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명할 수 있을 정도로 명확한 마음에서 나온 결과라기보다는 나도 모르는 새 손가락이 먼저 움직였던 것 같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의 슬픔에 손가락을 얹는 행위, 그러니까 내게 있어 이 정도로 직접적인 액션을 취한 것은 근래 들어 처음이었다. 다른 이들에게는 거리낌 없이 자연스러운 온라인상의 소통이 내게는 왜 이렇게 어려운 건지. 굳이 원인을 찾자면 언젠가부터 지극히 폐쇄적으로 변해버린 내 성격을 탓할 수밖에 없겠다.
물론 완전히 폐쇄적일 수도 없었다. 오랜 기간 감상적인 편에 속했던 성향을 벗어날 수는 없었기 때문에.
굳이 어느 순간, 어느 기점을 따지자면 죽음에 대한 경험을 한 이후 가장 가까운 핏줄에 대한 신뢰가 깨지자 사람에 대한 자잘한 기대마저 저버리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사람은 전부 자신의 일 이외에는 관심이 없고 누군가의 슬픔에 온전히 공감하지 못한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누가 됐든 타인을 온전히 이해하고 위로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어떤 작은 기대감마저 버리지는 못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최근까지의 경험으로 돌아본 바, 핏줄로 연결된 이들은 그저 공감의 탈을 쓴 채 최소한의 '도리'에 어긋나지 않을 행동 수칙에 의해 움직일 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대부분 남보다 못했다.
여하튼 그 사건 이후 내 안의 어두운 생각들을 게워낼 수가 없었다. 씁쓸하게나마 짐작건대, 이 병은 여전히 내 안에 존재하며 꽤 오래 지속될 것 같다. 사람보다 동물에게 마음이 먼저 가는 것 역시 이 병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SNS상에서 글 쓰는 사람이라는 공통점을 지닌 채 서로의 글로 알음알음 알게 된 그 작가는 당연히 글로만 마주하는 형편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문체의 글을 구사했기에 자연스레 관심이 갔고, 자신의 경험을 따뜻한 시선으로 풀어내는 그분의 진심이 마음에 와 닿아 더 자주 몰입해 읽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 그분이 올린 문제의 '그 글'을 본 후에 나는 한참 동안이나 화면을 노려볼 수밖에 없었다. 그분이 겪은 일이 너무나 갑작스러웠기에 믿어야 할지 말지 고민이 되었고, 때문에 있는 그대로 수용하지 못했던 탓이다. 아는 사람에 대한 믿음도 전부 소진되어가는 판국에 모르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어떻게 가늠하겠나 싶은 슬픈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설마... 이게 진짜라고?'
연재 중이던 글을 별안간 휴재하고 마음을 정리해야 한다는 서두 뒤에 남긴 글에는 여동생이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는 현실이 쓰여 있었다. 환상 같은 온라인 세계에서 접한 지독한 현실은, 의구심이 들어 더 아득하게 느껴졌다.
삶과 죽음이 시간이 공평하게 나뉘는 세상이면 좋으련만. 이 생에서 삶과 죽음은 언제나 불공평하게 또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기에, 나는 잔뜩 움츠러들었던 마음을 애써 손가락으로 풀어보았다. 불현듯 죽음 앞에 놓여있던 2주간의 지옥 같은 삶이 떠올랐다.
병원이라는 공간에서 외부로 나서면 수많은 생이 지나다녔고, 다시 병원 내부로 들어가면 서서히 죽어가는 생들이 보였다. 나는 그때 그 병원을 드나들 때처럼 글을 썼다 지웠다 연신 반복하다 마침내 메시지 창을 열어 정리한 글을 꾹꾹 눌러쓰기 시작했다. 어디에서도 함부로 꺼내지 못했던 내 경험이 누군가에게 위로가 될 수 있다면.
나는 그 외에 더는 신경 쓸 것도, 바랄 것도 없었다.
사적 친분이 있지는 않기에 망설였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보내야 하는 마음이 남일처럼 느껴지지는 않아 안타까운 마음에 몇 자 적어봅니다. 저 역시 작가님의 글로 긍정적인 메시지를 얻곤 했던 터라, 마음이 많이 아픕니다.
아무쪼록 너무 오래 슬퍼하지는 마시고 힘내세요. 동생분도 작가님이 끝까지 좋은 글 쓰시기를 바랄 거예요.
정신없던 와중에도 그분은 내게 답장을 보내오셨고 고마운 위로 덕분에 일이 마무리되면 긴 글로 답장을 보내고 싶으시다고 말했다. 답장을 받고 난 뒤 얼마간 마음의 안정을 취하시던 그분은 꾸준히 좋은 글을 올려주셨고 나는 한층 더 깊어진 그분의 글을 읽을 때마다 괜스레 마음이 일렁였다.
죽을 것처럼 아프지만 결국에 살아진다는 것은, 과연 인간에게 축복이 될 수 있을까.
그러다 문득 희망이란 가능성에는 곧잘 내성이 생기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시간 속에 존재하든 간에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희망이 싹텄고 희망이 싹튼 곳에는 머지않아 다시 또 절망이 그늘을 드리웠다. 얄궂으나 매번 잊게되는 사실은, 그 반복된 일희일비의 상황 속에서도 결국 내내 홀로일 수 없는 우리가 누군가에 의해 반드시 또 다른 희망을 품게 된다는 것이다.
안면조차 없는 누군가에게 어렵사리 전한 위로의 말이 과거의 나에게 닿아 되레 위로를 받았다. 내가 누군가에게 기대했던 위로의 말이 실은, 내가 나에게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기분이 이상했다. 누구와도 허물없는 감정을 주고받았던 과거의 나로 잠시나마 회귀한 기분. 사실의 진위여부를 따지곤 했던 이성의 편에 맞서 감성의 편을 들어준 내 손가락에 잘했다 말해주고 싶었다.
살다 보니 어떤 경우에는, 내가 기대하지 않았던 곳에서 따뜻함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가끔은 원하던 기대가 어긋나도 괜찮을 것 같았다. 이제 나는, 먼저 마음을 전할 수 있는 용기를 잃지 않기 위해 조금 먼 거리에서부터 조금씩 노력하려 한다. 그리고 언제나, 그 연결의 시작이 글에서 비롯되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나는 늘 우리의 끝이 희망이기를 바란다.
어쩌면 내세에 대한 끝없는 호기심 역시, 인간의 끝이 희망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시작된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