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바다를 보고 왔다. 가을과 겨울의 경계가 섞이는 순간이라 그런지 사계가 내어주는 온도에 대한 느낌보다 짙은 밀도의 감정이 밀려왔다. 모든 것이 적당한 듯 새로웠다.
해가 영글어 떨어지기 전 잠시 머무는 시간, 바닷가 모래사장을 거닐었다. 한때는 치열하게 북적였을 바닷가는 영업시간이 끝난 식당처럼 한적하다 못해 적막하기까지 했다. 어디가 바다이고 하늘인지 모를 경계에서 바람이 불어온다. 나지막이 불어오는 바람은 포근하기도 하면서, 시원하기도 했다. 바람을 조금 머금어 봤다. 알 수 없는 짠 기운이 입에 맴돌았다.
파도는 발이 젖지 않을 만큼 밀려왔고, 쓸쓸하지 않을 만큼 쓸려갔다. 적당히 어두워지자 놀이터에 놀다 엄마의 부름에 끌려오는 아이처럼 배들이 하나 둘 들어왔다. 모든 것은 알맞은 시간에 적당히 놓여 있었고, 생각과 사유가 끊기지 않게끔 움직이고 있었다. 내가 원래 여기 있었던 것처럼 편안했다. 다시 이곳으로 와야 할 것처럼 익숙했다. 적당히 행복했고, 적당히 살만했다. 적당함이 주는 여유가 이렇게나 크게 다가오다니.
'그래 이런 것이 쉼이지, 이런 것이 상처가 아무는 순간이야.'
탁 트인 공간은 무한한 듯 느껴졌고, 그런 공간에서 시간의 흐름은 무의미했다. 시간이 멈춘 듯 느껴졌다. 얼마 거닐지 않았음에도 수없이 많은 위로와 공감이 오갔다. 그동안 풀지 못했던 감정의 매듭이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의무감 없는 하루에 나를 놓아 본다는 것은 이렇게나 행복한 일이다. 살며시 불어오는 바람에 마음에 난 상처 곳곳이 가려웠다. 샤워를 하다 보면 몰랐던 상처가 아려오듯, 의미 있는 여유는 상처 곳곳을 알려줬다. 어루만져 줬다. 내가 이렇게나 많이 아팠구나. 내가 이렇게나 치유해야 할 곳이 많았구나. 그간 챙기지 못했던 나 자신이 원망스럽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했다. 아프면 말하지, 지금껏 버텨준 것만으로도 고맙구나. 미련하기는
얼마나 걸었을까.
어느새 하늘은 붉음과 어둠을 한데 섞고 있었다. 여유와 사색에 잠겨서는, 노을이 지고 깜깜함이 오고 있다는 것조차도 잊고 있었다. 불어오는 바람에 맞서 잠시 눈을 감았다. 어둡기는 매 한 가지였지만, 어떤 경계점을 넘어가고 있음의 찰나를 느끼고 싶었다.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이 순간을 보내기 싫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항상 어딘가의 경계점을 넘으며 배워왔다.
치열함과 여유, 더움과 추움, 낮과 밤, 무름과 단단함 반대되는 것들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산물이야말로
나이의 테가 되고 삶의 태가 될 것이니.
나는 지금에서야 알았다.
쉼이라는 것은 다시금 있을
소비를 위한 보충이 아니라
다음 쉼을 위한 기다림이라는 것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