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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달리 Mar 26. 2019

네가 아들이었어야 했는데

그 많던 딸들의 글러브는 전부 어디로 갔을까


 우리 집은 장남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남동생은 자폐가 있고 먼저 태어난 나는 여자다. 아들은 있지만 장남은 없는 집. 나는 별 게 아니라 생각했다. 물론 나만 별 거 아니라 생각했다.


 "네가 아들이었으면 참 좋았을 텐데."


 귀 옆에 이 소리를 달고 살았다. 내가 잘하든 못하든 들었다. 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얻어올 때도, 교내에서 상장을 받아올 때도, 남들 앞에서 제 의사를 똑 부러지게 표현할 때도 '잘했다.'라는 말 보다 더 많이 들었다. 사람들은 '아들이었으면 좋았겠다.' 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고, 그들은 그걸 칭찬으로 여겼다. 내가 얻지 못할 계급장을 아쉬워하는 것처럼, 그 아들이라는 게 뭐 대단한 자격인 것처럼 말했다.


 '아, 내가 딸인 것이 잘못이구나.'


 그래서 아들 같아지려 노력했다. 나도 당신이 말하는 아들만큼 씩씩하고 대담하며 용기 있단 걸 보여주고 싶었다. 지들 멋대로 나눈 여성성과 남성성에 일부러 반대로 행동했다. 인형보다는 로봇을 더 좋아하는 것처럼, 치마보다는 바지를, 분홍색보다는 파란색이 좋다고 말했다. 사실 나는 뭘 갖고 놀든 상관없었고, 치마든 바지든 그날 기분 따라 다른 걸 입고 싶었으며, 분홍색도 파란색도 아닌 회색을 좋아했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억지로 나눈 기준에 반항하듯 반대로 행동하는 것이었다.


 "이번 체육 수행평가는 캐치볼이고 10개 중에……."


 캐치볼! 순간 내 눈이 반짝였다. 아빠가 스치듯 말한 것이 기억났다.





 "자식이랑 주말에 캐치볼 하는 게 아빠들의 로망이지."


 내가 캐치볼을 잘하면 주말마다 아빠와 놀러 갈 수 있지 않을까? 꼭 그걸 아들이랑 할 필요는 없잖아. 지금 생각하면 우습지만 이걸 제일 잘하고 싶었다. 아들이 될 순 없지만 캐치볼은 잘할 수 있다. 그 당시 아빠와 나 사이는 꽤나 소원했는데, 그래서 아빠에게 꼭 인정받고 싶었다. 아니, 인정보다는 같이 놀고 싶었다. 거 목욕탕에서 등 밀어주는 아들이 아니어도 충분히 재밌을 수 있는데, 아빠들의 로망이란 매번 그렇게 꼭 선을 그었다. 하지만 캐치볼은 다르다. 공 던지는 거, 배우면 누구나 다 하는 게 아닌가?


 그래서 그해 제일 열심히 준비한 수행평가는 체육이었다. 매일을 연습하고 하는 김에 배트도 휘둘렀다. 힘보다는 기술이 좋아 반별 야구에서 4번 타자를 맡았다. 아빠가 응원하던 야구선수도 등판이 4번이었다. 나는 우쭐했다. 매일같이 하니 수행평가도 곧 잘했다. 하지만 좋은 성적보다 나를 더 설레게 한 건 주말을 아빠와 함께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금요일 밤, 퇴근한 아빠에게 쑥스럽게 말했다. 내일은 같이 글러브와 야구공을 들고나가지 않겠냐고. 그러자 아버지가 무어라 했더라. 사실은 아주 잊고 싶은데 정확하게 기억난다.


 "여자애가 왜 그걸 하니."


 아, 자식과 캐치볼을 하는 게 아버지의 소망이 아니었구나. 아들과 하는 것이 소원이었구나. 내가 딸이라 캐치볼은 아무 짝에 쓸모없는 공놀이가 됐다. 그날은 밤새 비가 왔다. 창 안에 꽂히는 빗소리가 컸다. 나는 이불을 덮어쓰고 내 빗소리를 들었다. 밖이 어둡고 고요해서 더 크게 들려왔다. 글러브는, 모른다. 어딘가 나뒹굴고 있겠지. 어차피 내게는 쓸모가 없어진 장갑이다.


 내가 아직 슬픈 건 집 밖에도 아버지가 있다는 것이다. 수많은 캐치볼이 있다. 속상해하는 장녀들이 있고, 가슴앓이하는 딸들이 있으며, 인정받지 못한 자식들이 있다. 딸들이라고 팔이 세 개이고 손가락이 일곱 개가 아닌데 그깟 캐치볼 무엇이 어렵다고. 아버지. 집 밖의 아버지. 왜 우리의 공은 손 안을 떠나지 못하고. 왜 우리는 수많은 글러브를 버려야만 하는가. 왜.






글쓴이의 말

제 소원은 아빠가 그 로망을 버리는 거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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