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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의 적당함

by 눈 비 그리고 바람

‘누구지? 날 아는 사람인가?’

멀리서 누군가 인사를 하는데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다. 나이를 가늠할 수도 없어 손짓으로 인사를 할지,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할지 망설였다. 와중에 얼굴은 보겠다고 미간을 잔뜩 찌푸려 봤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 언제부터였을까. 사람이 잘 보이지 않는 게 익숙하다는 사실 말이다.


요즘 부쩍 사람 얼굴이 흐릿하게 보인다. 얼굴이 선명하지 못하다는 감각이 딱히 낯설지는 않다. 하루이틀 전부터 진행되던 일은 아닌 듯했다. 그냥 나쁨의 정도가 의식해야 할 정도로 나빠지지 않았다고 생각했을 뿐. 매일 보는 딸아이를 보며 고개를 갸웃한다. 분명 보는 이 마다 많이 컸다고들 하는데, 내가 보기에 매번 그 모습 그대로 귀여운 아이였다. 덜컥 겁이 나기도 했다. 그들이 말한 많이 컸음을 깨닫는 순간 당장 결혼하겠다고 남자친구를 데려오는 것은 아닐까 하고.


우리는 매일 조금씩 변하는 곡선에 대해서는 무딘 것 같다. 감각이라는 기능도 어느 정도의 변화가 있어야 그 잣대를 들이댈 수 있으니까. 가랑비에 설마 하다가도 이미 흠뻑 젖어버린 옷을 보며 우산을 쓰지 않았음에 후회한다. 후회와 죄책감이 작동하는 원리가 이와 같지 않을까? 잠시동안이야 뭐 괜찮겠지, 이 정도쯤이야, 하다가 기울어질 대로 기울어진 결과와 마주해야 했다. 이지경이 되도록 무얼 했냐 하면서도, 그 여정을 들여다보면 ‘조금씩’에는 지나칠 정도로 무심했던 나 자신과 마주할 뿐이다.


세월이란 게 그런 것 같다. 젊었을 때 눈부실정도의 선명함에서 확실함을 쫓았다면, 중년이라는 것은 흐릿함에서 살만큼에 적당함을 찾아가는 것 같다. 노안이 오더라도, 암기력이 떨어지더라도, 공감을 예전만큼 못 하더라도 살아가는데 문제만 없으면 그만 아닐까? 이제는 더 잘하려는 욕심보다 더 나빠져도 괜찮다는 생각으로 하루를 살아가는 것 같다.


어렸을 때는 흉터가 홍콩할매귀신 보다 더 무서웠다. 당장에 솟구치는 피쯤이야, 쓱 닦아내고 빨간약만 바르면 그만이었다. 그렇지만 평생 그 흔적을 안고 살아야 한다는 말은 그 어떤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도대체 ‘평생’이라는 말이 왜 이렇게 무서웠던 걸까. 남은 여생을 상처에 통증과 함께해야 한다는 말도 아닌데. 피부에만 남아있는 거뭇한 흔적이 상처보다 더 쓰라렸던 시절이 있었다. 아마 살아갈 세상이 더 넓고, 깊고, 길기 때문에 가능했던 걱정 아닐까?


지금은 흉터가 평생이라는 속성을 가지고 있더라도, 나를 윽박지를 수 없다. 자고 일어나면 얼굴에 베긴 베개 무늬마저도 흉터가 될 것처럼 오래도록 남기도 하니까. 이깟 상처 즘이야 시간이 지나면 없어지거나 옅어지겠지, 또는 흉터가 되더라도 사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는 말로 넘겨버리곤 한다. 이것 말고도 걱정하고 계획할 것들은 이미 차고 넘친다.


나빠지는 것에 체념하겠다는 말은 아니다. 중요한 것에 더 집중하겠다는 의지다. 노안으로 미간에 주름은 늘었지만 맑은 날 볼을 스치는 바람의 속삭임과 포근함을 느끼기에 아무런 문제없으니까. 가끔 환경에 맞게 변화한다는 진화론이 세월에 맞게 적용되는 것은 아닌지 의문을 품곤 한다. 우리에게 필요 없는 꼬리뼈가 퇴화하듯, 날카롭게 다듬어야 하는 감각과 걱정, 생각마저도 세월에 맞게 퇴화하는 것이 진화의 과정이 아닐까라는 생각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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