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기 모드

생각대로 이루어지는 곳

by 눈 비 그리고 바람

쓰다 말고 먼 산 본다.

이내 막혀버린 말문. 단어 하나 쓰겠다며 열 마디 넘게 검열해 봤지만 마땅히 놓일 단어가 없었다. 기억을 관장하는 해마에 문제라도 생긴 걸까? 아니면 뚫을 수 없는 쓰기의 재능에 이미 내 머리가 닿은 것일까. 쓰기는 매번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 나를 괴롭혔다. 그만하고 싶었다. 남들이 말하는 창작의 고통이 이런 거라면 나도 무릎 꿇고 싶었다.


그냥 잠이나 실컷 자야겠다. 글 쓰는 시간이면 생각 없이 자고 일어나고도 남을 텐데. 책상에서 일어나 침대로 향했다. 진심으로 쓰기 싫어 그만둔 것인데, 좀 전까지 번뇌하던 지점에서 적합한 단어가 쏟아졌다. 이 무슨 장난인가 하면서도 번뜩이는 단어가 없어질까 조바심 났다. 얼른 옮겨 적었다. 그때는 왜 이런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냐며 후회와 탄식이 번갈아 나왔다.


'분명 누군가의 장난일 거야.'

쓰겠다던 생각을 멈추고 비웠더니 새로운 생각으로 채워지는 기묘한 경험을 했다. 고인 물 빼내 깨끗한 물 채워진 기분이랄까. 무거웠던 머리가 가벼운 타자음에 다시금 맑아졌다. 참 아이러니 했다. 쓰자고 할 때는 죽자고 가로막더니, 말자고 할 때는 쓰라고 먹잇감을 던져주는 꼴이라니.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미끼의 달콤함을 포기할 수 없었다. 식도에 껍질째 막혀있던 고구마가 내려가는 감촉이 머리끝에서부터 느껴졌다. 그렇게 안 써지던 글을 단숨에 돌파했다.


얼마동안 썼을까. 경박하게 놀리던 손이 잠시간 멈추자 번개 같은 깨우침이 머리를 스쳤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어쩌면 내 글쓰기가 힘든 이유가 이것 때문인가 했다. 입꼬리가 심하게 흔들리며 묘한 감정을 받아내고 있었다. 좀 전까지 홀린 듯 글 받아내던 상태는 현실과는 거리가 멀었다. 과거나 미래의 목소리를 더 반영할 듯한 느낌이랄까. 세상과 맞닿은 곳부터 무뎌지며 감각을 잃어 갔다. 마취약에 눌린듯한 통점은 몸을 띄워 몽롱함으로 이끌었다. 몸은 점차 가벼워졌고, 주변은 온통 무채색으로 변해간다. 슬픔, 행복, 환희, 환멸, 아련함처럼 인생을 몇 마디로 재단하는 감정에만 원색과도 같은 색감이 입혀졌다. 비로소 드러난 쓰기의 세상에 내 마음도 순해진다. 이성보다 감성이 우선하는 이곳에서는 생각의 흐름 또한 자유로웠다. 띄어쓰기, 오타, 문법을 무시한 생각들이 무심하게 떠다녔다.


몽롱한 곳에서 한바탕 뒹굴었더니 글이 생각보다 쉽게 나왔다. 말하는 대로 글이 되는 세상 이곳저곳을 누비고 다녔다. 마치 꿈인 듯했다. 이곳이 꿈이라면 깨고 싶지 않았고, 생시라면 다시 이곳의 문을 열 수 있는 지점을 만들고 싶었다. 그동안 머리 뜯으며 괴로워했던 날들을 떠올렸다. 쓰기의 괴로움에 뒤척이고 있을 때 그 반대쪽 낙원에서는 마르지 않는 샘물이 퐁퐁 솟아나고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순간순간을 허투루 보낸 게 아니었다고 생각하니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허리에 고여있던 디스크의 통증이 아프다고 발광한다. 문득 내가 현실에 있음을 알고 내심 안도했다. 잠시동안 써내려 온 글을 봤다. 짧은 시간 같았는데 그 양을 보고 놀랐다. 이 정도 쓰려면 반나절 넘게 써야 하는 분량인데. 불과 30분도 안된 시간에 벌어진 사태에 어리둥절했다. 이어서 쓰고 싶어도 내 글이 아닌듯한 느낌에 어색할 뿐이다.


딸아이가 애타게 아빠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어쩐지 조용하다 했다며 얼른 남의 글 같은 내 글을 저장했다. 그리고는 가벼운 마음으로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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