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류준희 Nov 01. 2021

문밖에는 가을이

어느새



계절이 돌아오는 것은 이따금 삶을 잊은 하루살이 같은 내게 마중 나갈 시간을 살피게 해 준다.

특히 길목에 스러진 가을 낙엽들을 밟으면 바스락거리는 잎들이 지난날의 그림을 목에 걸고 성큼성큼 말을 걸어 어느새 걸음을 옮기게 만든다. 무딘 걸음으로 나는 안부라기에는 격이 있고 질문이라기에는 적의 없는 기분을 담아 곧게 뻗은 한 해의 한 철을 겹겹이 쌓아 일기를 끄적인다.

돌아보면 멀찍이 서 있을 정도의 거리에서, 겸연쩍은 얼굴로,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의지만 앞선 약속을 건네며.



사랑은 꼭 가을에 대답이 없었다.

가을이라는 시공간이 만든 세계의 씁쓸함에서 기인한 것인지, 곪아있던 감정의 문제들이 한꺼번에 터진 것이 꼭 그 계절이었던 것인지. 나는 여전히 명확한 답을 내리지 못했지만 밟으면 부서질 것 같은 추억을 곱게 접어 바람에 휘날려 보내는 행위만으로 족했다. 여러모로 가을의 외로움은 내게 미련이기보다 기억을 덮을 수 있도록 응당 추워져야만 하는 날씨였다.


사랑이 뭘까. 우리는 정말 사랑한 걸까.

질문에 대한  받지 못한 탓일까.

가을의 가슴에는 오래도록 기억이라는 커다란 구멍이 자리해 있다. 그 구멍은 파낼수록 좁아졌고 덮으려 할수록 잘게 쪼개지고 나뉘어 곳곳에 숨어들었다.

할퀴는 내내 아파했던 건 분리된 지금의 우리가 아닌 떨어질 줄 모르던 그때의 뒷모습이었다.

가을의 기운이 더해 갈수록 겨울의 가슴은 조급하게 초인종을 눌러댔다. 끔찍이도 차가워진 겨울은 내 몸 하나 끌어안고 있으면 금세 지나가버릴 줄로만 알았기 때문이다.

골몰에서 벗어나고 싶으면 그렇게 방 안으로 나를 기꺼이 들여보내 줄 겨울의 초인종 소리를 기다렸다.



채 줍지 못한 마음이 허공으로 수없이 흩어지던 그날 밤,

나는 처음이 떠오르지 않는 사람처럼 마지막을 곱씹었고 입으로 뱉어내지 않아도 들릴 것만 같은 대답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다시는 사랑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의도한 다짐은 예상치 못한 순간에 무너져버릴 것을 알면서도 그 다짐만은 텅 빈 구멍을 메울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누군가 어떤 노랫말 속에서 말했다. 기억이 사랑보다 아픈 거라고. 어쩌면 그 노래의 가사처럼 가을의 구멍은 꾸준히 좁혀졌다가 나뉘었다가 모여있다가, 다시 또 커질지도 모을 일이다. 분명한 것은, 구멍을 온전히 메울 수 있는지의 여부는 계절이 거듭되어봐야 알 수 있을 거라는 쓸모없는 추측과 누구나 가슴속에 그 구멍 하나쯤은 가지고 있을 거라는 씁쓸한 사실이다.



은행잎이 떨어져 나뒹구는 길을 걷다가 문득 미처 다시 걸어보지 못한 길을 떠올렸다. 한 번도 걸어본 적 없는 마음으로, 매일 걷던 길을 새로이 지나칠 수 있는 날은 언제쯤 되어야 올까. 이 모든 정황이 내가 가을을 타는 합당한 이유가 되어줄까.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다 그만 그 길로 되돌아 걸어가는 상상을 했다. 구멍은 끝없이 모양을 바꾼 채 마중에 마중을 반복하다 뒷걸음질 칠 모양이었다.



나는 가을의 마중을 가장 좋아하지만 그 길에서 돌아서야 마땅한 시간에는 매번 발목이 시큰거린다.
















작가의 이전글 어긋난 기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