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식당에 갔다.
오랜만에 하는 외식인 데다, 집 앞에 새로 생긴 유명한 소바집이라 더 설레기도 했다. 진달래도 져버린 5월의 끝자락, 종잡을 수 없는 날씨의 변덕 때문인지 식당에는 명성만큼이나 사람들로 붐비지 않았다.
어느 테이블에는 4명이 앉아 있었는데 가족인 듯했다. 초등학교 고학년과 저학년 즈음으로 보이는 남자아이 둘과 그 앞에 무심히 앉은 엄마와 아빠. 하나같이 고개를 내린 채 무언가에 몰두하고 있었다. 과묵한 가족이구나 하며 자리에 털썩 앉았다.
그날 딸아이는 나와 와이프 보다 곱절은 더 말이 많았다. 보통 주어는 자기로 시작해서, 엄마와 아빠를 돌고 다시 자기가 최고인 것으로 결론을 냈다. 아이에게는 자신감과 자존감이 높아질지는 몰라도 부모입장에서는 한없이 초라해지는 화법이기도 했다. 그렇게 떠드는 사이 좀 전에 보았던 과묵한 테이블에 눈이 갔다. 대화가 전혀 없었다. 그러고 보니 스마트폰을 만지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이들은 가로로 들고 하면을 쿡쿡 누르는 중이고, 엄마와 아빠는 팔꿈치를 테이블에 대고 엄지로 스마트폰 화면만 하염없이 올려대고 있었다. 보아하니 아이들은 게임을, 부모는 SNS를 하고 있는 듯했다.
요즘 들어 자주 목격하는 장면이다. 스마트폰이 지구상 인간들의 대화를 앗아가려는 음모라도 꾸미는 걸까. 같이 있으면서도 단톡방으로 이야기를 주고받는 아이들을 보거나, 음식 앞에서 눈과 입, 손이 따로 노는 장면을 보면 나도 모르게 혀를 차곤 했다. 내가 꼰대인가 싶어 흠칫하다가도 다시 절레절레 고래를 저었다. 내가 꼰대가 아니라, 때와 장소 구분 없이 스마트폰에 코 박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한 거라며 혼자 중얼였다.
학창 시절, 저녁 식사는 꼭 온 가족이 둘러앉아 먹어야 했다. 한 끼는 꼭 가족과 함께 먹어야 한다는 아빠의 철칙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저녁만 되면 불안이 슬그머니 고개를 든다. 아빠가 오시기 전에 식탁에 앉아야 했다. 놀이터에 흙에 묻힐 정도로 땅을 파고 놀다가도 앞치마를 두른 엄마의 모습만 봐도 쏜살같이 집으로 뛰었다. 등골을 타고 감사던 싸한 느낌을 뒤로한 채 벗어둔 신발을 들고 냅다 뛰었다. 혼나지 않기 위한 나름의 발버둥이었다. 아파도 꼭 밥은 먹고 아파야 했고, 일찍 자더라도 꼭 밥을 먹고 다시 자야 했다. 아빠는 다정함 보다는 엄격함으로 가족과의 시간을 독려하셨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사연이 있는 사람처럼 보였던 거다.
아빠는 식사 중 이야기하는 것조차 엄청난 자유라며 자랑처럼 이야기하셨다. 나의 아빠의 아빠, 그러니까 할아버지는 엄청 엄하셨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6.25 전쟁을 정면으로 맞서 극복하신 분이다. 감자나 고구마, 칡뿌리 같은 작물을 씹으며 유년기의 하루를 보냈다고. 그래서 그런지 밥상머리 예절에 유독 엄하셨다. 막둥이였던 아빠에 대한 장난이나 부산스러움에 관대하시다가도 밥상머리만큼은 과할 정도로 회초리를 대셨다. 개구쟁이 6남매가 식탁 앞에서 장난기 섞인 눈빛을 주고받으며 꿀떡꿀떡 밥을 삼키는 모습을 상상했다. 지금은 티브이나 스마트폰이 없다면 상상할 수 없는 장면이 아니었을까.
수십 번도 더 들었던 이야기지만 아직도 고개를 갸웃한다. 생각만으로 10년은 더 늙어 보이는 아빠의 얼굴로 미뤄보아, 당시 상황이 긴박하고 절박했음을 조금이나마 짐작할 뿐이다. 한 가족의 가장이 된다면 먹을 걱정 없이, 침묵이나 묵직함을 강요할 필요 없이 자유롭게 살겠다던 의지가 저녁식사 필참이라는 강박으로 드러난 게 아니었을까. 어찌 보면 가장 아빠스러운 사랑 표현법 일지도 모르겠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의무감에 앉아야 하는 식탁은 싫었지만, 이야기하는 것은 좋았다. 계란말이나 소시지가 나오면 동생과 유치한 근거를 펼치며 쟁탈전을 벌이기도 하고, 이번 여름방학 때 놀러 갈 곳에 대해 가족회의를 하기도 했다. 아빠가 노란 봉투에 시퍼런 지폐를 두둑이 받아오시는 월급날에는 꼭 식탁에 둘러앉아 외식을 선포하시기도 했다. 간혹 등장하는 엄마 친구 아들의 학업 영웅담 이야기가 귀에 거슬리긴 했지만, 진위를 확인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나도 엄마도 별다른 타격을 입지 않았다. 그때는 서로의 행동과 말투, 표정에 더 관심을 기울일 수 있었다.
그때는 그럴 만도 했다. 삐삐도 중학생이 되고 나서야 나타나기 시작했고, 한참 뒤 유행한 걸면 걸리던 휴대전화도 문자와 전화 말고는 딱히 우리의 이목을 집중할 기능은 없었으니까. 지금 생각해 보면 가족과 나눴던 대화 중 9할이 그때 그 시절에 했던 것 같다. 지금이야 설, 추석, 어버이날, 생신 말고는 딱히 이야기에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기필코 참석해야 하는 저녁식사 자리도 무산된 지 오래되기도 했으니까. 지금 아이들에게 이런 이야기는 선사시대 돌도끼로 사냥이나 하는 이야기처럼 무지막지하게 들리겠지.
사실 그때가 가장 행복했던 것 같다. 가족끼리 한 이불속에 둘러앉아 손톱이 노래지도록 귤 까먹던 시절이 떠오른다. 도란도란 이야기 주고받으며 티브이 보던 장면을 이제는 박물관에서나 봐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도 나는 막연한 행복을 떠올릴 때면 그때 체온을 나누며 대화하던 모습을 자연스레 떠올린다. 춥고 딱딱하고 무서웠던 군대에서 2년을 무탈하게 잡아주었던 기이한 힘의 근원도 그때에 대한 추억 때문이 아니었을까.
아빠가 그토록 보여주고 싶었고 강조하던 행복이란 게 어쩌면 이런 것일까? 아니면 스마트폰이 몰고 올 미래에 대한 불안함을 미리 예측이라도 하신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