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를 위한
다른 애들 다 마셔 간다. 얼른 접어서 앞으로 내자!
때는 초등학교 4학년 가을. 급훈이 아님에도 급훈처럼 느껴졌던, 수업 종소리를 제외하고 내가 가장 싫어했던 소리다. 칠흑같이 어두운 칠판에는 조별 점수가, 그 앞 화이트보드에는 조별 칭찬 스티커가 붙어 있었고 선생님은 점심시간 전까지 우유갑을 채워 넣은 청록색의 박스를 거둬들이느라 정신이 없었다. 좋아하는 초코 혹은 딸기 우유조차 천천히 씹어 마셔야 하는 나는 유당분해효소결핍증이었기에, 그렇게 맛있는 우유도 빨리는 못 마시는데 맛없고 비린 데다 차갑기까지 한 흰 우유를 마시라는 소리는 내게 고문이나 다름없었다. 개중에는 나 같은 아이도 여럿 있었다. 끝내 우유를 마시지 않고 화장실에 몰래 버리는 친구부터 다른 친구에게 넘기거나 딜을 하는 아이까지. 우리는 별다른 이유나 설명 없이도 우유를 빠르게 마셔야 했기에 저마다의 연유로 해서는 안 되는 그 짓을 꼭 한 번씩은 하게 되어 있었다.
돌아가면서 조장을 맡던 중 어느 날은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다. 나는 앞선 조장이 강요하던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아 아이들을 재촉하지 않았다. 내가 그렇게 마시고 싶지 않은 것을 누군가에게 강요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한 탓이다. 그럼에도 이 미션을 끝내야 했기에 빨리 해결할 방법을 모색했다. 점심시간 이후로 내면 분명 청소를 하게 될 것이므로, 나는 우유를 좋아해서 늘 부족하다 느꼈던 아이나 우유 급식을 선택하지는 않았지만 마시고 싶어 하는 아이들에게 대신 마셔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 밖의 우유까지 흔쾌히 마셔 주겠다는 아이들에게 고마움을 전한 후 못 마시는 아이들의 우유를 넘겼다. 하나 둘 의식을 끝내고 나니 한 명 분의 우유갑이 비었다.
내 앞에 앉았던 아이는 유달리 말이 없고 말을 걸어도 흐릿한 미소로 화답하는 편이었는데, 그 친구 역시 우유를 들고 쭈뼛거리는 폼이 영 어색해 보였다. 어느새 우리 조원의 아이들이 홀로 남은 그 아이에게 빨리 마시라고 강요하기 시작했다. 별 스티커 하나만 모으면 1등이 되는 상황이 이다지도 불편하다니. 한창 흥분해 있는 옆 조와 반대쪽 조를 흘긋 보니 자칫하면 화를 낼 것도 같은 분위기였다.
나는 멀뚱히 우유갑만 만지작 거리는 아이의 손에서 우유를 건네받아 꾸역꾸역 마셔 넘겼고 그렇게 우리 조는 1등을 했다. 그런데 우리 조가 서로 마셔주는 것을 본 다른 조의 한 아이가 선생님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우리는 그대로 1등이 취소될 위기에 놓였다. 나는 더부룩한 속을 애써 잠재우며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을 선생님에게 물었다. 억지로 마신 사람은 아무도 없었는데 마시고 싶은 친구에게 더 마시라고 주는 게 왜 잘못된 일이냐고. 선생님은 말했다. 각자에게 배당된 우유는 본인이 마셔야 할 책임이 있는 거라고. 물론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당시 내 눈에 비친 선생님은 그 1등을 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억지로 우유를 먹어야 했고, 때로는 배탈이 나야 했으며 뭇 친구들의 눈치를 지속적으로 봐야 하는지에 대해 도통 관심이 없어 보였다. 나는 1등을 하고 싶지 않았다. 우유와 관련된 모든 게 무의미해 보였다. 심지어 억지로 마신 우유로 인해 키가 큰다 해도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을 것 같았다.
고마워
다음날 유달리 수줍었던 아이는 내게 슬며시 쪽지를 건넸다. 나는 그 친구에게 너도 다음 달에는 우유 급식을 취소하는 편이 낫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그 친구는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고개를 끄덕이고 웃어 보였다. 보기 드문 환한 미소였다. 나는 혼자 유별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 여겼다.
이후 아이들은 흰 우유 빨리 마시기에 그다지 몰두하지 않았고 선생님 역시 우유 마시는 속도로 아이들을 채점한 후 벌하거나 상을 내리지는 않았다. 아마도 그때가 불합리한 어른의 지시에 대응했던 나와 우리의 최초 사례 같기도 하다. 그때의 우리는 잘못된 줄 세우기에 의해 곧잘 재단당하면서도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던 것 같다. 합심하여 무언가를 이루는 데 그릇된 절차를 밟아야 했고 1등이라는 목적 아래 수많은 개별적 자아들이 상처 입어야 했다.
마시지 않고 가방에 팽개쳐 둔 마지막 우유가 터진 것도 모른 채로 주말을 보내 엄마에게 혼쭐이 났다. 혼이 난 김에 엄마에게 우유급식을 취소해달라고 말했다. 예상대로 엄마는 그나마 꾸준히 학교에서 우유를 마셨으니 네 키가 그 정도인 거라며 한 소리 했지만 나는 내 고집에서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나는 있는 짜증 없는 짜증을 모두 모아 소리쳤다. 우유를 소화시키지 못하는 게 왜 내 잘못이냐고. 엄마는 왜 내게 묻지도 않고 우유 급식을 선택했냐고. 나는 그렇게 찬 우유를 대체 왜 그렇게 빨리 마셔야 하는지 도무지 모르겠다고. 욕실에서 묵묵히 내 가방을 손빨래한 엄마는 아무 대답이 없었고 다음 달 우유 급식을 취소해 주었지만 나는 알았다. 앞으로 이러한 상황이 내 인생에 수없이 펼쳐질 것이라는 걸. 그래서 다짐했다. 어떠한 선택 앞에 놓여있든 내 의지 이전에 강요된 것들은 한 번씩 들여다보아야겠다고.
나는 여전히 찬 우유를 소화시키는데 문제가 있는 위장을 지녔다. 덥디 더운 여름에도 선택의 여지없이 에스프레소에 따뜻한 우유를 극소량으로 섞어 마실 뿐이다. 어쩌다 아이스 라떼나 아이스 플랫화이트를 마시는 지인들을 보며 부러울 때도 더러 있고, 단체 생활 중엔 메뉴를 통일해서 시켜야 할 때마다 눈치를 보며 깐깐한 내 위장을 대변해야 하지만 어쩌겠나. 배앓이를 하는 것보다 차선을 택하는 편이 훨씬 나은 걸. 그럼에도 이따금 우유를 마실 때면 그 친구가 망설이던 순간이 떠오른다. 그 친구도 여전히 나처럼 찬 우유를 마시지 못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