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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달리 Mar 14. 2019

아니! 왜 무인 주문기를 쓸 줄 몰라요?

우리는 모두 부모님에게 만 번의 질문을 한 적이 있다



 우리 엄마는 작은 레코드 가게를 하셨다. 가게 안에는 카세트테이프와 레코드판이 빼곡했고 하루 종일 노래가 흘러나왔다. 유치원을 가기 전까지 나는 그 가게에서 살다시피 했다. 가게 계산대 안쪽에는 노란 장판이 있었는데, 거기서 나는 뒹굴고 그림을 좀 그리다가 졸기를 반복했다. 부끄럽지만 나는 5살이 되도록 말을 못 했고 남들보다 반응속도도 느리고 아둔했다. 엄마가 나를 부르면 두 세 박자 느리게 고개만 갸웃거리는 게 다였다. 그런 내가 ‘엄마’ 다음으로 말한 것이 ‘스님’이었다.


 “어마, 스님! 스님!”

 “스님?”


 우리 가게에는 매일 같은 시간에 오는 스님이 있었다. 처음에 엄마는 내가 그 스님을 알아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상했다. 나는 승복을 입은 스님에게만 ‘스님!’이라고 말하는 게 아니었다. 그냥 들어오는 문 딸랑 종소리가 울리면 다 스님이라고 하는 것이다. 골똘히 생각하던 엄마는 내 발음과 행동을 보고 깨달았다. 아! 내 딸이 ‘손님’ 발음을 못 하는구나. 그래서 어눌한 발음 때문에 들어오는 손님들을 전부 불교 신자로 만들고 있구나!


 “스님 아니고 손님 해봐.”

 “스으님!”

 “소온님!”

 “스오님!”


 나는 ‘손님’이란 단어만 몇 달을 넘게 배웠다. 엄마가 내 어눌한 발음을 교정해준 횟수가 최소 몇 백번은 넘을 것이다. 그 단어 하나만 그랬을까. 나는 세상에 움직이는 모든 걸 엄마에게 물어보던 시절이 있었다. 비둘기는 무늬와 색깔만 달라도 모두 다 다른 종류라고 생각했다. 같은 비둘기라고 해도 소용이 없었다. 내 눈에는 달랐다. 그게 다 같은 놈이란 건 나중에 알게 됐다. 또, 길 가다 꽃만 보면 꿀을 먹겠다고 입으로 바로 집어넣은 적도 많았다. 그때마다 이건 먹을 수 있는 꽃이고 저건 먹으면 안 되는 꽃이라는 걸 엄마에게 배웠다. 하지만 지금은 그 모든 노고를 다 까먹은 게 분명하다.

 

 “이건 어떻게 쓰는 거야?”

 “아 왜 그걸 몰라? 여기 한국말로 쓰여 있잖아. 주문!”

 “이거를 누르면 되는 거야? 어렵네.”


 휴대폰 어플로 길 찾기 하나 못하는 모습을 답답해하고, 매장에서 무인 주문기를 쓸 줄 모르는 걸 보며 속 터져한다. 아무래도 나는 내가 했던 수 만 번의 멍청한 질문들을 다 까먹은 게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야박할 수 없다.







 기술은 무서운 속도로 발전하는데 그게 딱히 모든 사람을 친절하게 챙겨가진 않는다. 그래서 언택트 디바이드족 Untact divide, 디지털 환경에 익숙하지 않아 적응에 불편을 겪는 사람들 이 늘어난다. 삐삐에서 2G 폰을 거쳐 스마트폰, 면대면으로 주문했던 시대에서 무인 주문기로 바뀌면서 도태되는 사람들이 생겼다. 그중에 우리들의 엄마와 아빠도 있다. 그들에게 새로운 문명의 선생님은 딸과 아들이다. 하지만 그 선생님은 꽤나 성격이 더럽고 인내심이 없어 몇 번 물으면 버럭 화를 낸다.


 나에게는 모든 게 당연하다. 하지만 엄마는 묻는다. ‘어플’이 뭘 말하는 거니, 왜 어플마다 ‘…’의 그림을 누르면 나오는 내용이 다르니? ‘링크’는 뭐고 ‘주소’는 뭐니? 그럴 때마다 학구열이 넘치는 학생을 둔 탓에 어린 선생님은 머리를 댕 하고 맞는다. 그러니까요. 이걸 왜 우리는 다 다르게 쓰는 걸까요. 굉장히 철학적인 질문을 하시네요.





 한 두 번은 가르쳐 보지만 다음날이면 까먹고 다시 물어보신다. 그러면 참지 못하고 ‘아! 이리 줘. 내가 해줄게!’가 돼버린다. 그냥 아주 포기하고 싶다. ‘이것 좀 못한다고 굶어 죽는 것도 아닐 텐데 꼭 알아야 할까?’하는 갈등도 생긴다. 근데 요즘은 그것 ‘좀’ 못하면 돈이 있어도 밥을 못 먹는다. 부모님과 무인 주문기만 있고 종업원이 없는 가게에 갔을 때 깨달았다. 내가 잠시 화장실에 갔다 온 사이 멍하니 키오스크를 바라만 보고 계시는 부모님을 봤다. 그 모습이 인형을 어떻게 갖고 놀 줄 몰라 세워놓고 멍만 때리던 어린 시절 나를 보는 것 같았다. 망할 새로운 기술들은 더 이상 편리를 위한 선택이 아니다. 생존을 위한 필수 수단이 돼버렸다.


 그래서 설명하지 않을 수가 없다. 꿀을 먹겠다고 아무 꽃이나 입에 집어넣던 나에게 진달래는 먹어도 되고 철쭉은 안 되는 꽃이란 걸 알려줬던 부모님처럼, 나는 그들에게 배운 것을 돌려줘야 한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어린 우리가 물었던 만큼만 부모님을 가르쳐주기로 하자. 뭐, 그게 한 만 번쯤은 될 것이다.


 “아 이제 주소랑 링크는 알겠다. 그런데 하이퍼링크는 뭐니?”

 “…….”


 그러니까 ‘링크’랑 ‘하이퍼링크’랑 ‘주소’랑은 같은 거예요.

 하, 이제 구천구백구십구 번 남았다.






글쓴이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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