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 비가 온단다. 그것도 아주 많이.
대구는 전국적인 장대비 소식마저도 허무하게 비껴가는 경우가 많았다. 내륙인 데다 주변이 대부분 산지라서 비에 더 인색한 듯했다. 비라도 내려준다면 데프리카 기온이 조금 누그러지려나. 왠지 이번 비소식에는 정말로 비가 왔으면 했다. 근래 평일은 덥다가 주말만 되면 비가 왔었는데, 어떻게든 비를 맞을 수 있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평소와 다른 모습에 의아했지만 어찌 됐건 비를 원하는 사실에 변함은 없었다.
며칠 전 꿈을 꾸었다. 뱀에게 물리는 꿈이었는데, 지금까지 겪었던 꿈이랑은 조금 달랐다. 유년 시절을 보냈던 5층짜리 작은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그날 꿈은 꿈인 줄 알았지만 계속 그때 살았던 아이처럼 기시감이 강하게 들었다. 놀이터 근처에서 뱀을 만났다. 보통은 내가 피하거나 도망가다 넘어지면 깨곤 했었는데, 그날은 어쩐지 깨지도 않고 끝까지 쫓아왔다. 내가 더 이상 도망갈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뱀을 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나도 모르게 손을 뻗쳤다. 그리고는 뱀의 뒷덜미를 잡았다. 티브이에서는 이렇게 뱀을 쉽게 잡는다면서 애써 들어 보이며 통쾌해했다. 갑자기 뱀이 미끄러지듯 몸을 비틀더니 나와 눈이 마주쳤다. 순간 엄지와 검지사이 손등을 콱 물었다. 따끔한 통증에 놀라 멀리 던졌지만 뱀은 다시 와서 다리나 허리춤을 물었다. 한 10번 정도 더 비슷한 일을 겪으며 고통스러워했다.
작은 충격에도 깼어야 했다. 10번이고 다시 뱀이 달려오는데도 깨지 않았던 이유가 무엇일까? 꿈과 현실을 관장하는 누군가가 화장실이라도 갔던 걸까. 이유도 없이 계속 물어야 하는 뱀도, 영문도 모른 채 물려야 했던 나도 하루가 시작하기도 전에 소진될 수밖에 없었다. 그날 꿈을 깨고도 한참 동안 넋을 놓고 천장만 바라봤다. 보통에 꿈은 선명함 보다는 흐릿한 그 무엇으로 정의하고, 툭툭 털고 일어나야 하는데 그날따라 왜 이렇게 선명한 것일까. 무슨 메시지라도 주고 싶었던 걸까? 마음속 깊은 곳 묻혀있던 자아가 무언의 신호를 보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날 저녁에 퇴근 후 티브이를 보는데 비소식이 있었다. 전국적으로 장대 같은 비가 내린다고. 문득 오늘 아침 꿈속 추격전을 떠올렸다. 꿈이라기보다는 생시에 가까웠고, 추격전이라 보기에 메시지가 더 강했다. 티브이를 보다 말고 바로 숙소를 예약했다. 호우주의보가 예정되어 있던 경남 거창 어느 깊은 산속 오두막집으로. 알 수 없는 무의식의 질문에 답을 찾겠다는 심정으로, 어떻게든 비를 맞겠다는 비장함으로 예약 버튼을 꾹 눌렀다.
드디어 토요일 아침. 역시 전국적인 비소식에도 대구에 아침은 해가 구름을 걷고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숙소를 예약하길 잘했다며 쾌창한 날씨에 콧방귀 뀌며 혼자 중얼였다. 그날 대구를 벗어나자 앞 유리창에 빗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조금 무서울 정도로 떨어지자, 슬쩍 겁이 나기 시작했다. 호기롭게 또는 조금 경솔하게 시작된 여정이 험난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서다. 결국 '집 나가면 개고생'과 같은 과거 경험담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가족의 걱정스러운 눈빛을 뒤로한 채 상기된 표정으로 운전을 계속했다.
거창의 비 소식은 대구와는 결이 달랐다. 산속이라 그럴 수 있었지만 비가 내린다기보다는 땅을 때린다는 표현이 더 적합했다. 평소 알던 빗소리보다는 더 촘촘했고 크게 들렸다. 숲 속 먼 곳을 응시했다. 아스팔트와 잿빛의 건물들이 즐비한 곳을 비집고 내리는 소리와는 많이 달랐다. 숲을 향해 비가 내리는 소리는 소리만의 향연이 아니었다. 눅눅하지 않으면서도 풀냄새를 극도로 머금은 공기를 취할 수 있는 상태, 구름인지 안개인지 모를 희끄무레한 존재속에 이파리를 치며 떨어지는 빗소리를 듣는 기분이란. 나를 또 다른 꿈속 세상으로 인도하기 충분했다.
그날 저녁 오두막 처마밑에 앉아 고기를 구웠다. 깊은 산속임에도 낮이 길어서인지 땅거미가 쉽게 내려앉지 못했다. 능글맞게 산등성이를 넘어가는 구름을 보며, 빗소리와 숲이 만들어내는 푸가를 들었다. 삼겹살이 그리들을 타고 지글거리는 소리마저 자연이 만들어낸 화음에 어울릴 수 있었다. 스스로가 너무 하찮게 느껴졌다. 마음이 느슨해지고 그간 나를 옥죄었던 의무가 녹아내려 바닥으로 땅으로 들러붙는 느낌이 들었다. 그간 내가 살아온 과거가 허투루 살지 않았지만, 조금은 쉬어도 괜찮다는 말로 들리는 듯했다.
그날 겪었던 꿈을 다시금 떠올랐다. 무척이나 붉었던 뱀의 눈빛을 기억한다. 정말 나를 이곳으로 들여놓기 위한 책략이라면 성공했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이런 생각을 하자 그 뱀은 어쩌면 나쁜 막연한 무엇이기보다 조금 과격한 전달자가 아니었을까? 순간 알 수 없는 희열이 피어났고, 얼굴에도 미소를 흠뻑 머금었다. 한참 동안 밖을 응시하며 어떤 생각에 빠져 있었다.
뱀이 쏘아 올린 작은 독니가, 지금에 순간을 이끌었다고 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그로 인해 여기 올 법도 했음에는 반문할 수 없었다. 몇 번이고 과거를 되새기며 현실의 느슨함을 오갔지만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끊임없이 떨어지는 빗물은 때로는 혼자, 때로는 서로 합쳐지며 땅속으로 스며들기 바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