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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작가

by 눈 비 그리고 바람

나는 작가다.

그래 나는 작가지, 기필코 작가가 될 거야. 이미 나는 브런치에서 작가로 불린다. 작가란 말 그대로 글 쓰는 사람을 말하는데, 실제 내가 그런 사람이라고 말하면 왠지 모르게 과분한 것 같고, 교양 부족이 탈로 날까 부끄럽고 그랬다. 아직 깜냥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사람을 만나도 운동을 해도 술을 마셔도 마음속 허기는 채워지지 않았다. 코로나를 원망하고 뜻대로 풀리지 않는 내 인생을 탓해봤지만 소용없기는 마찬가지. 허기를 다른 무언가로 채울수록 자신의 불안은 학습된 무능으로 다가왔다. 결국 자존감과 자신감은 가장 낮은 곳으로 처박히고 말았다. 해결점을 엉뚱한 곳에서 찾았기 때문인 듯했다. 주어를 잘못 넣었던 거다. 다른 누군가가 아닌 자기 자신이 주어가 되어야 했는데. 이 단순한 사실을 알기까지 불안과 우울에 젖은 채 3년여의 세월이 흘렀다.


요즘은 ‘작가’라는 본분을 내려놓는 편이다. 꼭 작가라서 써야 하고, 심금을 울리거나 섬세한 글을 써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의무보다는 그저 자연스러움에 몸을 맡기려 한다. 한없이 고요한 호수 위를 낭낭 떠다니던 낙엽도 언젠가는 땅에 닿듯, 의무에 가려진 욕망보다 쓰고 싶음에 몸을 맡긴다. 매일 1500자를 고집하던 삼시세끼 같은 욕망도 이제는 그 의미가 희미하다. 때가 되면 밥을 먹기보다 배고프면 밥을 먹는 것, 글을 쓰고 싶을 때 쓰는 사람으로 바뀌었다. 최대한 오래 그리고 자연스럽게 쓰고 싶다면 그렇게 써야 했다.


의식이란 어찌 보면 잘할 수 있음을 방해하는 반발력 같다. ‘잘한다’는 감각은 의식만으로 채울 수 없다. 운전할 때, 핸들과 페달의 감각을 의식으로 하지 않는다. 초보운전자가 운전이 미숙한 이유는 핸들 감는 횟수를 생각하고 브레이크와 액셀을 의식으로 밟으려 하니 어색한 것이다. 시선과 발의 감각, 핸들이 감기는 방향과 몸의 쏠림을 무의식에서 판단해야 매끄러운 운전이 되는 것처럼.


무념무상으로 하라는 말은 아니다. 무의식에 반응할 수 있기 위해서는 의식과 노력의 무수한 반복이 필요했다. 나 스스로는 실무자가 아니라 중간 관리자가 되겠다는 느낌으로. 적당한 수준에 채찍과 당근을 가지고 의식과 무의식 사이를 오가야 했다. 의식에 가까우면 슬럼프가 반응했고, 무의식에 가까우면 허무맹랑한 상상 속에 나르시시즘이 발동했다.


글도 다르지 않았다. ‘나는 작가다’라는 말은 좋은 동기부여를 당겼지만 의식은 지나치리 만큼 자주 또는 많이 작용했다. 작가라면 누구보다 예민한 시각으로 섬세한 감각을 활자에 담아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다. 모두에게 좋은 글을 양산해야 한다는 심정으로 썼다. 활자가 꼬이고 주제와 생각이 따로 놀 수밖에 없는 이유다. 어떻게든 힘을 빼야 했다. 필요한 곳에만 약간의 의식을 넣고 나머지는 모두 보이지 않는 흐름에 활자를 놓았다.


글은 그저 글이다. 누군가 말하듯 글을 쓰라 권하지만 나에게는 맞지 않았다. 말하듯 쓸 거면 차라리 말로 하는 것이 편했다. 성대를 진동하던 감각으로 글을 쓰고 싶지 않다.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고, 나만 그런 것 같고, 나만 소심한 것처럼 보일 것 같은 속 좁은 이야기를 나다운 언어로 풀어내는 것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는 누군가의 진선완미한 성공담이 아니다. 책을 내는 이들, 소위 작가들의 삶을 정통으로 통과한 이후의 미완의 이야기들이 더 좋았다. 갓 볶은 커피 특유의 쌉싸름한 맛처럼 사는 맛에도 감칠맛이 더 도는 것 같았으니까.


완벽함이란 어쩌면 의식이 생각하는 종착역이지, 계속할만함의 이유는 될 수 없었다. 논어에 보면 이런 말이 있다. ‘알기만 하는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만 못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보다 못하다’ 지금은 시간이 많이 흘러 의미가 조금 변색되기는 했다. 즐기는 사람 위에 부리는 사람이 있다던가, AI가 있다던지 할 것이다. 그렇지만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계속하기 위해서는 즐겨야 했다. 즐기는 사람은 자신이 왜 잘하는지 어떻게 계속하는지 영문조차 모른다.


스스로가 쓰고 있다는 생각조차 내려놓아야 했다. 지금도 나는 내가 글을 왜 써야 하는지 모른 채 그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화면 속에 붙여 넣는다. 써야 하기 때문이 아니라 쓰고픔에 대한 허기를 채울 요량으로.


그래서 나는 나를 아직도 작가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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