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느낌대로
화무십일홍 花無十日紅
열흘 붉은 꽃이 없다고 했던가
그런데
화유백일홍 花有百日紅
백일 붉은 꽃이 있더라
언젠가 겨울
울산의 한 화학회사에
업무협의를 하러 갔을 때였다
홍보담당자는
회사 정원을 지나면서
오랫동안 배롱나무를
감시에 가까운 수준으로 지켜본 결과
너무나 매끄러운 껍질에서
어떻게 싹이 돋고 꽃이 피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신기하게만 느껴진다고 했다
그러고 나서 보니
나무껍질이 이상할 정도로
정갈하게 보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실제 사찰이나 서원에
배롱나무를 많이 심는 이유도
수행자들이 속세의 때를 벗고
마음을 갈고닦는 데
힘쓰라는 의미가 있어서라고 한다
이 때문에
정말 멋진 배롱나무는
누군가의 정원에서
귀한 대접을 받기도 하고
카페의 마당에서
손님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기도 한다
나무로 태어나
이곳저곳 유람하는
그리 나쁘지 않은 삶을 사는
배롱나무
경주 서출지에는
연못을 돋보이게 하는
이요당(二樂堂)이라는 정자가 있다
산을 좋아하고
물을 좋아하는
요산요수(樂山樂水)의
두 가지 즐거움이
모두 있는 곳이라는 의미다
그런데
이곳 풍광을 보는
또 다른 두 가지 즐거움도 있다
그건 바로
연못 안의 연꽃과
연못 밖의 배롱나무이다
특히 이 중에서도
배롱나무는
서출지가 화관을 두른 듯
돋보일 수 있는
가장 큰 이유기도 하다
물론 뜻밖의 미움을 받는
배롱나무도 간혹 있다
예를 들면
오래전부터
우리집 장독대 옆에 있었지만
해마다 과한 가지치기를
견뎌야 하는 경우이다
엄마한테
배롱나무 가지를
왜 모조리 잘라내냐고 했더니
당신이 좋아하는
붉디붉은 색이 아니라
흐릿한 연분홍색이라서
그렇다고 하신다
엄마가 직접 심으셨지만
연분홍꽃이 필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도 하신다
배롱나무의 꽃말이
'부귀'니까
싹둑싹둑 매정하게
자르지는 말라고 했으니
적어도 내년에는
더 많은 꽃을 볼 수 있지 않을까
그 맘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나 역시 보라색 배롱나무를
그 어떤 색보다 더 좋아하니까
이웃집에 핀
보라색 배롱나무를 볼 때면
아무리 봐도
이만한 색이 없는 듯해 보였다
올해는 기필코
여름 내내 피고 지는
작은 배롱나무 한 그루를
심어보리라 마음먹었다
그렇게 해서
분홍색 배롱나무 두 그루를
처음 만났다
어디에 심을까
장소를 고민하는 동안
한 며칠은 수돗가에서 머물렀고
그 사이 꽃까지 살짝 피었다
처음부터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것처럼
이 삭막하고도 비탈진 곳에서
내년 여름을 빛나게 해 주리라
아무도 찾는 이 없어도
백일 동안 활짝 피고 지며
매일 아침을 환하게 열어주리라
나는 믿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누구의 미움도 없이
오로지 사랑만 받을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너무 예쁘니까
사람은 얼마나 오랫동안
꽃을 피울 수 있을까
100년을 살면서
100일을 꽃피울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