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션 SEAN Feb 23. 2021

[직장] 월간 에디터의 좌충우돌 편집기 #2

#2 승자도 패자도 없는

취재는 깔끔하게 끝났다.

오랜 시간을 들이지 않았고, 흥미 포인트와 메시지를 잡는 데도 문제없었다.


좋은 취재를 한 다음에 느껴지는 특유의 설렘도 있었다.

약간 뿌듯한 마음과 함께, 얼른 쓰고 싶지만 그렇다고 재빨리 써버리고 싶지는 않은.


마음에 드는 책을 샀을 때와 비슷할 수 있겠다.

얼른 읽고 싶지만, 그렇다고 재빨리 읽어버리고 싶지는 않은.


그러나,

사무실 책상 앞에 앉자 의외로 원고는 잘 나아가지 않았다. 뭔가 잘 써야 한다는 마음이 압박으로 작용했던 것 같다.


대충 얼개를 잡고 문단을 구성하는데만 꼬박 하루가 걸렸다. 그래도 아웃트라인을 잡고 나자 내용은 숙숙 전개됐다.

초고가 완성되고 난 뒤 반나절 정도 뜸을 들였다가 연로한 에디터에게 가져갔다.


"___ 원고입니다."

원고를 건네자 그녀는 말없이 출력물을 받았다.


그리고 잠시 뒤,


"... 재미있는데요..."

하는 말이 파티션 너머로 조심스레 들려왔다.

돌아오는 교정지도 아무런 표시 없이 깔끔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이 온몸을 전율했다.

단순히 '성취감'이라 부를 수준이 아니었다.


표준국어대사전에 나오는 말로는 모두 설명할 수 없었다. 속된 말을 약간 빌리자면 '졸라 기분 좋다' 정도는 될 것이다.


그 순간, 나는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그저 이 연로한 에디터에게 인정받고 싶었던 것이구나.


'그동안 왜 그렇게 바보처럼 굴었던 걸까.'

뭔가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지만, '졸라 기분 좋음'은 쉽사리 사그라들지 않았다.


원고를 업로드하고 난 다음, 나는 오후 내내 마스크 속에서 으쓱이는 광대뼈를 감추고 있었다.

마음 한편에서는 연로한 편집자의 회심에 찬 원고를 기다리면서.


하지만 내가 기다리던 원고는 해가 질 때까지도 완성되지 않았다.

그러다 퇴근할 시간이 다 되어서야, 어느 원고 하나가 웹하드에 업로드된 광경을 나는 발견할 수 있었다.


그녀의 원고였다.


내가 '연로한'이라는 수식어를 쓰고 있기는 하지만, 그녀와 나는 엄연히 같은 직급이다.

서로의 글을 교정 및 교열하고 방향성을 잡아주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상대 몰래 업로드를 하는 것은 엄연히 룰 위반이었다.


나는 일단 침착하게 문제의 원고를 출력했다.

그러고는 한 손에 빨간펜을 든 채 면밀히 살피기 시작했다.


두 페이지 분량의 짧은 원고였지만 다듬어야 할 부분이 많았다.

기존의 인물기사 형식을 해치는 대목이 도처에 있었다. 지나치게 구어체를 많이 사용한 점도 눈에 밟혔다. 이전의 편집자가 보았더라면 가만두지 않았을 터였다.


새빨갛게 표시한 교정지로 돌려줄까, 하고 잠시 고민하다가 오탈자를 중심으로 최소한의 표시만 해서 그녀에게 넘겨주었다.


나는 연로한 편집자의 오랜 경력을 믿기로 했다.

기존의 문법과 다른 점은 그녀만의 스타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내가 이 어른과 경쟁해서 얻을 것이 과연 무엇인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나는 그녀의 자존심을 지켜주었다.

내가 얻고자 하면 앞으로 그녀에게 배울 점은 많을 것이었다.


개인의 실력은 의심할 여지가 있더라도, 오랜 경험은 그 자체로서 존중받아야 마땅했다.

교정지를 받아 든 연로한 편집자는 조금 당황한 기색이었다.


내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그녀는 스스로 시인했다.


"여기랑 여기 부분은 읽기 안 힘들었나요. 인터뷰이 인용이 너무 많아서..."

"네, 그렇긴 한데 편집할 때 배치만 신경 쓰면 괜찮을 거 같아요."

"아, 그래요? 내가 글을 놓은 지가 너무 오래돼서..."


이후로 그녀는 나를 무시하던 태도를 거두어들였다.

내가 모르는 원고들이 돌연히 업로드되는 일은 반복되었지만, 나는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이 상황에서 가장 마음이 상할 사람은 다름 아닌 그녀 자신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다른 부서에서 이곳으로 오게 된 터라 그 쓰라림은 더할 것이었다.


그 뒤에도 이런저런 좌충우돌이 있었지만, 다행히 이번 호도 무사히 발행되었다.


발행과 동시에 다음 호를 준비해야 하는 처지는 변함없지만,

그럼에도 '내가 이 사람과 둘이서 어떻게 일하나'와 같은 막막함과 갑갑함은 사라져 무척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당장에는 내가 이고 질 일들이 넘쳐나겠지만,

그녀의 오랜 경험이 빛을 발할 날이 하루빨리 찾아왔으면 좋겠다는 마음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직장] 월간 에디터의 좌충우돌 편집기 #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