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의 본질이란 무엇일까?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을 고이 접어 저장하고픈 글쓴이의 욕망? 아니면 그런 욕망을 대리 체험 하고 싶은 자의 갈망? 글이라 것은 자본주의 시장원리와 묘하게 맞닿아 있다. 수요와 공급이 균형을 이루며 작가와 독자의 위치가 정해진다. 작가는 독자가 좋아할 만한 글을 쓰고 독자는 좋아하는 글을 읽으며 그런 글을 양산하는 작가를 찾아다닌다.
나는 유시민 작가나 은유 작가의 책을 즐겨 본다. 유시민 작가의 글에는 해박한 지식과 필력이 어우러진 그 만의 정갈함이 있다. 특히 그의 여행 에세이나 역사서를 좋아하는데 그 분야가 좋다기보다는 텍스트와 콘텍스트, 주장과 근거, 사실과 주관의 비율이 적절하고 균형이 잘 잡혀있기 때문이다. 군더더기도 없어 버릴 것이 하나도 없다. 그의 글은 읽으면 읽을수록 단맛이 돈다. 은유 작가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사사로운 이야기를 쓴다. 하지만 그 끝은 결코 가볍지 않다. 시작은 하루에도 몇 번씩 느낄 수 있는 감정으로 시작해 그 결말은 원효대사가 해골물 마시고 나서의 깨우침 정도로 깊다. 짧게 치고 가는 문장은 담백하면서도 여운을 많이 남긴다. 평범함과 비범함을 넘나드는 모양새가 하도 부드러워 그 일상이 모두 진리 같아 보일정도다. 유시민 작가가 논리에 치우친 냉탕이라면 은유작가는 감정에 호소하는 온탕이다. 내가 목욕탕에 가면 냉탕과 온탕을 오가며 노는 것을 좋아하듯 글도 이와 비슷한 듯 보였다.
이렇듯 독서에 대한 나의 취향은 확고하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 책은 남극에서 에어컨을 판다 해도 살 의향이 있을 정도. 내가 좋아하는 글을 쓰는 사람은 다음에도 그다음에도 똑같이 좋아하는 글을 써냈으니까. 편식이 심해지면 영양에 불균형이 온다지만 독서에 있어 편식은 마음의 풍요로움을 가져다줬고 감정의 다채로움을 부추겼다. 좋아하는 작가가 생기면 거기에 맞게 독서 습관도 바뀐다. 읽었던 글 또 읽고 그 작가의 다른 글 또 읽는다. 어쩌면 그런 글을 쓰고 싶어 학습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유시민 작가와 은유 작가 사이 그 어디쯤의 온도로 글 쓰고 싶은 건 아닐까?
나도 글에 있어는 소비자 이기도 하지만 생산자 이기도 하다. 나는 어떤 글을 쓰는 사람일까? 나아가 글은 왜 써야 하며 어떤 독자를 염두에 두고 쓰는 것인지 궁금했다. 그 물음에 답을 쉽게 찾을 수 없었다. 그저 한심했다. 자신은 독서에 대해서 취향이 뚜렷하다며 글 편 가르기를 하고 작가를 편애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어떤 글을 쓰는지 모르고 있다니. 지난 글들을 돌이켜 봤다. 쓰기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지루하고 각다분한 글쓰기를 읽고자 하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자주 들러주고 응원해 주는 글벗들 말고 읽어주는 사람이 있을까? 만약 내가 기억을 잃은 상태에서 내 글과 마주한다면 어떤 느낌일지 상상해 봤다. '내가 쓰고 싶은 글인데' 하며 그 작가의 다음 글 찾기를 할 것인가 아니면 그냥 다른 글로 넘어갈 것인가.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겼다. 성적표를 펼쳐보는 순간처럼 심장이 쪼여왔다. 삼자의 입장에서 자신의 수준을 돌아본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아직도 나는 글을 왜 쓰는지 모르겠다. 막연하게 쓰는 건 아닌데 그렇다고 왜 쓰는지에 대해 똑 부러진 대답거리가 내 머릿속에는 없었다. 내가 글 쓰는 이유를 주변에다 말하지 않는 이유가 이 때문이기도 하다. 왜 쓰냐고 물으면 대답할 수 없었으니까. 그냥 재미로 쓴다고 하기에 죽기 살기로 쓴다며 내 글에서 여러 번 언급했다. 무엇도 말이 되지 않았다. 나 조차도 모르는 무언가가 있는 듯 보였다. 내 마음 밑으로 계속해서 내려가다 보면 심연에 가려진 본디 속내음이 보이겠지. 시퍼렇다 못해 새까만 그곳 아래에서는 자본주의에 굴복하기 싫으면서도 자본주의가 주는 돈의 달콤함을 갈망하며 킁킁 대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렸을 적 작가라는 자에게 경외심을 느꼈다. 그때 나는 재능이란 태어날 때 지닌 고유 능력치쯤으로 생각했다. 글 잘 쓴다는 것은 신이 준 선물 이어야지만 가능하고, 신의 영역까지 도달해야 잘 쓰는 줄 알았으니까. 나 같은 일반인은 아무리 뛰어도 닿을 수 없는 천장이 있을 거라 믿었다. 장래희망으로 과학자나 선생님은 가능해도 작가라는 직업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만큼 글에 대해 가닿을 수 없는 거리가 있었고 동경이 있었다.
지금 나는 그런 작가가 되어 글밥으로 먹고살지 않는다. 아니 못한다. 글 쓰는 삶이 얼마나 힘든 여정인지도 잘 알기에 글만 쓰며 살고 싶지도 않다. 단지 낮에는 회사원으로 살아가며 부당한 대우와 요청에도 따를 수밖에 없는 현실이 싫었다. 혼자 번뇌하고 푸념하면서도 그대로 당하고만 살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큰소리치거나 험담한다 해도 관계의 특성상 다시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기 마련. 나는 할 말은 꼭 하는 성격이라며 직언해 봤자 결국 실직자가 되리란 건 누구보다 잘 안다. 그냥 글 쓰면 현실과 멀어질 수 있었다. 너희들이 머라고 해본들 나는 집에 가서 글로다가 갈겨버리면 되니까. 오히려 쓰겠다는 의지에 땔감을 더해줘 고맙다 했다.
그간 나를 짓누르던 세상의 편애와 돈의 편향이 글 쓰기 세상에서는 더 이상 통하지 않는 눈치다. 민주주의와 평등을 부르짖으며 누릴 거 다 누리는 세상이 되었지만 보이지 않는 손은 여전히 나의 것을 앗아갔다. 글 쓰는 세상은 달랐다. 그곳에는 귀천이 없고 부와 빈이 존재하지 않았다. 학연지연 모두 내려놓고 글만으로 붙어보면 언젠가는 잘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흙수저가 금수저는 되지 못하더라도 글수저는 될 수 있을 거라며 혼자 좋아했다.
글이 나를 등단의 꽃길로 이끌어 베스트셀러를 밥먹듯이 출간하는 사람으로 만들지 못한다는 걸 안다. 보고서를 기깔나게 잘 써서 출세가도를 약속하는 삶으로 인도하지 않는다는 사실 또한 잘 알고 있다. 밀림처럼 깊숙한 숲에서 수도승처럼 글만 써 내려가던 나. 그곳에서 그간 나를 가리고 있던 나무와 바위를 치우자 진정한 글쓰기 이유와 마주한다.
'일하다 때려치면 너밖에 없다.'
인간의 존엄을 부르짖는다느니 글 쓰는 사람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느니 이런 식상한 대답보다. 차라리 이렇게 솔직한 게 낫지 않은가 싶다. 세속에 찌든 속물 같아 보여도 그 누군가에게는 그토록 찾아 헤메던 욕망일 수도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