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 공부

헤아릴 수 있는 만큼 보이는 세상

by 눈 비 그리고 바람

얼마 전부터 딸아이와 숫자공부를 한다.

딸아이는 열 손가락이 부족하지 않는 범위에서의 셈은 곧 잘했다. 손가락 10개를 주판 삼아 펼치면 덧셈이 되고 접으면 뺄셈이 되었다. 아무리 펴고 접어도 틀리는 법이 없다며 좋아한다. 해맑게 웃는 딸아이 모습에서 손가락을 초과하지 않는 세상을 본다. 나는 그런 순딩한 세상을 보면 마음이 보드라워진다. 한편으로는 짠하기도 하다. 지금은 말할 수 없는 진실값이라는 것도 있으니. 삶이라는 게 헤아릴 수 있는 만큼 좋아지기도 하지만 몸을 병들게도 한다는 사실에 괜히 미안했다. 나에게 만져지는 멍울의 존재를 본다.


딸아이가 쌓아 놓은 손가락 성채에 돌을 던졌다. 숫자 10을 초과하는 수. "8+6="이라는 문제를 낸 것이다. 딸아이는 책상 앞에 놓여있는 숫자를 본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저 손가락들. 앞으로 벌어진 일이 궁금해 숨쉬기조차 어렵다. 열 손가락 펴고 머뭇거리더니 숫자와 나를 번갈아 가며 쏘아본다. 나는 입을 다문채 딴청 피우듯 회피한다. 딸아이는 한참 동안 생각에 잠기더니 눈시울이 붉어진 채 울음을 터트리고 만다. 책상에 팔을 포개 머리를 파묻고는 흐느껴 운다. 숫자 앞에 좌절하는 딸아이가 안쓰러워 보이면서도 그런 귀여운 모습에 웃음이 났다. 혹시라도 이런 모습을 보면 비웃는 것 같겠다 싶어 반사적으로 숨을 삼켰다. 눈물과 딸꾹질이 번갈아 났다. 아빠의 짓궂음이란 만국 공통인가 싶다.


나는 열손가락 넘어서면 남은 숫자를 접으면서 헤아려 보라 했다.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딸과 그런 딸을 이해하지 못하는 나. 숫자가 자동으로 연산되는 자와 그런 자동을 인지하지 못하는 자 사이에 세계가 충돌한다. 서로가 서로를 이상하게 바라본다. 공대를 다닌 아빠의 입장에서 자존심 상했다. 숫자를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모르다니. 그렇다고 발가락까지 동원하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빨대를 가져와 손가락 세상을 돌파했다. 10을 초과하면 "십"이라는 말만 하고 뒤에 숫자를 다시 세면 된다 했다. 이해하는 듯하면서도 힘들어했다. 세계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는 것이다. 일의 자리와 십의자리에 일어나는 서로의 채무 관계에 좌절을 맛본다.


나라고 해서 다를까 싶다.

나를 관전하는 누군가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을지 모르겠다. 나 또한 세상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표정으로 살아왔으니 이상할 것도 없다. 자신이 헤아릴 수 있는 만큼만 보이는 세상. 배운 적도 없으면서 헤아려 보겠다는 의지가 나를 삶의 현장으로 내몰았다. 몸 움직여 열손가락으로 잡아보고 세어보려 했지만 역부족이다. 그런 세상이 야속하기만 하다.


글이라도 쓰면 나아질까 싶었다.

글이라는 빨대를 가져와 나열하며 세상을 헤아려 보려 했다. 시도는 좋았지만 행위의 반복에서 울상이 된다. 딸아이가 좌절하며 흐느끼는 감정이 조금 더 솔직할 뿐 나라고 해서 다를 게 없다. 그래도 부단히 쓰고 나아가는 나를 본다. 어쩌면 열손가락을 넘어서는 세상에 대해 "이해"라는 단어만 붙여 다시 읽으면 새로운 세상의 층위가 열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순간 마음이 환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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