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보통날의 대화

평소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보이는 순간

by 눈 비 그리고 바람

"그간 암투병 하느라 연락 못 드렸네요"

"췌장암 3기였고 지금은 수술까지 잘 마쳤습니다."


삶에 있어 가장 지독했을 암흑에 대한 고백이 이어진다. 인사치레로 건넨 가벼운 안부 한마디가 이렇게 묵직하게 돌아올 줄이야. 길 가다 차이는 돌처럼 무심하게 던지는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가슴에 굴러와 차곡차곡 쌓인다. 고통에 눌려 야윈 한 사람에게서 삶을 초월한 그를 본다.


그는 반도체를 공급하는 메이커의 기술지원 담당자다. 7년 전 시작된 그와의 인연은 만남부터 순탄치 못했다. 그가 제안한 제품에 문제점이 드러났고 그의 실수까지 더해졌다. 나는 며칠 동안 그 일에 매달렸다. 추스르고 주워 담으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그가 원망스러웠다. 전문성과 자존심이 높은 사람일수록 사소한 실수를 인정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데 그가 딱 그랬다. 남 탓으로 돌려 자신을 옹호하고 싶었겠지. 그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할 뿐, 내가 진짜 불편한 이유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말해주지 않았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그와 나는 톰과 제리처럼 투닥거리면서도 서로 의존할 수밖에 없는 관계에 익숙해져 갔다.


그러던 어느 날 그와 연락이 끊겼다. 다른 담당자로 바뀌는 모양새도 이상했다. 그래도 같이 일한 지 7년이 넘었고, 미운 정도 정이 맞다며 순해지던 찰나 일어난 일에 당황스러웠다. 말도 없이 떠나다니. 분명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며 그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려 했다. 그는 나를 무시로 일관했구나 라는 생각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혼자 좌절했다. 그는 다를 것이라 생각했는데. 조금씩 쌓아온 야트막한 믿음이 실망으로 굳어갔다. 돈으로 채워지는 관계의 불안이 또 한 번 나를 세상 밖으로 밀쳐낸다.


삶에 치여 허덕이며 살아가기를 1년. 수없이 쓸려온 악연과 쓸려간 인연에 '나'라는 존재가 헐렁해지던 찰나, 그에게 연락이 왔다. 잘 지내냐며 묻는 인사가 반갑다. 나는 덕분에 잘 지내지 못한다며 비아냥거렸다. 먼저 반가운 척하면 내가 지는 것 같다는 생각에 애써 모난 척했다. 악에 받친 감정도 시간이 지나면 빛이 바래기도 한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그는 웃지 않으면서도 웃으며 대답했다. 한번 만나고 싶다고, 오랜만에 꼭 봐야겠다고 말한다. 전화를 끊기 전 몰아쉬는 그의 한숨에 왠지 모를 슬픔이 느껴졌다.


며칠뒤, 그와 마주하는 순간 내 눈을 의심했다. 자주 입고 다니던 깔끔한 코트가 아빠옷을 입은 아이처럼 헐렁했고, 흰머리 하나 허용하지 않던 사람이 짧은 머리에 백발을 하고 나타난 것이다. 내가 놀라는 모습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그가 던진 말이 췌장암이었다. 그가 췌장암이라니, 생존율이 낮다던 그 췌장암 말이다.


나는 침묵했다. 무언가 말해야 했지만 말하면 공회전하는 위로가 될까 봐, 어설픈 위로가 가냘픈 그의 마음을 초라하게 만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말을 아꼈다. 목구멍을 밀고 나오는 말들을 꾸역꾸역 삼켰다. 모든 행동과 말에 검열이 필요했다. 경험하지 못한 길에 대한 호기심보다 경험한 자의 말에 귀 기울이며 고개 한번 더 끄덕이는 것이 지금의 최선이자 그에 대한 예우라 생각했다. 나는 그렇게 나를 눌러 그를 담았다.


그를 정면으로 볼 수 없었다. 겨우 용기 내 그를 본다. 나를 보는 눈빛은 여전히 형형하다. 대답을 갈구하는 저 눈빛. 누군가는 고꾸라져 울어버릴지도 모를 삶의 절벽 위에 그가 감내한 고통을 상상한다. 시시껄렁한 대화를 원하는 그의 태연함에서 고통에 마비된 그의 뒤척임을 느꼈다. 진정한 생의 감각을 맛보고 싶은 것이다. 그간 서로 맞추지 못했던 시간의 공백을 맞춰갔다. 그는 자신의 고통을 설명하려 들지 않았고, 인내의 시간을 동정으로 보답받고 싶어 하지 않았다. 보통날의 대화를 하고 싶은 한 사람에게서 보통날의 대화가 가장 어려웠음을 깨닫는다.


그간 쌓였던 화와 불신이 보드라움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목도한다. 아, 삶이라는 게 정말 별것 없구나. 한때는 절대로 변하지 않을 것 같았던 마음에 벽도, 모든 것을 다 담아낼 수 있는 바다가 되기도 한다는 것을 느꼈다. 나는 그날 집에 와서 글을 썼다. 그간 닫혔던 문을 열고 봤더니 새로운 감정을 발견했다가 아니라, 원래 있던 감정을 모르고 살았음을 후회하는 글을 썼다. 삶을 초월하는 존재 앞에 드러나는 진실의 표정을 본 자로써 무엇이라도 써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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