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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션 SEAN Aug 22. 2020

[일상] 흑역사와 추억

흑역사

1. 애니메이션 작품 《∀건담》에 등장한 용어로 극 중 과거에 일어난 우주전쟁의 역사를 가리킨다.

2. 없었던 일로 해버리고 싶은 혹은 없던 일로 된 과거의 일을 가리키는 신조어로 사용되기도 한다. 

- 위키피디아



우리는 이제 일상에서 '흑역사'라는 말을 흔히 사용한다. 한때는 서브컬처에서만 사용되던 말이었지만, 지금은 어느 매체에서나 특별한 부연 설명 없이 쓰고 있다. 물론 첫 번째 의미로 쓰는 사례는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나 또한 첫 번째 의미는 오늘에서야 알게 되었다.


이 용어가 유행하기 시작한 건 실은 꽤 오래전이다. 2010년대 초반에 처음 등장해서 점차 사용 영역을 넓혀가더니, 마침내 2016년 필리버스터 당시 국회 속기록에 기록되면서 공사를 막론하고 만연한 표현이 되었다.

'흑역사'를 주제로 포스팅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데는 작은 계기가 있다. 얼마 전 지역의 한 청년기업가를 인터뷰할 기회가 있었다. 한창 대화를 나누던 중 그의 입에서 나왔던 한마디의 말이 이상하게도 뇌리에 남아서다. 편의상 그를 P 대표라고 부르겠다.


P 대표가 오랜 유학 생활을 마치고 국내로 돌아왔을 때 마침 '흑역사'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었다. 이 말은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 뜻하며, 청년들의 입을 통해 온 오프라인을 막론하고 번져 갔다. 예로부터 비슷한 의미의 '암흑기'라는 말이 있어 왔지만 각각이 지니는 뉘앙스 차이는 분명했다. '흑역사' 쪽이 조금 더 오글거리고 감정적으로 싫은 느낌이 강하다.


P 대표가 유독 이 말에 관심을 가졌던 이유는, 그는 사실 대학 공부를 모두 마치지 않고 귀국했기 때문이다. '흑역사'라는 말은 그에게 지난날을 돌아보게 했다. 하지만 P 대표는 이제껏 한 번도 자신의 대학 시절을 실패한 시간이라 생각한 적 없었다. 비록 졸업장조차 얻지 못했지만 그동안 충분히 많은 경험들을 했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국내의 많은 청년들은 남들에 비해 조금이라도 뒤처졌던 시간들을, 모두 흑역사로 치부하며 묻어 놓기 바빴다.

그 이유에 대해 P 대표는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답은 빤했다. 지나치게 과열된 경쟁 때문이었다. 수많은 이들이 좁디좁은 문으로 들어가려다 보니 약간의 실패도 인생의 커리어에 치명적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경쟁이 덜했던 이전 세대에서는 이러한 시간들을 '추억'이라 불렀다. 퇴임을 앞둔 나이까지도 그 시절 그 이야기를 꺼내며 다 같이 하하 호호 웃을 수 있는 '추억' 말이다. 같은 실패의 기억이지만 차이는 극명했다. '흑역사'와 '추억', 달라도 너무 달랐다.


그는 여기서 착안해서 사업을 일으켰다. 정해져 있는 하나의 문으로 들어가기가 치열하다면 더 많은 문들을 만드는 것이 한 방법이 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현재 그는 지역에서 한 콘텐츠 기획사를 운영하고 있다. 최종적인 목표는 대안학교의 설립이다.


진로 고민에 여념이 없는 많은 청소년들에게, 인생의 어느 순간이 됐든 자신의 꿈을 발견했을 때, 굳건히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기초 체력을 길러주고 싶다는 바람에서다. 지식 습득에 국한된 교육에서 벗어나, 살아가면서 느낄 다양한 상황으로 교육 프로그램을 구성하여, 사회의 안전망 안에서 청소년들이 뜻밖의 실패도 해보고 헤매어 보기도 하면서, 자기 삶에 진정으로 필요한 가치가 무엇인지를 살필 수 있는 시야를 만들어 주겠다는 취지다.


P 대표 스스로가 그러한 삶을 살아왔고 추구해왔기에 가능한 생각인 발상인 모양이다. 나이 차가 얼마 나지 않지만, 사고의 크기가 돋보여 듣는 내내 마음에 남았다. 세상에는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고, 늘 생각지 못한 걸 많이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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