자를 눌러쓰고 있었다. 모자 속은 빡빡머리 같았지만, 한 번도 벗은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말도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히피풍의 바 주인과도, 평론가의 동생과도 종종 수다를 떨었는데, 프링글스의 바텐더와는 아니었다. 그에게는 머리카락뿐 아니라 눈썹도 없었다. 근데 그게 꽤 정결한 느낌을 주었다.


흑백 인테리어의 그 바에 갈 때마다 미래풍 소설 속에 잠기는 듯했다. 공기가 제거된 그 공간에선 아무도 흥분하거나 늘어지지 않았다. 사이보그가 된 것처럼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술을 마셨다.  



뮤직 바 4 마약의 이름


마지막으로 다니던 바는 마약의 한 종류를 이름으로 가지고 있었다. 이름의 유래를 아무리 물어봐도 바텐더는 대답을 피했다. 레즈비언 여자애가 보조 바텐더를 맡고 있어서, 레즈비언 친구랑 그 바에 자주 드나들었다. 우리는 보조 바텐더뿐 아니라 주인 바텐더와 자주 대화를 나눴다.


다른 바의 바텐더들도 그랬지만, 마약 바텐더는 특히나 하루키를 의심하게 만들었다. 손님 없는 날은 습작을 쓰고 있는 게 아닐까. 자기들도 10년쯤 바를 하다보면 어느날 아침 소설가가 되어 있을 거라 기대하는 게 아닐까.


그러다가 어느 날 서점에서, 그 바의 이름을 단 소설 책을 발견했다. 그 바에 헌정된, 그 바를 배경으로 한 장편 소설이라고 했다. 조금 펼쳐봤는데, 당최 요령 부득이어서, 읽어보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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