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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달리 Mar 23. 2019

나 슬럼프가 온 것 같아

슬럼프가 온 날에는 파티를 하기로 했습니다


 슬럼프가 왔다. 머릿속에 있는 것이 도통 현실로 나올 생각을 안 한다. 잘하고 싶은 건 맞는데 잘할 수가 없다. 이대로는 또 멍청한 거나 만들게 뻔하다. 그래서 검색창에 '슬럼프를 극복하는 법'을 쳐봤다.     


 술 마시지 마시고, 운동하세요.

 일단 푹 쉬세요.

 사람들을 만나보세요.


 술은 주기적으로 마셔 줘야 하고, 운동은 귀찮고, 지금까지 계속 쉬어 왔고, 아! 사람을 만나봐야겠다. 그래서 정말 오랜만에 밖으로 나갔다. 약속 장소인 책방에서 친구를 기다리며 책을 읽는데 하필 집어 든 게 위인전이다. ― 엄연히 말하자면 에세이였는데, 온통 성공담이 가득해서 위인전 같았다. ― 미친, 나 빼고 이 세상은 모두 잘 돌아가고 있다. 나만 거나하게 술 취한 사람처럼 비틀대며 인생을 기는구나. 자괴감이 두 배로 들었다. 아무래도 슬럼프를 극복하는 방법에 하나 더 추가해야 한다. 나보다 잘난 사람 이야기는 보지 마세요.


 반쯤 읽으니 친구가 왔다. 킬링 타임에 도움을 준 위인분의 책은 접어두고 오늘 만남의 목적부터 말했다. 야, 나 슬럼프가 온 거 같아.


 "슬럼프?"

 "요즘 그림이 내 맘대로 안 그려져."

 "언제는 우리 맘대로 그려졌냐?"

 "머릿속에 있는 게 안 나와! 근데 세상은 나 빼고 다 잘 그려."

 "너 발전했네."


 무슨 개소리야. 슬럼프가 왔다니까?      


 "너 눈이 늘었다고. 손이 눈을 못 따라가는 거야. 손이 멈춘 게 아니라."






 슬럼프가 생기는 데 많은 유형이 있지만, 계속하고는 있는데 성에 차지 않아서 집어던지고 싶을 때는 이거다. 지금보다 더 잘하고 싶어서 슬럼프가 온 것. 좋은 결과물을 내는 것은 운동선수가 기록을 경신하는 것과 같다. 많은 운동 전문가들은 운동 기록이 잘 나오려면 정신의 긴장을 풀어줘야 한다고 말했다. 경기 전 과한 긴장으로 생기는 압박감은 오히려 근육을 움츠려 들게 한다. 바로 얼음! 하고 굳는 것이다. 분명 더 잘하려고 맘먹은 건데 결과는 영 좋지 못하다.


 그런데 '긴장 풀어!'라고 말한다고 긴장이 풀리는 건 아니다. 오히려 더 긴장한다. 마치 혼날 때 '울지 마!'라고 말하면 눈물이 왈칵 쏟아지는 것처럼, '자, 여러분 이제 릴랙스 하세요.'라고 하면 왠지 더 경직된다. 그래서 긴장을 푸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아예 의식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까 결과를 의식하지 말라는 소리인데, 슬럼프를 이겨내고 싶다니까 아예 망하라고 고사를 지내는 건가?


 사실 실력이 쌓이는 건 머리카락이 자라는 과정과 같다. 머리카락은 개인차가 있어도 보통 한 달에 1.3cm 정도는 자란다. 즉, 하루에 0.4mm 자란다. 아마 다들 살면서 머리를 기르려고 아등바등 애쓴 경험이 있을 것이다. '오늘부터 머리를 기를 거야!'라고 생각하는 순간, 귀신같이 머리가 안 자란다. 매일매일 거울을 보며 확인하고, 머리끝을 신경 쓰고, 머리가 빨리 자라는 법을 찾아볼수록 머리가 그대로다. 마음의 소리를 읽고 머리가 스스로 성장을 멈추는가? 아니, 머리는 계속 자라고 있다. 안 자라는 것 같이 느끼는 이유는 너무 자주 확인해서다. 잠시 자를 꺼내 0.4mm가 얼마 정도 되는지 보자.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다. 그러니까 우리는 하루에 눈에 보이지도 않는 정도만 성장한다.


 그런데 반대로 이런 경험도 있다. 그냥 내팽개쳐두고 살다 보니 어느새 머리가 길어졌다. 머리가 긴 애들한테 '너 머리 어떻게 길렀니?'라고 물어보면 다 똑같이 말한다. '그냥 자라 있던데?' 맞다. 머리는 그냥 자란다. 당신의 발전도 그렇다. 매일 하고 있다면 이미 발전하고 있다. 그러니 매번 자신의 실력을 거울에 비춰볼 필요가 없다. 그 거울은 잠시 서랍에 넣어두자. 당장 잘하려고 애쓰지 말고 일단 해본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몇 달 후, 몇 년 후에는 놀랄 만큼 자라 있는 머리카락, 아니 실력을 보게 될 것이다.


 슬럼프는 의식하면 할수록 더 빠져든다. 매일매일 노력해서 내 눈은 점점 높아지는데 결과물이 마음에 안 든다면 축하하자. 잘하고 있다. 당신의 안목이 나날이 발전하고 있다! 단지 눈에 비해 손의 발전 속도가 머리카락처럼 미미할 뿐이다. 내 맘대로 되지 않는 날은 집으로 가는 길에 달달한 조각 케이크 하나를 사들고 가본다. 그리고는 나에게 선물 주듯 말해보자.


"오늘도 잘했다! 내 안목이 점점 성장하고 있구나!"




글쓴이의 말

잘했어요 내일도 자랄 거예요 우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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