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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준희 Nov 11. 2021

향수



가장 애정 하는 영화관 용산 씨지브이에 당도하려면 반드시 시청역 버스정류장에서 내려야 한다. 그날도 평소와 같이 용산역으로 가기 위해 버스에서 벨을 누른 뒤 내리려던 찰나, 낯익은 향을 맡고 말았다. 1년 만에 마주한, 잠시 잊고 있던 가장 익숙한 그 친구의 향이었다.

익숙함에 나도 모르게 이끌리듯 돌아봤지만 분명히 그는 아니었다. 딱히 보고 싶은 것도 아니었고 감정이 남아있는 것도 아니었으나 설명할 수 없는 이상야릇한 기분 탓에 갖은 생각들이 불어나 영화관에 닿기까지 한참을 창밖만 응시했다.



아무래도 기억 때문이겠거니 하며 지나왔지만 이상하게도 향수를 떠올리면 가끔 그 친구가 내게 선물했던 향수가 먼저 떠오른다. 만나기 시작한 이후 처음 맞는 스물세 살 생일에 그 친구는 내게 향수를 선물했다. 당시 우리는 대학생이었고 지갑이 무겁지 않았기에 그저 받기만 하기에는 조금 부담스러운 가격이었지만 나는 나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향기라는 말에 잔뜩 기대했던 터라 마음이 가는 대로 기쁘게 받아 들었다. 백화점에서 내내 선물을 고르는 장면이 떠올라 사랑스러웠고 수줍게 건넨 손이 귀엽게 느껴졌다.

무엇보다 나와 어울릴 법한 향을 선물하고 싶었다는 스윗한 그 한마디에 전해진 마음만으로 충분히 설렜다.



분위기 좋은 곳에서 맛있는 음식에 디저트까지 먹고 난 후, 집으로 돌아온 나는 씻지도 않고 향수를 꺼내 들었다. 대체 나를 연상시키는 그 향이 어떤 냄새 일지 너무나 궁금했기 때문이다. 샤랄라 하고 뿌려야만 할 것 같던 그 향수는 예상과 다르게 칙- 하고 다소 강한 분사력을 지닌 채 뿜어져 나왔고 나는 처음 맡게 된 그 향에서 약간의 의구심이 들었다. 맡자마자 뭇 남성들이 뿌릴 법한 강한 향이 가득했고 잔향을 기다리던 중에도 특유의 진하디 진한 우드 향은 사라지지 않았다. 본래 중성적인 느낌의 스타일을 좋아하는 편이었지만 굉장히 의아했다. 그가 건네준 향수였기에 앞에서는 잔뜩 신이 난 표정으로 그에게 고마움을 전했지만 나는 향수를 뿌리자마자 거실 소파에 일렬로 앉아 티브이를 보던 가족들에게 차례대로 물었다.


-남자 친구가 이게 나랑 어울릴 것 같은 향이라서 샀다는데, 무슨 뜻일까?


엄마가 말했다.

-너 설마 벌써 그 친구 앞에서 집에서 하는 것처럼 털털하게 행동한 건 아니지?

-응. 아니


아빠가 말했다.

-그런 거에 넘어가면 안 된다 딸.

-아니! 응.


둘째 여동생이 말했다.

-언니 나도 한 번 뿌려볼래 응?

-아오 응.


막내 남동생이 말했다.

-안 뿌릴 거면 나 주실?

-아오 확...


결국 그 향수는 그 친구를 만나던 초반에만 쓰였고 나는 어느 순간 향수를 뿌리지 않았다. 꽤 비싸고 좋은 브랜드의 향수였지만 미안하게도 내 취향은 아니었다. 여전히 그 친구가 내게 그 향을 선물한 이유를 알 수 없지만 나의 본모습을 간파했거나 본인이 원하는 향이었을 것이라고 때늦은 추측을 해본다.



누군가를 기억나게 하는 매개체가 되어주는 것들이 퍽 낭만적으로 느껴질 때가 있다. 깊이 들여다보면 파사삭 하고 깨지는 순간적인 낭만일지라도 가끔씩 그런 낭만이 유독 그리울 때가 있다. 연인이 있어도 외롭고 없어도 외로운 가을날에는 특히 그 낭만이 더욱 그리워진다. 그런 기분이 들 때, 나는 갈색의 박스 안에 모아둔 오래된 편지를 하나 둘 읽어 본다. 그리고 읽다가 깨달았다.

아무래도 그 친구가 나를 간파했던 것 같다.


-비록 서로를 대하는 모습이 조금은 달라졌지만(?) 나는 이 익숙한 편안함이 또 설렌다.



시간이 지날수록 원래대로 돌아오는 내 말투와 행동을 보며 장난스레 엽기적인 그녀와 환상의 커플의 나상실이 떠오른다던 그의 말이 스쳐 지나갔다. 나는 지난 나를 잘 모르고 우리는 우리의 기억을 자주 왜곡시킨다. 알게 모르게 그에게 나를 들켜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멈칫하여 이내 추억을 한 번 더 곱씹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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