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는 계절마다 쌀이며 김치며 이것저것 농산물들을 올려 보내 주세요. 며느리가 무언가를 잘 먹는가 싶으면 어김없이 그걸 끼워 넣어주셨지요. 입도 짧고 많이 먹지 않아 버리는 게 많다고 누누이 말씀드리자 가짓수나 양이 좀 줄었지만, 어머니의 '조금'과 우리의 '조금'의 양은 확실히 달라서 여전히 냉장고 가득 쌀이며 김치가 찹니다.
결혼하고 얼마 안 되어서 올려 보내주신 꾸러미에 볶은 땅콩이 들어 있었어요. 서울에서야 구하기도 쉽고 딱히 볶은 땅콩을 즐겨하진 않았지만, 간식으로 오래도록 먹었지요. 먹을 게 많은 곳인지라, 볶은 땅콩을 귀히 여길 리가 없다 보니 생각날 때마다 가끔 꺼내먹곤 했어요.
저희 부모님은 뭘 그리 바리바리 챙겨주시는 분들이 아니에요. 제가 부담스러워하기도 하고요. 그런데 시골에 계신 어머니 마음은 하나라도 자식들에게 챙겨주는 분이세요. 처음엔 적응하기 어려웠어요. 시골에 내려가면 며느리들이 좋아할 법한 음식들을 고민해서 만드시거든요. 부작용도 있어요. 무언가 하나 좋아한다는 말에 그걸 한 가득해두시거나 갈 때마다 내오시거든요. 무례하게도 저는 입 짧은 여자라 넉넉히 먹고 오질 못해요. 다만 어머니의 맛깔난 김치만 열심히 먹다 오지요.
어느 날 부턴가는 어머니께서 '땅콩'도 같이 보냈다라고만 하셨어요. '볶은 땅콩'이 아니라 그냥 '땅콩'이요. 나는 볶은 것과 안 볶은 것에 대한 개념이 부족해서 볶아야 한다는 생각도 못했어요. 김치 냉장고 한 구석을 한 가득 차지하는 땅콩들을 바라보다 심심풀이로 냠냠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어느 날 볶아 보았답니다. 처음 볶는 땅콩이라 가장 센 불에 땅콩 껍데기에 엄청난 그을음이 남은 정도로 볶았어요. 양은 작은 반찬통 한 개 정도였는데, 반절 정도 남은 상태에서 주말에 온 남편에게 자랑하듯 보여주며 맛보게 했어요. 땅콩을 와그작와그작 씹어 먹던 남편이 물어보았어요.
- 여보, 이거 센 불이 급하게 볶았지?
- 응.. 그랬지.
- 안 익었는데? 적당한 불에 달달 볶아야지
아 그렇네요. 나는 설익은 땅콩을 반절 이상 먹었어요. 그리고 남은 것도 다시 볶기 귀찮아서 그냥 다 먹었어요.
그리고 두 번째 볶을 때는 중불에 한참을 달달 볶아서 다시 맛보았어요. 이번엔 익은 것과 안 익은 것들이 뒤섞여 맛이 복불복이더라고요. 다시 프라이팬에 부어서 볶아 보았지만, 좀처럼 골고루 익히기는 어렵웠어요.
겨울이 되니 또 쌀과 김치가 배달되어 왔어요. 어머니는 보내기 전에 늘 전화를 해주세요.
- 김치 좀 보내줄까?
- 네 보내주시면 감사하죠. 다만 조금만 보내주시면 정말 좋겠어요. (주말부부니) 저 혼자 먹느라 다 먹기 힘들거든요.
어머니는 알겠다는 말씀과 함께 김치 보관하는 방법에 대해 이런저런 설명을 해주시고 끊으셨어요. 며칠 뒤 도착한 김치과 쌀은 각각 배상자 하나만큼 되어서 김치냉장고에 꾹꾹 담아도 한 상자가 흘러넘칠 만큼 이었어요. 결국 일전에 보내주신 또 다른 한 무더기의 땅콩들을 갈 곳을 잃어 냉장고 한 구석으로 밀려났답니다. 냉장고가 아니라 뱃속에 보관하자는 생각으로 많은 양을 프라이팬에 덜어 볶을 준비를 했어요.
- 내 이번에는 땅콩을 잘 볶아내리라
라는 다짐을 하면서 중불에 달달 볶기 시작했습니다. 땅콩을 나무 뒤집개로 살살 문질러주며 이리저리 방향을 틀어줍니다. 살살 부드럽게 뒤집을 땐 강하게 (강스파이크 하면 프라이팬 밖으로 다 도망갈 테니, 마음만 강스파이크 하면서) 한번 스윽. 반복할수록 며느리를 위해 땅콩을 볶아 주셨을 그 손길이 생각나요. 처음 대강대강 볶아내면서 귀찮아 이죽거리며 했던 작업이, 정성을 들일수록 어머니가 생각나더라고요. '며늘아 아프지 마라. 네가 건강해야 가족이 건강하다.'라는 말씀을 자주 해주셨는데, 그 마음으로 그 정성으로 고르고 예쁘게 볶아서 보내주셨을 생각이 나요. 골고루 익도록 달달 볶으면서 내내 어머니 생각을 합니다.
어느 순간부터 땅콩 하면 어머니가 생각나고, '볶은 땅콩'을 생각하면 어머니의 마음에 대해 헤아리게 돼요.
남편하고 결혼할 때, 이렇게 좋은 남자를 잘 길러서 보내주신 게 너무 감사해서 귀염 짓을 많이 했는데, 아이들이 생기고 생활이 피곤해지니 너무 무덤덤해져 가는 나 자신이 너무 죄송스럽더라고요. 내가 초심을 잃고 변해가는 건지 아니면 원래 이런 성격이었는지 헷갈리지만, 스스로 자각할 수 있도록 어머니는 한결같으세요. 며느리 건강 챙겨주시고 사랑한다고 말씀해주시지요.
어머니를 생각하며 열심히 볶은 땅콩을 반찬통에 덜어 넣습니다. 엄청난 양을 볶은 기분인데, 중간 사이즈의 반찬통 하나에 다 담겨요. 이보다 두 세배는 많이 볶아 주셨는데, 어머니는 얼마나 오래도록 부엌 불에 붙어서 땅콩을 볶아 주셨을까요.
어머니는 자꾸만 마음 한편에 자리를 만드세요. 땅콩으로 김치로, 어느 날은 오징어채로 새우튀김으로 그렇게 가족이라는 자리를 차지해서 자꾸만 생각나게 하세요. 좋은 옷을 보아도 좋은 신발을 보아도 어머니 먼저 생각나게 하는 마법을 거셨나 봐요.
곧 다가올 어머니 생신 선물은 이미 준비해뒀는데, 아마 이걸 받으시면 똑같이 말씀하실 거예요. '이런 거 안 줘도 되는데, 고맙다 아가' 그러시면서 눈을 반달 모양으로 만들어 웃어주시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