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션 SEAN Sep 20. 2020

[생각] 누군가를 이해를 한다는 것

왕좌의 게임 여섯 시즌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사이지 않을까.

우리는 일상에서, '이해한다'라는 말을 꽤 자주 쓰고 있다.


하지만 '이해한다'의 자리에, '안다'를 넣어도, 그다지 어색한 것 같지 않다. 분명 둘 사이에는 명백한 차이가 있을 터인데, 우리는 이 두 가지를 너무 혼용해서 쓰고 있는 건 아닐까. 양쪽 모두를 잘 안다는 핑계를 대면서 말이다.


누군가를 혹은 무언가를 이해한다는 건, 과연 어떤 의미일까. 먼저 사전에서 알아보자. 

이해, 의 사전적 의미는 다음과 같이 세 가지다. 


1. '나는 너를 이해해.'

2. '그 원리는 정확히 이해하고 있어.'

3. '제 처지를 이해해주세요.'


오늘은 익숙하지만 마냥 쉽지만은 않은, 이 이해한다는 행위에 대해 이야기 나눠보고자 한다.


그전에, 오래전에 인터넷에 올라온 한 안타까운 사연부터 보자.


https://pann.nate.com/talk/344015831


댓글들이 무척 살벌하지만, 요지는 이렇다.


1. 글쓴이에게는 연영과 입시 준비를 하는 여자친구가 있다.

2. 여자친구는 다이어트를 하느라 무척 고생을 하고 있다.

3. 입시학원에서 여자친구에게, 만약 떨어지면 살 때문이라고 엄포를 놓는다.

4. 합격 발표가 나고, 예비번호를 받아 상심한 여자친구에게, 글쓴이는 먹고 싶은 도시락을 싸주겠다고 한다.

5. 여자친구는 밥이 너무 먹고 싶지만, 먹을 수 없으니 절대로 만들지 말라고 선언한다.

6. 하지만 글쓴이는 여자친구를 위해 힘들게 3단 도시락을 만들어 꿋꿋이 찾아간다. 

7. 여자친구는 이런 걸 왜 싸왔냐고 다투다가, 끝내 도시락은 쓰레기통에 버려진다.


이 갈등의 가장 큰 문제는, 글쓴이가 이십 대 중반의 공대생이었다는 점이었을까.


이 이야기를 보며, 누군가를 위하는 일이 과연 어떤 것인지,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아직 명확한 해답은 내리지 못했지만, 일단 그 전제에는 상대에 대한 '이해'가 바탕이 되어야 할 것 같다. 


그렇지 않은 맹목적인 행동은, 자칫 사랑이라는 이름의 폭력이 되기 쉽다. 아무리 바람직한 행위일지라도, 상대가 원하지 않는다면, 그건 더 이상 바람직한 게 아닐 테니까. 사랑과 폭력은 완전히 다른 말 같지만, 실은 등을 맞대고 있는 사이일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녀가 나를 사랑하고 있을 거라는 오해'

'내가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오해'


덕분에 사랑을 한다. 정말 아이러니다. 


'이해'에 관한 이런저런 글들을 찾아보다, 꽤 마음에 드는 걸 발견했다. 이 포스트를 쓰게 된 이유다. 읽자마자 여러분들과 함께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해에 대해 정말 섬세하게 표현한 글이다. 

(관심 있으신 분들은, 전문을 검색하셔서 봐도 좋을 듯하다.)


김애란, 「기우는 봄, 우리가 본 것」中 / 계간『문학동네 2014 여름』(통권 79호)

우리가 타인의 내부로 온전히 들어갈 수 없다면, 일단 그 바깥에 서보는 게 맞는 순서일지도 모른다는 거였다. 그 ‘바깥’에 서느라 때론 다리가 후들거리고 또 얼굴이 빨개져도 우선 서보기라도 하는 게 맞을 것 같았다. 


그러니 ‘이해’란 타인 안으로 들어가 그의 내면과 만나고, 영혼을 훤히 들여다보는 일이 아니라, 타인의 몸 바깥에 선 자신의 무지를 겸손하게 인정하고, 그 차이를 통렬하게 실감해나가는 과정일지 몰랐다. 그렇게 조금씩 ‘바깥의 폭’을 좁혀가며 ‘밖’을 ‘옆’으로 만드는 일이 아닐까 싶었다. 


그리고 그 이해가, 경청이, 공감이 아슬아슬한 이 기울기를 풀어야 하는 우리 세대가 할 일이며, 제도를 만들고 뜯어고쳐야 하는 이들 역시 감시와 처벌 이전에, 통제와 회피 이전에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인지도 몰랐다. 그때 우리가 누군가의 얘기를 ‘듣는’ 다는 건 수동적인 행위를 넘어 용기와 노력을 필요로 하는 일이 될 것이다.


다만 뭔가를 자주 보고, 듣고, 접했단 이유로 타인을 쉽게 ‘안다’고 해선 안 되는 이유도, 누군가의 고통에 공감하는 것과 불행을 구경하는 것을 구분하고, 악수와 약탈을 구별해야 하는 까닭도 그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해란 바깥의 폭을 좁혀가며 '밖'을 '옆'으로 만드는 일 

정말 겸손한 표현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이 문장을 처음 보았을 때,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걸 느꼈다. 섣부른 이해가, 때로는 그 무엇보다 큰 상처가 될 수 있다는 걸, 나는 너무 늦게 깨달았던 것이다.


지날 날들을 돌이켜 보면, 나 또한 여느 멍청이들과 다르지 않았다. '앎'과 '이해'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했다. 내게 익숙한 것이라면 대체로 '안다' 고 간주했고, 그 못된 버릇은 인간관계에도 서슴지 않고 적용했다. 


그야말로 오만함이 하늘을 찌르던 시절이었다. 'a'에 대해 안다고 해서, 'A'로 슬퍼하는 이들에게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아마 상대는 속으로, '네가 대체 뭘 안다고 그렇게 말해.'라고 외치고 있었을 것이다.


여럿 시행착오들을 거치며 성장하는 게 인생이라지만, 어느 교훈들은 꽤 오랜 아픔을 대가로 요구한다. 그 욱신거림은, 한동안은 우리 여린 마음을 슬프게 한다. 그건 좋은 경험이었어, 라고 말할 수 있기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린다. 


우리는 조금 덜 아프기 위해서라도, 더 많은 걸 보고 듣고, 잘 느낄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러한 노력들이, 더 이상의 후회를 낳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라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