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지나온 삶의 향기
또 마감이 다가왔다.
지옥 같았던 지난 마감이 언제 끝났다고 이번 마감이 코앞이다.
도무지 다달이 발행하는 일은 몸에 익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너무 익어서 탈인지도 모르겠다.
미루고 미루다 이때부터 괴로워하다니.
늘 다르지 않은 구성에, 되풀이되는 행사들.
어느 하나 마음이 끌리지 않아서 더 그럴지도.
허나, 하나씩 토닥토닥 두드려서 내보내야 하는 일들임은 틀림없다.
먹고사는 일은 나의 기분을 봐주지 않는다.
다음 한 주는 바쁜 나날이 될 듯하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는 모양이다.
뭐든 좋으니 글을 쓰면서 살면 좋겠다는 바람이 가득하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배가 불렀는지 마음이 가는 글을 써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마음이 가는 글이란 과연 무엇일까.
학교과제에 회사원고에 글은 많이 쓰고 있는 듯한데,
그중에 마음이 가는 글은 전혀 없는 것일까.
어제오늘 종일 비가 내리니 생각만 많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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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는 지역에서 주목받고 있는 한 신인 연출가를 만났다.
나름 권위 있는 단체의 연출상을 수상하며 최근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인물이다.
그의 인터뷰를 준비하며 프로필을 살피다 나랑 나이가 같다는 점을 발견했다.
서른 살에 그럴듯한 상을 수상하며 이름을 알리는 일.
언젠가의 내가 꿈꾸던 바였다.
그가 어떤 인물인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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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종영했지만, 팟캐스트 <이동진의 빨간책방> 김영하 편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2000년대 초, 조선일보 기자였던 이동진 평론가가 신인작가 김영하를 만나 나눈 대화의 한 대목이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은 68년생 동갑이다.
이: 첫 장편소설인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가 발간된 이후에 인터넷 자살사이트가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고 하잖아요.
이를 두고 작가를 비난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는데 혹시 거기에 부담을 느끼진 않나요?
김: 교통사고가 난다고 해서 가로수에게 책임이 있는 건 아니잖아요.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삼십 대 작가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기에는 여러 모로 함축적이다.
무엇보다 이 시기부터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갖추고 있었다는 점이 인상 깊다.
그의 지난 작품 활동을 어느 정도 대변할 수 있는 문장이라 생각한다.
나는 한때 이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이동진 씨를 부러워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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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난 연출가 역시 부단히 자기 길을 걸어가는 인물 중 하나였다.
소설가와 달리 연극은 작품을 무대에 올리기 위한 제반 비용이 필요하다.
그런 탓에 비예술적인 일들로 생계를 꾸려가며, 자신이 추구하는 삶을 향해 열정적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에게도 물론 시작의 순간이 있었다.
누구나 그렇듯 내면의 분노와 하고 싶은 말을 표현하는 시기.
나 역시 한때 소설가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살았던 세월이 있어 공감할 수 있다.
나는 그 지점에서 스스로의 한계를 느끼고, 좀 더 시간을 두며 세상을 보는 안목을 넓히기로 결정했다.
반면, 그는 미약하지만 자신의 무대를 만들어 생각한 바를 이루기 위해 시간과 노력을 쏟아부었다.
어쩌면 무용해질지도 모를, 20대의 한 시기에 과감하게 움직인 것이다.
물론 그가 탄탄대로만을 달려온 것은 아니다.
글을 못 쓰겠다고 생각해서 해외로 훌쩍 떠났던 순간도 있었다.
하지만 어찌 됐든 그는 지금도 글을 놓지 않았고 해마다 조금씩 성장해나가고 있다.
비록 기억에 남는 어록은 듣지 못했지만, 나는 그의 용기가 부러웠고 감명 깊었던 것 같다.
그는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느냐는 물음에 이렇게 답했다.
"저희 공연에는 마지막 커튼콜 조명이 들어오기 직전에 음향이 줄어들면서 '땡그랑' 동전 떨어지는 소리가 나요. 그러고는 다시 음악이 흘러나오거든요. 그게 저희 시그니쳐 사운드예요. 언젠가는 공연을 보러 온 관객들이 모두 동전을 준비해와서 그 순간에 다 같이 동전을 튕겨 올릴 수 있는 날이 오면 좋겠어요."
괜스레 나의 지난날을 돌아보게 된다.
30대는 그런 나이인 듯하다.
누군가를 마냥 선망하기보다는 조금씩 자신의 향기를 갖추어 나가야 하는.
내가 진정 갖고 싶은 향기는 과연 무엇일까.
혹여나 벌써 갖고 있다면 그건 내가 바라던 향일까.
곰곰이 생각해봄직한 물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