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에 힘 빼기

아는 만큼 간단하게

by 눈 비 그리고 바람

몇 달 전 쓴 글을 다시 읽었다.

그리 큰 세월이 지난 것도 아닌데, 무슨 말을 하려는지 잘 모르겠다. 몇 번이고 다시 읽었지만 같기는 매 한 가지. 당시 느낌만이라도 짐작하고 싶었지만 역부족이다. 추상적인 단어들로 구성된 문장은 어느 하나 구체적으로 자신 있게 서술한 내용이 없었다. 그저 벙벙하기만 했다. 뜬구름 딛고 지구 표면을 유영하는 인공위성처럼 논점을 벗어난 채 겉돌기만 했다.


제목은 '삶에 힘 붙이기'. 첫 줄부터 기이함에 몸서리칠만한 문장이 나를 반긴다. 다빈치 코드에 나올법한 암호문 같은 문장들이 아무런 거리낌 없이 널려 있다. 그중 한 꼭지만 소개하고자 한다.


나는 부유하는 삶이 싫었다. 그간 거리를 유지하며 떠밀려온 삶. 누군가의 거대한 서사 속에 한 점으로 살았다는 생각에 속상하다. 어둠 속에 뿜어 나오는 한 줄기 빛마저도 먼지의 몸부림일 뿐이다. 자세히 보면 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서로의 속내음이 엉켜있다는 사실. 숨이 턱 막힌다. 목에 먼지라도 걸린 듯 기침이 인다.


내 마음 옮긴 글인데, 마음 알 길이 없다. 기분이 묘했다. 나는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헐렁한 단어 뒤에 숨어버린 속마음도 야속한데, 글까지 부유하는 삶이 싫다니. 귀 끝에서 시작된 부끄러움이 정도를 넘어 체념으로 변해 갔다. 분명 글에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무언가를 느껴서 글로 썼겠지만, 그 무언가를 형용할 수 없다면 글도 될 수 없는 법. 내 머리를 휘젓고 다닐 만큼 당돌한 생각도 언제든 꺼내 만질 수 없다면 나에게는 이물일 뿐이다. 아기가 새로운 물건을 입에 가져가 깨물고 뜯고 빨며 그 존재를 감각하듯, 새로운 감정 또한 생각에 대어보고 말로 뱉어보며 검열하는 과정을 거치고 나서야 비로소 내 몸에 스미지 않을까. 대뜸 글부터 들이대니 좋은 글 나올 리 없다.


그냥 글 잘 쓰고 싶었다. 글의 본질이니 속성이니 하는 말은 모르겠고, 당장에 남들처럼 쓰고 싶었다. 다독과 다작의 원칙을 무시한 채 요행을 바라는 마음으로 썼다. 도둑고양이가 온전한 고등어를 생각하며 쓰레기봉투 뜯어대듯 나도 기름진 단어만 생각하며 타인의 글 이곳저곳을 뜯어댔다. 그리고 내 글에다 그대로 붙였다. 그때마다 글은 구체성을 잃어갔고, 생각은 무뎌졌다. 쓰다 막히면 애매한 단어로 대체했다. 추상적이거나 포괄적인 단어를 쓰면 쓰기도 쉽거니와, 좀 쓴다는 사람의 글처럼 글에도 귀티가 나는 듯했다. 글에 자신 없어도, 표현이 엉성해도 이런 단어 몇 개만 풀어 넣으면 라면수프를 넣은 듯 금방 감칠맛이 돌았다. 신기했다. 앞뒤 맞지 않는 생각도 고급진 단어 몇 개만 붙이면 된다며 거들먹거렸다.


이후 나는 쓰는 일에 근거 없는 자신감이 붙었다. 구체적인 생각을 쓰면서도 모호한 단어에 먼저 손이 갔다. 몸에 해롭지만 작은 양으로 맛을 보장하는 미원 같은 맛. 유기농으로 지은 글이니 MSG 조금은 상관없다며 내 글에다 양념을 쳐댔다. 아니 누가 양념이고 누가 주재료인지 조차 헷갈렸다. 그때까지 몰랐다. 내가 쓴 글이 다 비슷비슷하다는 사실을. 모호한 단어로 범벅된 글은 묵직한 맛은 있어도 무슨 맛인지 알 수는 없었다. 내 글 구석구석 느껴졌던 익숙한 감칠맛이 오히려 싸구려 같은 글을 양산하고 있음을 말해 주는 듯했다. 적당함을 잃어버린 글의 말로는 이토록 비참했다.


글 읽고 쓰고 지우며 번민하다 보니 담백한 글에 끌렸다. 바둑돌처럼 무심하게 툭 하고 던져진 단어가 순서대로 모여 촉발할 때의 감정, 그 소용돌이 속에 전복되는 나의 무지함을 느끼는 재미란. 당연한 말 같아 보여도 눈 아플 정도로 쨍한 글이 가지는 힘은 대단했다. 이도저도 아닌 어설픈 내 모습을 유성펜으로 꾹꾹 눌러 그어주는 기분이랄까? 주어와 술어의 호응이 간단할수록 문맥은 선명했고 뜻은 명확했다. 그 엄정한 사실 앞에 주눅 든 나를 본다.


나는 알았다. 겉꾸미고 가방끈 긴 사람이 내뱉을 말만 나열한다고 해서 그런 사람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시간이라는 비싼 학원비를 치르고 나서야 아는 눈치다. 그간 나는 많은 죄를 지었다. 글 거저먹으려던 죄. 그 죄를 면하려면 예전 글을 다시 꺼내 읽어야 했다. 읽으면 바로 몸에서 반응했다. 라면 한입 크게 먹다 매운 공기에 사레가 들린 사람처럼 식도부터 뜨겁고 간지러운 재채기가 올라왔다. 누가 보기 전에 재빨리 지워야 한다며 초조함에 몸서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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