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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준희 Jul 20. 2021

엄마의 세계가 무너진다는 것은



요새 엄마는 우리와 다닥다닥 붙어사는 게 조금 지겨워진 모양이다. ‘엄마'과정을 졸업할 때가 됐는데, 여건이 안 되는 상황에 치여 여전히 옹기종기 모인 우리의 뒤치다꺼리를 해야 하는 것이 여간 피로해 보이는 것이 아니다.



이직 관련 아카데미를 다니느라 최근에는 조금 바빴는데, 바쁜 일상을 보내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니 뼈마디가 굽고 그 새 더 아담해진 엄마의 뒷모습이 보였다. 나는 마음이 좋지 않으면 되레 더 장난을 치고 무거울수록 가볍게 웃어넘기는 편이나 어쩐지 엄마의 뒷모습을 보면 장난기 어린 말투도, 웃어넘길 재간도 단번에 튕겨져 나온다. 그러나! 그럴 때일수록 나는 더 가볍게 움직이기 위해 시동을 건다.



쉴 때는 보통 내가 아침 준비를 하곤 하는데, 오늘 아침은 엄마가 인터넷 영상으로 접했다던 치즈감자전을 빵 위에 올려먹자며 아침부터 뜨거운 인덕션 앞에서 연신 감자를 부쳐댔다. 나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치즈감자 계란 토스트를 해 먹고 싶었던 탓에 입이 샐쭉해진 채로 불 앞에서 한참을 시전 하던 엄마의 감자채 전에 케첩을 칙칙 뿌려 입에 넣었다.


음 김여사, 그럭저럭 먹을 만은 한데 역시 내가 만든 감자 토스트가 더 맛있는데?


언제나 장난기 어린 말로 엄마를 놀리곤 했던 나는 평소와 다름없이 장난을 건넸으나 엄마는 생각했던 요리가 아님에 실망했는지 민망함을 섞어 그러게, 그 사람은 이게 뭐가 그리 맛있다고 추천까지 했다니. 하며 애먼 유튜버에게 한 소리하며 감자전과 토스트를 씹어 넘겼다.



그새 또 알바 자리를 찾은 막내는 따야 한다던 자격증 공부를 뒤로했고 엄마는 내내 그게 마음에 걸렸는지, 용돈 버는 것도 좋다만 주된 시간은 공부에 투자하겠다고 한 건 지켜야 하지 않겠느냐며 일침을 가했다. 막내는 그간 엄마 말의 대부분을 대강 잔소리로 들으면서 흡수한 탓에 툴툴대듯 엄마 자존심에 상처를 냈다.


매달 용돈 백만 원씩 주려는 거 아니면 아르바이트하는 거 가지고 뭐라고 좀 하지 마.



식사 후 막내는 면접 보러 가는 온갖 요란한 시늉은 다 하다 어제 엄마가 혼자 땀 흘리며 방 정리해놓은 걸 다시 흐트러 뜨려 놓았고 엄마는 곧장 막내의 방을 다시금 정리하며 한탄하기 시작했다. 잔소리는 늘 엄마의 동선과 겹치기에 나는 후다닥 내려놓은 커피에 물을 부은 후 내 방으로 들어오던 참이었다.


왜 이렇게 커피를 많이 마시니 너는. 엄마처럼 뼈 삭기 전에 알아서 좀 줄여. 어쩌려고 그렇게 마셔!


나 원래 세 잔은 기본이야. 엄마, 막내 자취하라고 두고 나 이직하면 그쪽으로 이사 가서 셋이 살자 라떼까지.

평소에도 커피 세 잔 이상은 거뜬히 마시는 카페인 중독자한테 뜬금없이 웬 잔소리람.  



엄마는 격하게 도리도리를 하다 지겹다고 말했고 전부 독립하면 혼자 살 테니 내게 라떼를 데리고 살라고 말했다. 평소 같았으면, 아니 그러면 열몇 시간을 라떼 혼자 있으라는 거야?라고 투정 어린 말투로 대응했겠으나 지겹다는 말에 기분 상한 나는 불똥이 왜 또 내게 튀냐며 방으로 들어왔다.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살 테니,

엄마는 엄마 인생을 사세요.



막내가 그렇게 말했다고 했지만 분명 엄마가 생각하는 의미는 아니었을 것이다.


엄마는 요새 우리에게서 묘한 치사스러움을 느끼는 것 같았다. 독립된 채 스스로 삶을 영위하고 있지 못하다는 생각 탓일까. 자식들 앞에서 돈 얘기를 꺼내야 하는 그 치사스러움은 유독 독하게 느껴져 여럿을 곤란하게 만드는 것 같다. 그렇게 엄마는 여느 때처럼 어디론가 훌쩍 떠나버리고 싶은 마음을 애써 잠재우려는 듯, 방에 틀어박혀 성경 말씀 듣는 것에 몰두한다.


 

사랑이 많은 만큼 말도 많은 우리 집 분위기에서는 좀처럼 고립이라는 단어가 어우러지기 어렵다. 누군가는 외로운 섬을 떠나오길 바라나, 우리는 가끔 고독한 섬으로의 시간이 필요하다. 모든 것이 연관되고 연결되어 오롯할 수 없는 느낌에 나 역시도 가끔은 나만의 시간이 필요하다 아우성이나, 내내 떨어져 살기를 원한다기보다는 그저 그리해야 할 때가 찾아온 것일 뿐이라는 생각을 한다.



학부 때 단편을 쓰면서 구상해온 스토리에 '빈 둥지 증후군'이라는 걸 주제로 활용한 적이 있다. 독립한 아이들이 보고 싶은 마음에 그들이 찾아오게끔 만들기 위해 의도적으로 일을 꾸며내는 어머니의 모습. 친구들 중에는 더러 엄마 혹은 아빠로부터의 독립을 전투적으로 꿈꾸나 현실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어쩔 수 없는 가족의 덫이 자꾸만 자신을 얽맨다는 생각에 힘들다고 토로하기도 한다. 사정에 따라 달리 생각하게 되는 문제겠지만, 그저 때가 이르면 그렇게 될 일이기에 나는 조금 더 붙어있을 수 있는 이 시간을 밉게만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막내가 면접 합격 소식을 전하던 가족 톡방, 또 어디길래 아직까지 안 들어오는 거냐며 한 소리하던 내 톡에 그는 친구와 인생 얘기 중이라고 짧게 답했다. 그리고 힘든 거 알아달란 식의 내색 한 번 않던 애가 다들 나 힘든 거 모르지?라는 말을 남겼다. 편의점에서 맥주 몇 캔을 사들고 들어와 밤늦게까지 막내를 기다리던 엄마와 나는 무엇 때문에 힘들다 말했던 건지 계속해서 유추하기 시작했다. 아르바이트가 고됐던 건지, 혹여나 누가 기분 상할 소리를 한 건 아닌지, 의지하고 싶은 마음에 투정을 부린 건지. 상기된 어조로 안절부절못하던 엄마를 만류하면서도 걱정을 내려놓지 못했다. 하지만 당사자가 입을 열지 않는 이상은 추측에 추측만 난무할 것이기에 기다려보기로 했다. 막내가 들어온 후 우리는 라면을 안주 삼아 새벽 두 시까지 이런저런 대화를 주고받았고, 막내는 힘든 이유를 콕 집어 말하지 않은 채 끝끝내 함구했다. 다만 우리는, 몇 분에 한 번씩 힌트처럼 뱉어내는 그간의 감정을 가만히 들어줄 뿐이었다.  



엄마는 우리의 감정을 고스란히 받다 못해 모든 것이 본인의 탓인 양 자책하는 말투가 습관이 되었다. 그렇게 엄마가 일구어온 세계는 우리의 말 한마디에도 빠른 속도로 무너져 내리곤 한다. 한 평생 우리의 시간을 지어내느라 사시사철 동요했던 엄마의 세계는 우리의 세계를 감싸 안은 채 도무지 벗어나지를 못한다. 세상이 무너져 내린 듯 좌절할 때면 엄마는 그 세상을 일으키느라 있는 힘껏 본인의 세계를 부풀려야 하고, 세상이 떠내려갈 듯 우울해할 때면 엄마는 또 그 세상의 모든 슬픔을 몇 배로 삼켜내야 한다.



어쩔 도리없이 여전히, 우리의 세계는 곧 엄마의 세계다. 고립이라는 단어가 영영 우리 삶에 들러붙을 수 없는 것은, 지금껏 우리가 없다면 온전할 수 없다고 여겼던 엄마의 세계가 감싸 온 마음의 온기 덕분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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