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익부 빈익빈

글이 주는 풍요로움에 취하다.

by 눈 비 그리고 바람

부익부 빈익빈.

나는 이 말이 무척이나 싫다. 가진 자만 더 가질 수밖에 없는 세상을 비꼬는 말. 법이니 도덕이니 하면서 평등을 부르짖지만 보이지 않는 약육강식의 논리로 돌아가는 세상이 그저 야속하기만 하다. 나는 당연히 약자 중에 약자. 물질의 빈곤에 허덕이며 아무리 뛰어봐야 가진 자 한 걸음에 미치지 못한다며 투덜댄다. 없는 자로써의 길을 가야 한다는 생각에 괜한 심술이 났다. 물질의 빈곤이 마음의 왜소함으로 비칠까 싶어 조바심 났다.


예전에는 책만 보면 하품이 반사적으로 나왔다. 배 고프면 밥을 먹어야 한다거나 잠이 오면 잠을 자야 한다는 욕망의 단계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 어쩔 수 없이 읽어야 하는 날에는 글보다 볼멘소리가 더 자주 읽혔다. 책은 무거웠고 영상도 소리도 없었다. 심지어 그 흔한 그림마저도 없다. 그저 글만 그득했던 책. 이런 재미없는 걸 왜 보냐면서 책 보는 사람을 그저 남의 시선을 의식하려 한다거나 하릴없는 사람 쯔음으로 취급했다. 걸어만 다녀도 지도에 붉은 점으로 표시되는 세상인데 눈으로 글을 더듬어 읽어야 한다며 언어의 빈익빈을 부추겼다. 그때는 그랬다. 글에 대한 흥미도 없었고 아는 것도 없었다. 그러니 재미가 없을 수밖에. 배운 거라곤 문장 요약하기나 복선을 외워 문제 풀기에 접목하는 정도가 다였으니까.


요즘 나는 글이 주는 효능에 빠져 산다. 글을 읽는다고 해서 모두 내 것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쓴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돈을 물 쓰듯 쓸 수 없으니 글이라도 아낌없이 써보자는 심정으로 시작했다. 혼자 사각사각 쓰다 보니 저마다의 제목이 걸린 글들이 하나둘 쌓여갔다. 기준 없이 써 내려간 탓에 중구난방 같아 보여도 저마다 사연 없는 글은 없었다. 열손가락 깨물어도 안 아프던 글이 이제는 백손가락을 훌쩍 넘었다. 고물상과도 같은 내 글에서 조금이라도 쓸만한 구절이 있으면 현수막이라도 걸어줄 기세로 칭찬해 주는 이웃들도 생겨났다. 그동안 가난에 치여 바닥을 뒤적이던 자존감도 어느새 본전. 나아가 자신감도 붙었다. 그간 없는 것에만 집중하며 살아왔던 내가 한심했다.


글이 글을 부추기는 느낌에 젖어간다. 그간 한글을 몰라 읽는 것의 즐거움을 몰랐던 아이처럼 허겁지겁 내리는 글을 맞으며 서있다. 짧게 치고 가는 문장에 찍히는 마침표는 그 무엇도 될 수 있는 그림이 되어갔고, 행간 사이 여백에는 그 무엇도 살아 움직이는 판타지아가 되었다. 글과 조금씩 친해지며 만들어둔 사유의 반죽이 드디어 부푸는 순간을 목도한다. 서로 비벼지고 쪼개지며 발화하는 생각들이 덩어리째 내 머릿속을 흔들었다. 점점 알 수 없는 감정들이 쌓이자 부담스럽기까지 하다. 노랗다가 노르스름하다, 누렇다, 노리끼리하다, 노르죽죽하다와 같은 색상이 될 수 있듯 특정할 수 없지만 지칭할 수 있는 감각들의 향연을 만끽했다.


글을 읽다는 것은 쓰는 것과 다르지 않음을 느낀다. 글을 받으면 내가 가진 언어들과 생각들로 버무려 다시금 재구성해야 했으니까. 나다운 언어로 번역된 생생한 그 말을 머릿속에 두면 독서가 되었고 종이에 옮기면 글이 되었다. 내가 겪은 경험, 강열했던 감정, 묵혀두었던 추억까지. 작은 감정 하나만 튀어도 글 한편 쓸 수 있을 정도의 감각들이 차올랐다. 휴지에 떨어진 한 방울 먹물이 모든 곳을 검게 물들이듯 언어에 전염되는 나를 본다. 글과 웬수라던 사람이 글과 부대끼다 정들어 좋아하게 되고, 사랑하게 되는 드라마 같은 반전 이야기가 나에게도 펼쳐지는 것은 아닌지 내심 기대했다. 부익부가 이런 느낌이구나 싶다. 글이 주는 선순환에 마음이 보드랍다.


나는 글과 친하게 지내면서부터 여유가 부쩍 늘었다. 없는 것에 집중하기보다 있는 것에 감사하게 생각했고, 물질적인 빈곤보다 정신과 마음에 풍요를 중시했다. 그랬더니 좋은 일도 많이 생겼다. 회사 인사고과에 좋은 결과가 있었고, 좋은 집으로 이사도 하게 되었다. 더 좋은 사람들과 가까이할 수 있게 되었고 무엇보다 글을 마음 놓고 쓸 수 있는 책상과 방도 생겨났다.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지는 것인지는 두고 봐야 알겠지만, 분명 좋은 기운이 몰려오고 있음에는 부정할 수 없다.


부익부 빈익빈이라는 말은 어쩌면 모자란 것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가진 것에서 만족하는 일부터 시작하는 선순환의 축복을 지칭하는 언어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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