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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달리 Jan 05. 2019

혹시 나만 뒤처지는 게 아닐까?

'나'라는 수족관에 물을 먼저 길러야 열대어를 기를 수 있다.


 작은 방에 혼자 살았을 때 불면증이 생겼다. 불을 끄고 이불을 덮고 누운 지 두 시간이 지나도 잠이 오지 않았다. 그저 새벽까지 큰 눈을 꿈뻑이는 것만 계속할 뿐이다. 냉장고 소음부터 시작해 옆집의 샤워소리, 바깥 누군가 담뱃불을 발로 비벼 끄는 소리까지 들려온다. 그렇게 나를 뺀 모든 소리가 크게 들릴 때, 속에서 걱정이 하나 툭 튀어나온다.


 '나 이렇게 자도 되나? 뭔가 더 하고 자야 하는 게 아닌가. 오늘 하루 제대로 보낸 걸까.'


 이 동네 모든 집집마다 잠이 찾아가 적막한데도, 잠은 내 작고 누추한 방에는 올 생각조차 없는지 소식이 없다. 환영하지도 않은 걱정만 찾아와 방안을 가득 채운다.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한 회의감이 깊어지고 모든 나쁜 경우의 수를 상상한다. 고민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방안을 가득 채울 때쯤, 술에 취해 계단 이곳저곳을 부딪히며 올라오는 윗집 남자의 소리가 들렸다. 평소 같으면 저 소리가 두어 번 계단 벽을 치다가 자기 집 문 앞에서 '쿵', 도어락을 잘못 눌러 '삐삐삐' 소리가 몇 번 나다 사라질 것을 안다. 그런데 그날은 무서웠다. 무엇이 무서운지 정확히 모른 채 어둠 속에서 손을 더듬거려 전화를 찾아 걸었다. 새벽에 자다 깬 엄마의 마른 목소리가 귀에 울렸다.


 "엄마……."

 "왜 무슨 일 있니?"

 "나 무서워서 잠이 안 오는데, 그냥 집에 내려가면 안 될까?"

 

 당차게 집을 떠나 몇 년을 혼자 잘 살던 딸이 그저 바깥소리가 무섭고, 잠이 오지 않아 집으로 돌아오려는 게 아닌 걸 엄마는 잘 알고 있다. 엄마는 잠시 아무 말이 없다가 '그래'라고 말했다. 내가 무서웠던 게 그것만은 아닌데,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엄마에게 그냥 밤이 무섭다고 말했다. 전화를 끊고 다시 누워 '내일 집에 갈 거야.'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금세 평온해졌다. 내 방안에도 곧 잠이 찾아왔고, 그제야 온 동네가 조용해졌다.


 




 사람들이 인생에 쉽게 하는 비유 중에 하나는 '길'이다. 길은 어쨌든 계속 걸어야 멀리 나아간다. 인생이 목적지가 있는 길이라면 누군가는 도태되고, 다른 누군가는 빨리 결승선을 통과하게 될 것이다. 목적지 이후의 삶에 '어떻게든 지지고 볶고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라는 결말이 있기를 바라면서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질한다. 우리는 목표만 보며 끊임없이 길을 따라 걷고 있다. 길 밖의 삶에서 목표를 이룬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근데 한번 생각해보자. 정말 '길 밖'에는 인생이 없는가.


 살면서 마주치는 수많은 사람 중에는 길 밖에서 행복한 사람들이 있다. 목표가 없이 좋아하는 일을 계속하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 경쟁자가 없는 불모지를 개척한 사람, 뭔가 특별한 걸 이루지 않아도 인생에 후회가 없는 사람. 인생이 나아가야만 하는 길이라면 길 밖에서 행복한 사람들을 설명할 수가 없다.


  사는 것은 마라톤이나 여행보다는 내 '수족관을 가꾸는 일'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저 어딜 가지 않고 시간이란 급류를 타고 내려오는 열대어를 뜰채로 낚아챈다. 수족관을 관리하는 사람은 어항 속 먹이는 적당히 있는지, 또 물이 너무 탁하진 않는지 항상 주의 깊게 본다. 많이 혹은 빨리 낚는다고 열대어를 잘 키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잠시 쉬어가는 시간은 수족관의 물을 기르는 것과 같다. 사방이 갇힌 수족관은 물고기를 기르기 전에 먼저 물을 길러야 한다. 물을 기른다는 건 물고기가 안정적이게 살아가는데 필요한 박테리아를 번식시키는 것이다. 이 기간에는 아무것도 급할 것이 없다. 그냥 기다리면 된다. 한 달 정도의 여유를 갖고 물을 기르다 보면 열대어가 살아갈 좋은 환경이 만들어진다. 개중에는 그 기간을 기다리기 힘들어 중간에 열대어를 넣는 사람도 있다. 물이 충분히 길러지지 않아 열대어들이 스트레스를 받게 되면 면역력이 계속 약해지고 하나 둘 시름시름 앓다 쓰러질 수 있다. 그래서 물고기를 기르는 만큼 물을 기르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뒤처진다고 생각하는 순간이 사실은 가장 중요한 순간일지 모른다. 내가 원하는 열대어를 지금 당장 넣고 싶은 마음은 이해하지만, 잠시 쉬어간다고 재촉하거나 불안해할 필요는 없다. 열대어가 살아갈 환경이 잘 조성될 수 있도록 휴식을 통해 물을 기르는 중이니까, 이 시간은 반드시 필요하다. 처음부터 사는 것은 누가 먼저 빨리 정상에 깃발을 꽂느냐 마느냐 하는 것이 아니었다. 알고 보니 인생에는 먼저 들어가야 하는 결승선도, 정상이 보이는 산 같은 것도 없었다.


 나 자신이 정체되어 있는 것 같아 불안할 때, 나는 생의 마지막 날 수족관을 생각한다. 여러 수초들 사이에서 스쳐 지나가는 노오란 디스커스 무리를 상상한다. 지금 잠시 쉬어가도 좋다. 자칫 섣불리 열대어를 넣었다가 준비되지 않은 내게 놀라지 않도록, 지금은 나를 기르는 중이다. 잠시 고요해 보여도 좋은 물을 기른 우리의 어장은 분명 멋지고 아름다워질 것이다.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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