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속 성장 시대 중산층 음식 자서전 28
외식이 드문 집에서 자라 엄마가 해주는 밥만 먹던 나였는데, 스무살이 되면서는 외식의 망망대해로 나와버렸고 이후로는 하염없이 서울의 식당들을 떠돌며 매식으로 연명하게 됐다. 거의 ‘집밥’이라는 걸 못 먹고 살게 된 건데, 막상 끼니를 때울 때면 ‘밥집’으로 가게 된다는 게 얄궂었다. 국과 밥, 반찬을 주는 한식집 말이다.
처음 매식 생활을 시작한 스무살 때, 아마도 대부분 사람들은 제육볶음을 주로 먹지 않았을까 싶은데, 당시 나의 최애 메뉴는 비빔밥이었다. 제법 큰 그릇에 밥과 야채가 골고루 담기고 화룡정점으로 달걀 프라이도 하나 얹어주는, 완전 식품 같은 그 한그릇 음식이 난 정말 마음에 들었다. 다양한 맛을 좋아하고 영양소와 효율을 따지는 성격이었으니까. 교내 식당에서 식판 식사를 하지 않을 때는 늘 분식집에서 비빔밥을, 사치를 부리고 싶을 때는 돌솥비빔밥을 시켜 먹었다.
하지만 아무리 비빔밥이 다양한 맛을 볼 수 있는 요리라고 해도, 매일 먹다보면 질리는 날이 오기 마련이다. 그리고 매식에는 패턴이 생긴다. 부침도 있고 회귀도 없을 수 없다. 그래서 나도 된장국, 청국장, 김치찌개, 순두부, 오징어볶음 그리고 드디어 제육볶음까지도 섭렵하는 밥집 이용의 패턴을 거쳐왔다. 그리고 순환이 한 바퀴 돌고 나면 다시 되풀이되는 과정이 질리지도 않고 수십년 반복되었다. 요즘에는 순두부의 시기인 것 같고 말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꽤 오랫동안 비빔밥의 시기가 오지 않았다. 외식의 첫 정을 비빔밥으로 들였는데도, 스무살 시절 너무 물리도록 먹어서인지, 아니면 채소 값이 점점 비싸져만 가기 때문에 비빔밥이라는 메뉴 자체가 밥집들에서 점점 드물어지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정말 오랫동안 비빔밥을 거의 안 먹고 살았다.
다시 비빔밥을 먹게 되었던 건 의외로 미국에서 지내던 몇 개월 간이었다. 그때 갑자기 무슨 일인지 한식 세계화 정책이 추진되면서 내가 지내던 엘에이에 한국 대기업에서 운영하는 비빔밥 전문점이 몇 군데 생겼더랬다. 외식비 자체도 비싼 데다가 환율 부담에, 팁 부담에, 집에서 간단히 해먹을 때가 많았지만, 그러다 한식이 그리워지면 걸어서 10분 거리의 비빔밥 식당에 갔다.
한국보다 비싼 가격을 받는 만큼 음식의 질이 훌륭했고, 아무래도 한식 세계화의 지원금도 받았는지 가성비가 지나치게 높아서, 나 같은 한국인들만 신나게 드나들던 시절이었다. 지금이야 백인들이 줄을 선다지만 그땐 가끔 한국인만 보일 뿐 늘 텅 비어 있어서 곧 없어질까 불안했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후에는 역시나 비빔밥을 먹지 않게 됐는데, 대신에 예전에 같이 비빔밥을 먹은 추억이 있는 친구를 을지로에서 만난 적이 있다.
스무살 시절 그는 옆 동네에서 놀던 친구였다. 그가 놀던 동네는 내가 놀던 신촌보다 살짝 물가가 저렴했다. 처음 우리가 친구가 된 기념으로 내가 그를 신촌으로 초대했다. 밥집으로 갔는데, 그가 메뉴판을 보더니 깜짝 놀란 듯 소리를 쳤다. “헉! 비빔밥이 5천원이라고? 뭐가 이렇게 비싸?” 그의 동네는 비빔밥이 4천원이라며, 자기네 동네 밥집으로 옮기자고 했다. 나는 순간 창피해 얼굴이 붉어질 지경이었지만, 잘 다독여 밥을 시켜 먹었다.
그러고 나서 수십년 세월이 흐른 후, 내가 그의 직장이 있는 을지로를 방문해서 점심을 먹게 됐다. 그는 나를 대구탕집으로 데리고 갔는데, 메뉴판을 본 나는 나도 모르게 외치고 있었다. “헉, 뭔 대구탕이 2만5천원이나 해?” 순간 당황하는 그를 보고 있자니, 스무살 시절 비빔밥 먹던 순간이 수십년 만에 퍼뜩 떠올랐다. 나는 깔깔 웃으며 그에게 옛날에 네가 했던 말 기억 하냐고 물었고, 그는 “전혀 기억이 안 난다”며 정색했다. 자신이 그랬을 리 없다는 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