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글 훔치기

by 눈 비 그리고 바람

나는 글을 훔친다.

읽다가 좋은 글이 있으면 메모장에다 몰래 옮겨 적었다. 작가의 동의 없이 가져가는 것이니 훔친다는 표현이 맞겠지. 나도 처음부터 훔칠 생각으로 읽는 것은 아니었다. 혼자 쓰고 지우고 몇 번이고 반복해 봤지만 나아지지 않는 건 마찬가지. 글도 배워야 쓸 수 있다는 생각으로 남의 글을 모셔왔다.


타인의 글을 가져오면서 양심인지 자존심인지 모를 방어기제가 작동했다. 지금은 내가 훔쳐갈 수밖에 없는 처지지만 언젠가는 내가 더 잘 쓰게 될 거라고. 그때가 되면 너도 가져가라며 자기 합리화가 한창이다. 당시 나의 쓰기 생활은 장발장처럼 간절했고 처절했다. 배고프니 살기 위해 훔치는 것처럼, 쓰기 위해서라면 훔쳐서라도 밑전을 마련해야 했다.


처음에는 단어만 골라 담았다. 익히 그 뜻은 알지만 쓰임이 새로운 단어만 골랐다. 그래야 죄책감이 덜했으니까. 어서 내 글에다 끼워 넣고 싶었다. 이런 품위 있는 단어들로 가득 차게 될 내 글을 상상하자 입꼬리가 저절로 위로 말렸다.


막상 가져와도 내 글로 쓰지 못했다. 분명 내가 알던 단어인데 왜 이럴까 싶었다. 온전히 남의 글 속에 있던 그 단어는 너무 튀지도 너무 평이하지도 않았다. 그 둘 사이를 오가며 묘한 규칙 속에 작가의 욕망을 표현하고 있었다. 같은 단어인데도 내 글에는 왜 이렇게 튀거나 평이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조금 우습기도 하다. 그때는 아는 게 없었으니까. 의아함에 뒤통수를 맞는 게 당연했다. 지금은 퇴고를 하면 이유정도는 알아차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생각한다.


글이라는 게 단어만 나열한다고 해서 특정한 맛이 우러나지 않는다. 서로 어울리는 단어가 있고 궁합이 있고, 느낌도 있으며, 운율도 있다. 서로 감응하고 감흥해야 감칠맛이 도는 원리를 그때는 몰랐던 것이다. 그때 맛봤던 좌절감이 아직도 생생하다. 범인은 반드시 범행장소에 다시 나타난다 누가 했나. 내가 딱 그 상황이었다. 나는 입맛을 다시며 그 글을 다시 찾았다. 제대로 훔치지 못한 것이 있을 거라며 두리번거렸다. 일단 모르겠고 문장을 통째로 훔쳤다. 혹시 또 오게 되면 납작해진 자존심에 깔려 익사할 것 같다며 앞뒤 문장도 같이 가져왔다. 그 메모장에 쓸어 담아 온 글을 다시 읽었다. 뜻은 간결하나 품고 있는 의미가 예사롭지 않다. 아직 그 온기가 남아 있었다. '나는 왜 이런 글을 쓰지 못하나?라는 생각에 멱살 잡히는 느낌마저 들었다.


나는 그때부터 메모장에 갇혀있는 글을 괴롭혔다. 문장을 분해해서 그 성분을 나열했다. 주어 목적어 동사로 떼어 보기도 하고 어미와 조사 단위로 나눠 보기도 했다. 감칠맛의 근원이 어디인지 낱낱이 찾았지만 뚜렷한 이유를 찾지 못했다. 두 번째 좌절이었다. 이과생이라 문과생의 영역을 이해하지 못하는 거라며 혼자 번뇌했다. 그만둘 거면 그때 그만두었어야 했다. 지금은 다시 돌아갈 수도 없는 상황까지 와버렸다. 막대한 효능과 겪은 적 없던 통점을 함께 지닌 글은 그야말로 애증의 대명사였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두 번의 좌절을 맛보면서도 포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글에는 왕도가 없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속는 셈 치고 해 보자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꾸준함에 결국 재능도 따라올 것이라며 읽고 훔치고 쓰기를 반복했다. 시간이 지나도 좀처럼 글은 나아지지 않았다. 훔쳐온 글은 쉽게 잘 쓰는 비법을 내어주지 않았다. 비슷한 생각을 이렇게도 표현할 수 있구나 하며 가져온 글인데, 묘하게 나의 글과 어긋났다. 부분만 보면 팔이고 다리고 몸이었는데 전체를 보면 사지가 반대로 접합된 인형 같았다. 결국 또 글쓰기 재능을 운운하며 세 번째 절망에 빠졌다.


다시 내 글을 봤다. 단문으로 쓴 글은 초등학생이 쓴 글 같았다. 절정으로 치닫자 시의 어느 한 구절 같은 문장이 나오더니 결말은 칼럼처럼 차가운 문장으로 끝이 났다. 이거는 도저히 용납할 수 있는 수준의 글이 아니었다. 훔친 것에 대한 대가를 톡톡히 치르는 듯했다. 그날 나는 다음글을 쓸 때까지 그 기묘한 문장을 반복적으로 읽고 고치며 기가 막힌 문장으로 고쳐야 하는 무기징역에 쳐해 졌다.


훔친 글을 쓴 작가의 다른 글을 읽었다. 도끼눈 뜨고 읽어도 글에 녹아든 감정은 고요했고 그 뜻은 고유했다. 은은하게 풍기는 감정을 매만지며 무한정 펼쳐진 글의 바다를 넋을 놓고 바라봤다. 나도 언제쯤 이런 글을 평이하게 내려놓을 수 있을지 궁금했다. 그는 무슨 글을 쓰더라도 비슷한 글을 양산해 냈다. 그런 그도 어쩌면 다른 이의 글 몇 구절쯤은 훔쳤을지도. 그렇다고 남의 글 대부분을 훔쳐 이렇게 자연스레 쓰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워 보였다. 오히려 자기가 쓰는 것보다 더 어렵겠다 싶었다. 그는 원래 이 정도의 글을 쓰는 사람으로 결론 내렸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품은 그가 부러웠다.


그때부터 나는 메모장에다 훔친 글을 옮겨 적고는 마음속에 차곡차곡 눌러 담았다. 응어리 같은 말을 꾹꾹 담다 보면 그 압력에 못 이겨 결국에는 황금알이 되겠지 했다. 정 안되면 그냥 알이라도 하는 심정으로 빌었다. 내 메모장은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이의 목소리로 가득 찼다. 책으로 옮긴다면 4~5권 남짓 될 법한 분량. 메모라기보다 나의 글쓰기를 위한 백과사전 같았다. 나는 메모 속 숨겨둔 글을 보며 혼자 미소 지었다. 언젠가는 내 피가 되고 살이 될 거라며 금고에 금괴를 쌓아둔 사람처럼 비밀 가득한 미소를 품고 다녔다.


얼마쯤 시간이 지났을까. 몸속 깊은 곳부터 뭐든 써야겠다는 욕구가 솟구쳤다. 몸 밖에서 일어난 부당함과 화를 잔뜩 삼켜낸 분노가 내면의 목소리를 건드린 듯했다. 압력밥솥의 압력이 차면 추가 돌듯, 내 머릿속은 오만가지 생각들로 가득 차 글을 뱉었다. 그제야 기묘하기만 하던 내 문장이 조금씩 말이 되어 갔다. 훔친 글 그대로가 아닌 나다운 언어로 순화되고 정제된 모습으로 말이다. 메모 속 누워있던 글이 메모장을 관통해 내 글에도 조금씩 스며들기 시작했다. 얼핏 보면 봤던 글 같아 보여도 읽어보면 다른 글이었다. 내 마음속 퇴적 풍화 작용을 견디더니 이제야 나를 주어로 인정하는 듯한 눈치다. 메모장 속에 글과 생각이 나와 맞지 않았던 이유는 내가 입을 수 있는 크기의 글이 아니었기 때문 아닐까? 단지 글의 기교만 쫓아 좋고 나쁨을 따졌던 내가 부끄러웠다.


그동안 남의 것만 가져와 붙이면 된다는 생각은 산산이 부서졌다. 현실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불현듯 복권에 당첨된 벼락부자가 된다 하더라도 행복행 티켓을 거머쥘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한다. 그 돈을 다룰 수 있는 깜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맞지 않는 옷을 걸친 자에 말로는 처절했다. 글도 마찬가지 같다. 좋은 글을 베끼든 창작하든 중요치 않다. 그 정도의 글을 다룰 수 있는 인내와 경험이 부족하다면 결국 자괴감에 매몰된 채 못난 글만 끄적일 뿐이니까.


한 번씩 이런 상상도 한다. 언젠가는 내 못난 글도 그 누군가의 메모장에 갇혀 고문당할 그런 날이 올 거라고. 막연할 것만 같던 그때가 어쩌면 그리 멀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상상만으로도 쓰고 싶다는 열망에 몸서리친다. 오늘도 나는 이렇게 글을 쓴다. 창작과 모방을 저울질하며 언제인지도 모를 과거에 담가놓은 글을 백지에 옮겨 담는다. 세월과 고통에 치여 원래의 모습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눅눅한 글이지만, 그 느낌 그대로 남아있다.

keyword
이전 01화00. 프롤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