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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준희 Mar 10. 2021

가장 친한 친구가 바뀌었다

친구에게 받은 프러포즈

    

낯가림이 심한 편이다. 누군가와 친해지기 전까지는 형식적인 말 외엔 잘하지 않는다. 내 선에서 친해지고 싶은 유형의 사람이 있더라도 그쪽에서 먼저 말을 걸 때까지 웬만하면 그저 조용히 그 자리에서 내 일에 충실한 것이 가장 나다운 일이다. 외려 누군가의 관심이 부담스러운 나는 주목받는 것도 싫고 그렇다고 소외되는 것도 용납 못 하는 극도로 예민하고 이상하며 가탈스러운 성격의 소유자다. 그런 나에게 스스럼없이 먼저 다가와 준 이들로 인해 운 좋게도 10년 이상의 연을 지금까지 이어오게 되었다.

    


    말 그대로 최근에 제일 친한 친구가 바뀌었다. 의도치 않은 격변이 아닌 이상 변화를 선호하지 않는 나에게 친구 순위가 바뀌었다는 것은 그 자체로 놀라울만한 사실이다. 아빠의 장례식이라는 가장 큰 일을 마주했던 그때에도 친한 친구 다섯 명을 제외하곤 남자 친구마저 부르지 않았을 만큼 나는 깨나 폐쇄적인 사람이다. 더 놀라운 건, 최근에 그 다섯 명의 그룹에 해당되지 않는 친구가 가장 친한 친구가 되었다는 점이다. 물론 친구 자체에 순위를 두는 것은 의미가 없는 일이다. 세월 지나 만남의 여건이 달라지고 성향까지도 변하게 되어 오르락내리락하기 마련이고 이럴 땐 이 친구가 저럴 땐 저 친구가, 상황에 따라 다른 친구가 생각나는 것이 이제는 너무 당연해졌기 때문이다. 굳이 의식하면서 살지는 않았음에도 나이가 들면서 친구가 되고, 대화를 함에 있어서 성장의 깊이와 속도가 다른 사람들과는 자연히 멀어지게 됐다. 그렇다 보니 알게 모르게 조금 더 진실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온전한 나를 까발려도 내가 여전히 괜찮은 사람이라는 은근한 편안함을 주는 H와 더 가까워졌는지도 모르겠다.



    고작 1년 조금 넘었나. 실상 얼마 전까지만 해도 H는 내게 아빠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매니저로 인수인계를 받던 시점, 나는 첫사랑과 지속했던 5년 연애까지 끝내게 되었다. 어느 정도 마음을 먹은 상태였고 바쁜 일상에 치여 묵묵히 지나 보냈지만 처음 맞이한 이별이었기에 내내 잔잔하면서도 어쩌다 한 번 씩 떠올릴 때면 꽤 오랫동안 따가웠다.  소속된 회사조차 제대로 잡힌 것이 없어 따로 서류 업무까지 해야 했던 고단한 하루를 마친 후, 정말 실신할 것 같은 몸과 마음에 체해 내 이별 소식을 H에게 알렸다. 별말 없이 일 끝내고 한강으로 오라는 말만 툭 던져놓고 진짜 이촌 한강 공원에 짠-하고 나타난 H의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나는 미안한 마음이 덜컥 들었다.

나 자체도 온전히 받아들이기 힘든 사실을 누군가에게 이야기한다는 것이 너무나 버겁게 느껴졌기에 나는 그동안 애써 현실을 부정했다. 그러한 탓에 얘기를 나눌 때마다 거짓말을 하는 그 기분을 떨쳐낼 수 없었고 이제와 솔직하게 말하게 되면 그녀가 내게 실망하게 될까 봐 두렵기도 했다. 부재를 인정하고 현실에 적응해 나가야 했기에 나는 반드시 토해내야만 했다. 일산에서 한강까지 한달음에 차를 몰고 달려온 그녀에게 털끝 하나 거짓으로 말하게 되면, 영영 불편한 진실을 떠안은 관계로 지내야만 할 것 같아 숨이 턱 막혔다. 타들어갈 것 같은 목구멍이 갑갑해 눈물이라도 흘려내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았다. 입맛 없다는 내게 H은 꼭 두 번째 엄마인 양 끼니 거르면 속 버린다면서 이전에 자신이 시켜먹었던 곳이 있다는 말을 하다 이내 핸드폰을 들었다.


    H가 시킨 족발이 왔다. 이 와중에 족발 세트를 펼치며 어머, 어머 연신 감탄하는 우리 모습이 그저 웃겼다. 금세 죽을 것 같던 마음도 이렇게 H를 만나면 피식 새어 나온 웃음으로 다시 덮이는 것 같았다. 우리는 트렁크에 나란히 앉아 무드를 조성한 후(H는 어디든 특유의 무드를 살리는 것을 좋아해 이것저것 주섬주섬 챙기다가 제 몸에 몇 배까지 불어난 짐을 잘도 들고 다녀 가끔 나를 슬프게 한다. 몸에 살집이라도 있으면 안심하겠건만. 뭐, 분위기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이것저것 꾸미는 걸 좋아하는 건 나도 마찬가지기에 그래서 우리가 잘 맞나 싶기도 하다.) 나는 족발 한 점과 맥주 한 모금을, H는 족발 한 점과 음료수를 들이켜면서 연애 얘기를 짧고 굵게 이어갔다. 그리고 나는 얼마 버티다 못해 결국 그 말을 뱉어버리고 말았다.



당최 이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잘 모르겠어서 내내 고민했는데. 이제 말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



나는 누가 보면 고백이라도 하는 줄로 오인할 것 같은 대사를 읊었고 H는 뭔데 그래, 뭐길래, 설마 누가 또 아프셔? 하며 호기심 반 걱정 반이 적절히 섞인 눈으로 연신 나를 훑어봤다.



사실 일부러 말하지 않으려던 건 아니었는데 어쩌다 보니 없는 걸 있는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게 너무 무겁게 느껴져서. 우리 아빠 있잖아...



그다음 대사부터는 기억이  나지를 않는다. - 하는 소리와 함께 모든 것이 무음으로 바뀌었다.

울컥하던 마음에 족발 앞에서 눈물을 왕창 쏟아내는 나와 그런 나를 안쓰러운 눈으로 보며 나란히 앉던 자리에서 마주 보는 자리로 옮긴 H의 몸짓 그리고 새삼 예뻤던 차창 밖의 분위기만 뇌리에 박혔을 뿐이다. H는 언제나 그랬듯 차로 우리 집까지 나를 바래다주었고, 내가 차에서 내린 후 조수석 쪽으로 인사를 건네자 운전석에서 다급하게 내렸다. 갑자기 왜 내리지 생각하던 찰나, H는 나를 와락 안으면서 괜찮아. 그동안 많이 힘들었겠다. 고생 많았어.라고 작지만 단단하게 속삭였다. 아마도 나는 담담하지만 묵직했던 그 날의 토닥임이 아직까지도 잊히지 않았던 것 같다.



    제일 친한 그룹에 속했던 그 친구와 현재 소원한 사이가 된 것도 아니고 결코 그때의 나를 그 친구가 충분히 위로해주지 않았던 것도 아니었다. 그 친구는 또 다른 시기에 나를 잘 알아주었고 많이 배려해 주었으며 우린 많이 재밌었고 자주 함께 울었다. 누가 더 친하고 누가 덜 친하냐. 이 항목은 사실 우정을 이어나가는데 문제가 되진 않았다. 그저 그렇게 그때의 나를 채워준 우리가 있다면 지금의 우리를 채워주는 또 다른 시간이 존재할 뿐. 솔직히 말하면 이런 예민하고 가탈스럽고 벽을 허물기가 어려운 나와 오랜 기간 같이 버텨내 준 모든 존재들에 감사할 뿐이다.



    나와 H는 여전히 장난스레 얘기하곤 한다.


내가 INFJ고 네가 ENFJ인 게 뭔가 운명인 것 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다행 같기도 하지 않냐.   

하나 빼곤 다 같아서 정말 잘 맞기도 하는데 그 다른 하나가 서로의 부족한 점을 꽉 채워주잖아.


     그러면 H는 말하곤 한다.


사실 이게 고백같이 느껴지면 좀 그럴 것 같아서 나는 이성에게 끌리는 사람임을 명백히 밝히는 바지만,

나는 꼭 너 같은 남자 만나면 결혼까지도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아. 친구라 그런 생각을 쉽게 말할 수 있는 건지, 네가 남자가 아니라 그런 생각이 드는 건진 모르겠지만.



    어찌 되었든, 우리는 서로의 mbti 유형이 가장 별나고 가장 소수라는 걸로 논쟁을 펼치며 서로의 개성을 이해하고, 각자의 사정을 자주 들여다봐주는 세상에 둘도 없는 친구로 여전히 매일의 안부를 묻는다. 내일은 H가 가평에 물멍 때리기 좋은 카페에 데려가 준다고 했다. 감정 기복 심하지만 티 내는 건 또 싫어하는 내가, 신나도 맘 놓고 활짝 웃지 못하는 내가, 그녀를 만날 생각을 하니 슬슬 어깨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이런, 나 좀 들뜬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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