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면 보이는 것들
"아빠 나 일곱 살이야?
딸아이의 23년 첫날 첫마디다. 아침부터 우울한 낯빛으로 전신거울 앞에 섰다. 자기 몸을 요리조리 탐색중이다. 볼에 바람을 볼록하게 넣은채 오리 같은 입모양으로 거울을 보는 모습이 꽤나 인상적이다.
일곱 살 첫날부터 자신의 모습에 집착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짐작은 갔지만 묻고 싶지 않았다. '왜?'라고 묻는 순간 무의식에 잠식된 귀여움이 미운 7살로 변할게 분명했으니.
거울 앞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어제의 여섯 살과 오늘의 일곱 살은 변한 게 없다며 혼잣말로 쫑알 덴다. 앞니가 빠지지도 않았고 몸이 더 크지도 않았다며 좋아한다. 그제야 얼굴에 혈색이 돈다. 확신을 해야 안도가 온다는 사실을 아는 눈치다. 그런 모습을 멀리서 지켜봤다. 기특하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딸아이의 불안이 만져진다. 수를 세고 시간의 흐름을 아는 시기 여섯 살. 사계가 주는 변덕이 아직은 낯설게만 느껴질 나이다. 하루 만에 벌어진 1년의 터울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했다. 한달음에 나아간 나이가 주는 낯섦이 딸아이의 몸속에서 뒤척이며 몸부림 치고 있음을 짐작했다.
그간 세월에 속도를 달관하며 지내던 나를 본다. 나이를 먹을수록 심신의 변화를 익숙함으로 치부했던 나. 새해 첫날 정동진 해변가에 이마부터 들이미는 태양과, 집에서 시상식 보느라 늦잠 자는 가족들 사이를 비집고 드는 태양은 다르지 않다며 안심한다. 삶에도 가성비를 따지기 시작할 나이 마흔. '그 돈이면 온 가족 외식을 하지, 그럴 시간에 잠이나 자겠다'같은 저렴하지만 포만감 높은 위안이 나를 부여잡고 늘어졌다. 낭비를 줄여 잘 살기 위한 악착같음 보다는 새로움이라는 의욕을 자연의 순리로 덮어버리고 마는 귀찮음 같다.
내가 글을 쓰기 시작한 이유는 단순하다. 딸아이가 거울을 보며 염려와 안심을 번갈아 만지듯 나 또한 세월의 익숙함에 절여진 나를 꺼내 살펴보고 싶었던 것 같다. 나이의 속도가 세월의 속도가 되지 않도록, 자신를 위한 안도가 삶에 대한 안이함으로 천이되지 않도록, 조이고 기름칠하는 행위가 나에게는 글쓰기로 통했나 보다.
요즘은 글을 쓰면 쓸수록 나에게서 유체이탈하는 체험을 한다. 남의 잘됨을 배 아파하면서도 그의 운빨만 운운하며 나의 게으름에 안도하는 행위, 맛있게 먹으면 0칼로리란 말로 배불리 먹으며 나잇살만 탓하는 행위. 세월의 경험을 나의 눈과 귀를 가리기 위한 의도로 사용하는 것에 반기를 든다. 자신의 보호색이 남에게 살아남기가 아닌 자신의 잇속 챙기기에 급급했다는 사실을 기여이 알아냈다. 전지적 작가 시점이란 게 이런 걸 말하는 것일까? 아니면 퇴고의 까칠함이 삶에도 반영되는 것인가.
글은 나를 관전한다.
기특하면서도 불안한 모습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