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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달리 Dec 31. 2018

너 참 안됐다

남의 불행을 넘겨짚는 것만큼 무례한 건 없다


 어딜 가든 유난히 말이 많은 직원이 있다. 넓은 고기판 앞에서 고기를 서걱서걱 휘저으면서 입 가림막 하나 없이 다다다 따발총을 쏘아댄다. 이쯤 되면 내가 고깃집에 고기를 먹으러 온 건지 이 사람의 토크쇼를 들으러 온 건지 헷갈려진다. 정해진 레퍼토리가 끝났는지 잠시 정적이 흐른다. 그런데 그 종업원, 테이블 오른쪽으로 눈짓을 한 번 두 번 하더니 생각났다는 듯 이야기를 연달아 쏟아낸다.


"내 친척의 아들놈도 정신지체가 있는데, 글쎄……."


 갑자기 이야기는 정신지체를 가진 친척 아들의 병원 수발기로 흘러간다. 그 친척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또 지금은 얼마나 힘든지 알고 싶지 않은 정보가 끊이지를 않는다. 언제부터 장애진단을 받았고 어떻게 아팠고 그 엄마는 얼마나 힘들고를 굳이 '이 테이블'에서 나불댄다. 테이블에 앉은 어머니는 고개를 숙이며 '네'만 반복했고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허허 웃는다. 나는 매운 연기가 빠져나가는 통로 근처에서 얼굴이 시뻘게져 앉아 있었고, 건너편에는 배실배실 웃으며 현란하게 고기를 써는 종업원을 바라보는 동생이 있다. 나는 저 사람이 왜 별로 친하지도 않을 것 같은 친척의 아들 얘기를 꺼냈는지 안다. 바로 '이 테이블'에 자폐 장애를 가진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어머님 힘든걸 잘 알아. 참 고생이야!"

"죄송하지만, 저희 아무도 힘들지 않습니다."

"……."

"되게 행복합니다."


 백 마디 반박하고 싶은 것을 한마디로 압축시켜 꾹꾹 한 글자씩 짜내서 말했다. 고기는 두껍고 맛있었지만 속이 메스꺼웠다. 차라리 저 종업원이 없는 곳에서 고무타이어에 소금 간을 처먹는 게 더 나았을 것이다. 다 먹고 돌아가는 길에 아버지는 '영업 수완이 좋은 사람일 뿐'이라고 말했고 어머니는 '공감할만한 얘기를 하고 싶었나 봐, 근데 좀 지나쳤네'라고 덧붙였다. 나는 저런 건 수완이나 공감대 둘 다 아니라고 했다. 저건 무례다. 우리는 방금 비싼 돈을 주고 무례함을 사 먹었다.






우리는 가끔 잘 알지 못해도 아는 척을 한다. 내가 건너 건너 들었던 일로 남을 쉽게 위로하고 덧붙이지 않아도 될 말을 덧붙인다. 침묵이 더 좋을 수 있는 순간에도 공백을 참지 못해 남의 상황을 넘겨짚고 불행을 재단한다. 그리고 그 순간, 내가 너를 이해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실례를 범하게 된다.


사람의 육체는 하나라 살면서 한 명분의 경험과 한 명분의 인생밖에 살아가지 못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평생 동안 배려를 하며 살아가야 한다고 배우지만 완전히 상대방을 이해할 수는 없다는 모순에 빠지게 된다. 우리는 옆집 아줌마의 삶을 살아본 적도, 다른 성별의 삶을 살아본 적도, 죽을 것을 알고 뛰어드는 불나방의 삶을 살아본 적도 없다. 딱, 우리는 인간 한 명분의 삶을 살아간다. 그러니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내 삶뿐이다. 그럼 한 점에서 만나지 못할 이런 평행선 같은 개인들이 서로를 알아가며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어쩌면 남을 알아가는 가장 좋은 방법은 '우리는 사실 서로를 잘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는 게 아닐까. 우리가 상대방을 단번에 이해할 순 없어도, 눈에 보이는 상황과 내 감정은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래서 상대방에 대해 가진 정보가 거의 없을 때에는 상대가 바랄 것 같은 말을 하기보단, 내가 바라지 않는 말을 남에게 하지 않는 게 최고의 배려가 된다. 위의 예에 빗댄다면 한 가족이 밥을 먹으러 왔다는 것과 구성원 중 자폐장애인이 있다는 건 상대방의 상황이다. 상대와 공감대를 형성하고 싶으면 역지사지의 상황에서 내가 듣고 싶은 말을 하고 듣고 싶지 않은 말을 안 하면 된다. 고기를 먹는 사람들에게 이 고기가 얼마나 맛있고, 방송에도 나왔으며 다른 가게와 차별화되는 점 정도는 듣고 싶을 수 있는 말이다. 내가 선택한 식당이 얼마나 괜찮고 앞으로 얼마나 근사한 한 끼 식사가 될 것인지 작은 기대정도를 할 수 있다. 반대로 듣고 싶지 않은 말은 고기 굽는 것을 지체시키는 그 외의 모든 말이 될 수 있다. 게다가 자폐 장애인을 키우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는 온전히 상대방의 이야기이다. 실제로 그것이 힘든지 기쁜지 직접 듣지 않고는 알 수 없다. 설사 힘들다고 하여도 그것을 위로받거나 평가받기 위해 친구나 병원이 아닌 고깃집을 가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가장 잘 아는 건 나다.', '나는 상대방을 잘 모른다.'라는 상반되는 두 명제가 내가 어떤 말을 하고, 하지 말아야 하는지 분명하게 해 준다. 때로는 보이는 상황만을 보고 위로하는 게 배려가 아닐 수도 있다. 오히려 보이는 상황도 보이지 않는 것처럼 대할 때, 그것이 배려가 된다.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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