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가에 물집이 잡힌다.
피곤하기만 하면 터지는 내 입. 어렸을 때부터 잠을 설치거나 몸이 안 좋다 싶으면 어김없이 터졌다. 그때마다 엄마는 입이 커지기 위한 거라며 나를 안심시켰다. 입이 커지면 좋은 점이 많다던 엄마의 말이 아직도 귓전을 맴돈다. 그 말이 사실이었다면 나는 지금쯤 아귀가 되었을 테지. 입가에 딱지가 훈장 같았던 시절도 있었다며 너스레를 떤다. 엉겨 붙은 물집에서 왠지 모를 불안감이 만져지는 건 왜일까?
어제도 며칠 전에도 평범한 하루의 연속이었다.
하루 세끼 챙겨 먹고, 일곱 시간 쟁여 잤음에도 터져버린 입. 속상했다. 매끈하게 관리된 삶 속에 생긴 상처라니. 생각할수록 힘만 빠졌다. 누명이라도 씌워 던져질 희생양이 절실했다. 그간 머릿속을 차지하던 욕망이 검열 대상이다. 남들처럼 살고 싶다던 막연함, 지금처럼만 살고 싶다던 안이함을 불러 차례로 캐물었다.
몸속 어딘가 아픔이 만져진다.
어떤 외력에서 느끼는 통점이 아니라, 변함없는 삶을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야 함에 대한 싫증의 멍울이다. 바뀌는 삶을 갈망하면서도 그런 삶을 살아가는 이에게 연민을 느끼는 나. 누군가에게 선택은 더 나은 삶을 위한 시도였다면, 나에게는 그대로 머무르면 좋았을 과거를 흠모하는 회한이다. 어른이 되자 선택지는 서로가 서로를 밀어내며 평행으로 나아갔다. 나와 다른 선택지를 선택한 누군가의 삶을 곁눈질하며 부단히 발을 굴렸다.
착함, 어리숙함, 순함, 순진함,
지금껏 나를 집요하게 따라다니던 단어다. 시작과 끝을 직선으로 긋는 말, 흐트러짐 없는 입력은 예측가능한 결과를 낳는다던 그 말은 삶의 기복에 오는 순환을 홀대했다. 한결같음이 꾸준함으로 앙갚음되는 줄 알았다. 나는 배려심이라는 가면 뒤에 숨어 삶을 부여잡고 늘어졌다. 나는 내가 만든 틀을 넘어서는 일이 없어야 했고, 세상 또한 나의 틀을 넘어서는 안되었다. 면면히 나를 깎아 세상의 입맛에 맞춰갔지만 삶의 모습은 매번 다르게 배신했다.
세상은 원래 돌고 돈다.
낮과 밤이 그러했고 사계가 그러했다. 나무의 나이테가 순환에서 빚어진 고난과 희열의 지층이라면, 얼굴에 팬 주름골이 딱 그렇다. 나이를 먹을수록 안다. 주름이란 안주함의 흔적이 아니라 변함의 굴레에서 떨어져 간 살점의 파임이라는 것을.
글을 써보니 이제는 알겠다.
삶이란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있음을 인정하고 마는 과정이라는 것을. 한때는 글 때문에 많이도 울었다. 논술에 치여 원하던 대학의 문턱에서 좌절했고, 자소서에 막혀 지원한 직장에 발도 디디지 못했다. 이번생은 서로 맞지 않다며 글과 벽을 쌓았던 나. 그런 내가 지금은 글로써 그 벽을 허물고 있다. 참으로 얄궂다.
입가에 난 상처 하나로도 글이 붙으면 삶을 논하고 다그칠 수 있는 회초리가 된다. 글감이 주는 깨우침이라기보다 기어이 쓰겠다는 의지 같다. 삶의 굴곡을 인지하고 인정하고 마는 악착같음에 글의 미덕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