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내 채울 수 없던 포도알

by 눈 비 그리고 바람

우리 집에는 포도알이 있다.

벽면에 하얀색 도화지 위에 알알이 그려진 포도알. 수업시간 발표를 잘하거나 선행을 실천하는 아이들에게 포도알 모양 색종이가 주어졌다. 30개가 넘으면 공책, 50개가 넘으면 색연필, 100개 전부를 모으면 선생님의 손편지와 특제 선물을 받을 수 있다. 반 아이들 모두 보는 앞에서 포도알을 두 손으로 받아올 때의 기분이란. 질투와 허세가 난무하는 교실에서 유일한 낭만이 포도알에 서려있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내가 숙제를 제일 잘했단다.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박수를 유도했다. 그리고 또 박수를 쳤고, 다른 말로 바꿔가며 칭찬을 했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순간 손바닥에 간질간질 땀이 났다. 나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 다시 현실. 선생님은 아직도 뜸을 들이고 있었다. 나는 그저 머릿속 나열된 생각만 떠올렸을 뿐. 간절함이 지나치면 진짜 일어날 것 같은 짜릿함이 있다. 현실과 상상 사이 경계는 단 몇 초 차이로 금이 갈 지경. 나는 절정의 순간마다 중얼거렸다. 포도알 같은 과즙을 상상하며, 제발 알맹이 5개만 하사해 주세요. 제발


이번에 숙제는 신상우 학생이 제일 잘했어요. 엇갈린 희망, “제발, 아~씨” 상상 속으로 뇌까리던 말이 그대로 튀어나왔다. 주위를 살폈다. 친구들의 박수소리 덕분에 아무도 속 좁은 탄식을 듣지 못했다. 멋쩍은 마음에 힘껏 박수만 쳤다. 포도알을 받고 오는 친구를 눈으로 좇았다. 그가 나를 봤다면 질투로 가득한 눈빛을 느꼈으려나. 이유를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앙다문 입술을 입안에 넣고는 살짝 물었다. 지금껏 이렇게 정성 들여 숙제를 했던 적이 있었나? 오색 색연필로 바꿔가며 써내려 갔었는데. 넘을 수 없는 벽, 노력에 비례하지 않는 재능, 운, 엄마의 도움. 선생님의 편애 이런 식의 말로 도망갈 뿐이다.


책상 위에 두 팔을 걸친 채,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손가락 사이로 풀어헤쳐진 필통과 연필들이 제멋대로 놓여있었다. 꼭 질투에 끊어진 심란함을 그대로 표현한 듯했다. 흐트러진 채로 두었다.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간 팽팽하게 당기던 색연필과 선물이 사그라드는 듯했다. 뒤이어 몰려오는 헛헛함.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누군가를 특정하지 않은 분노와 허망함이 우르르 쏟아졌다.


집으로 오는 길. 가방을 뒤로 늘어뜨린 채 처덕처덕 걸었다. 내 방으로 들어와도 기분이 나아지지 않기는 마찬가지. 침대에 몸을 던지듯 누웠다. 벽에 붙은 포도알이 눈에 들어왔다. 반도 채우지 못했다는 억울함을 따라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집으로 오자마자 숙제를 하라는 엄마, 오늘따라 더 무표정한 선생님, 내가 빌려준 지우개를 잊어먹었다던 짝꿍까지. 기분의 곡선이 아래로, 더 아래로 내려갈 뿐이다. 나도 그런 기분에 보답하듯 사소한 일에 튕기듯 대답하기도 했다. 괜한 미안함에 포도알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포도알 안 받아 그런 거 필요 없어” 그날따라 방을 가득 메우던 흐느낌은, 어두움 때문인지 더욱더 깊게 이불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날 나는 누군가와 타협했다. 50개를 넘기지 못해도 괜찮다고. 조용히 읊조리며 울던 시간. 한참이나 머물었던 눈물만큼이나 되돌아오는 끄덕임은 어느 때보다 확신에 차있었다. 결국 그 해, 칭찬받지 못한 노력은 50개를 넘기지 못한 채 쓰레기통에 처박혔다. 무가치한 것인 줄로만 알았던, 열 살 소년의 밤은 그렇게 저물어갔다. 그래도 마음은 편했다. 꼭 채우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실패나 패배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으니까.


벌써 어른. 아무도 포도알 스티커를 주지 않는다. 누군가의 박수 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묵묵히 내 갈 길 간다. 밤새 오색 색연필을 쥐고 공을 들였어도 남의 차지가 될 수 있음에 더 이상 흐느끼지 않는다. 마흔을 넘긴 지금, 나는 여전히 반도 채우지 못한 포도알을 가슴에 품고 산다. 오히려 그 하얀 빈칸들이야말로 나 자신으로 살기 위해 남겨둔 여백이 아니었을까. 포도알을 다 채우지 못해도 괜찮다던 선생님의 말에는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

목,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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