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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 비 그리고 바람 Mar 17. 2022

하마터면 퇴사할 뻔했다.

 얼마 전 회사 성과 평가 결과가 나왔다. 작년 한 해 특별히 고생한 만큼 결과도 특별했으면 싶었지만 그렇지 못했다. 순간적으로 오만가지 생각들이 다 스쳐 지나갔다. 배신감, 분노, 편애, 고생, 부끄러움, 상실감, 일태기, 퇴사 등등 형체를 알 수도 없고 대상도 없는 느낌들이 무수히 많이 거쳐갔다. 주변을 둘러봤다. 다들 모니터만 의식한 채 간간히 들리는 마우스 클릭 소리만이 시간이 멈추지 않았음을 알려줄 뿐이었다.


그 누군가는 나보다 더 열심히 해서 그에 합당한 보상을 받았을 것인데, 나는 알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여서는 보이는 사람마다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봤다.

“저 팀원의 성과는 내 성과에 비하면 상대도 안될 건데,,, A를 받았을 리 없어” 이러면서 말이다.  

무슨 이유에선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의욕도 없었고 알 수 없는 공허함만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계속해서 누가 나의 성과를 훔쳐갔다는 생각을 떨 칠 수가 없었다. 정말이지 별에 별 생각을 다 한 것 같다. 앞서 퇴사한 직장 동료를 만나 회사 욕이나 실컷 하고 싶은 생각뿐이었고, 이런 억울함을 풀어주는 무당이 있다면 굿판이라도 열고 싶은 심정이었다. 퇴사라는 단어가 현실이 되나 싶었다.


마음을 겨우 다잡고 집에 도착했다. 기분이 태도가 되기 싫어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해봤다. 와이프도 애도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한 듯 보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를 위해 눈치가 없는 척했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아무리 기분을 태도로 분출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말없이 멍 때렸던 모습에 부끄러워 얼굴이 붉어졌다.


시실 작년 이맘때쯤에는 난 A를 받았었다. 생각지도 못한 칭찬에 몸 둘 바를 몰랐다. 때는 앞으로 더 잘하라는 의미로 생각했던 것이 실수였던 것 같다. 이 후 나는 주말까지 포기하며 업무에 매진하는 모습에 나 스스로가 자랑스럽기도 했고, 이렇게 하면 또 A를 받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와 확신이 나를 벼랑 끝 워커홀릭의 세상으로 밀어 넣었다.

"이러다 올해도 또 A를 받는 건 아냐? 아냐 아냐,,, 2번 연속은 힘들 것 같아" 라는 기대와 부담감이 번갈아 나타나며 나를 옥죄어 왔던 것 같다.


보상이라는 것은 과거 잘한 것에 대한 상이지만 지나간 과거에 대한 보답으로만 국한되지 않는 특성이 있다. 과거에 잘 해왔던 것에 대해서 앞으로도 잘할 것이라는 직진 본능을 일깨워 주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런 직진 본능은 또 다른 상으로 연명할 수 있지만, 그전 보다 못한 결과가 나왔을 때는 쉽게 부러 질 수도 있다. 나무가 한결같이 위로만 곧게 자란다면 어떻게 될까? 언젠가는 벼락에 맞거나, 바람에 부러지거나 휘어 질 수도 있다는 것을 왜 생각하지 못했던 것일까?




시간이 지나자 거친 파도가 한바탕 휩쓸고 지나감을 느낄 수 있었다. 파도에 묻혀있던 바위같이 단단한 마음이 두각을 나타냈다. 갑자기 평온함을 느낄 수 있었다. 순간 다시금 뇌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는데 엄청난 희열감을 가져왔다.


A를 받으면 받은 대로 기분이 좋지만 앞으로도 잘해야 한다는 생각에 부담감은 배가 된다. 부담감이 배가 되면 일이 자신을 갉아먹는지도 모른 채 상의 노예가 되어 움직이는 자신과 마주하게 될 뿐이다. 하지만 B를 받는다고 해서 실망할 이유도 없다. 지금껏 잘해 줬으니 기대감을 내려놓고 부담 없이 좀 쉬는 것은 어떤지 위로를 건넨다고 생각하면 되는 것이다. 사실 틀린 말은 아닌 듯하다. 기분도 좋아졌고 머리에서 맴돌던 근심, 걱정과 같은 세포들이 발가락 아래로 내려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는 제주도행 비행기표를 끊었다. 작년 한 해 동안 일 때문에 2번이나 취소했던 그 제주도 티켓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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