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1.27(화)
소윤이가 침대 끝자락, 한쪽 구석에 몸을 쪼그린 채 누워 있었다. 소윤이 옆에는 아내가 있었고 언제 올라왔는지 모르지만 아무튼 엄마 옆이 그렇게나 좋을까.
"소윤아. 얼른 자리로 돌아가서 자"
못 들은 척 한 건지 진짜 못 들었는지 모르지만 움직임이 없었다. 시끄러운 알람 소리에 아내도 눈을 떴지만 일어나지 말라는 신호를 주고 혼자 거실로 나왔다. 아내의 목장 모임이 있어서 차를 놓고 가야만 하는 날이다. 다들 자는데 혼자 일어나서 준비하고 꾸역꾸역 버스와 지하철에 몸을 싣고 출근하면 뭔가 굉장히 열심히 사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곤 한다. 버스가 한 대씩 나타날 때마다 자석에 달라붙는 철가루처럼 끌려가는 여러 부류의 사람들을 보는 재미도 있고. 물론 나도 곧 200번 자석에 끌려 들어가지만.
내가 나가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다들 일어났지만 한참 방에서 뒹굴며 놀다가 나왔다고 했다.
"여보. 쓸쓸했지?"
하긴 어두컴컴한 집 안에서 아침 일찍 준비해서 나오면 유난히 그런 느낌이 들긴 하지. 출근하기 싫다는 생각이 머리를 채울 때마다 방 안에서 자고 있는 식솔들을 떠올리며
'저들을 먹일 수 있다는 게 어디냐'
고 생각하며 감사하려고 하지만 그래도 출근은 좋아질 수 없는 멀고도 먼 그대다.
아내가 목장 모임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전화를 했다.
"여보"
"어. 끝났어?"
"응"
"가는 길이야?"
"응. 시윤이는 자고 소윤이는 위기야"
"왜?"
"너무 졸려서"
"그렇군. 어디쯤인데?"
"이제 좌회전해서 권율대로"
"다 왔네"
가만히 앉아 있어도 졸리고 책을 읽어도 졸리고 그렇다고 꾸벅꾸벅 조는 건 싫어서 게임에 열중하고 있는데 소윤이에게 전화가 왔다.
"아빠"
"어. 소윤아"
"아빠 어디쯤이에여?"
"음, 아빠는 지금 원흥역이야"
"그럼 몇 분 남았어여?"
"글쎄. 한 30분?"
"아니 몇 분 남았냐구여"
"지하철에서 내려서 버스 타고 그러면
한 30분 걸릴 걸"
"아니. 몇. 번. 남았냐구여"
"아 몇 번?"
"네"
"음, 지하철은 두 번 뒤에 내리고 버스까지 하면 한 열 번?"
"그래여? 아빠 그럼 우리 집에 올 때까지 계속 전화할까여?"
"아 소윤아. 여기서부터 하면 너무 길고 아빠가 버스에서 내리면 다시 할 게"
"그래여 그럼. 아빠 끊을게여"
소윤아, 긴 것도 긴 건데 아빠 하던 게임 좀 마저 해야 되거든. 버스에서 내려 소윤이에게 전화를 했다.
"소윤아"
"아빠 내렸어여?"
"응. 이제 아빠 베란다에서 보일 걸"
"어디여?"
"여기 여기 안 보여?"
"아빠 어디 있어여?"
"음, 경비실 옆 쪽에. 안 보여?"
"아 보인다. 아빠아. 아빠아"
크게 손을 흔들고 있는 나를 보러 나오는 소윤이의 실루엣이 보였다. 귀로는 통화하고 눈으로는 서로에게 손을 흔들고 있었는데 소윤이가 가장 바깥쪽의 베란다 문까지 여는 게 보였다.
"어. 소윤아. 그건 안 돼. 위험해 위험해 얼른 닫아"
"아빠아아. 나 보이져?"
"어어. 소윤아 얼른 닫아. 위험해"
다음부터는 베란다에서 인사 나누는 건 굳이 하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집에 도착할 때까지, 집에 도착해서도 계속 통화를 했다. 소윤이는 요즘 이게 재밌나 보다. 시윤이는 또 서럽게 서럽게 울며 아내에게 안겨 있으려고만 했다. 하루 종일 잘 지냈다는데 왜 이 시간만 되면 이러는지. 시윤이가 엄마를 독점하자 소윤이는 나를 점유했다.
"아빠는 나하고만 있어. 알았지여?"
시윤이가 도무지 떨어지지 않으려고 하는 통에 아내가 저녁 준비를 할 수 없었고 소윤이에게 파주 할머니랑 통화하라는 미끼를 던져주고 내가 부엌으로 갔다. 505호 사모님이 주신 소등심이 있으니 그걸 구우면 된다는 아내에게 고기 말고 다른 반찬은 없냐고 물었는데 없다고 했다.
"오늘은 고기가 메인인데"
그럼 계란이라도 부쳐 줘야겠다고 말하자 계란도 한 알 남았다고 했다. 등심아 오늘은 너의 원맨쇼가 되겠구나. 한 개였지만 계란도 부쳐서 반씩 나눠줬다. 애들한테만 주기에는 고기양이 많아서 아내랑 나도 조금 먹었다.
"여보. 내가 저녁 준비와 집 치우기를 포기하고 있으니까 편했어"
"그래. 앞으로도 그렇게 해"
"그럼 너무 늦어지잖아. 저녁이"
"버스 타는 날이나 그렇지. 차 타고 오면 일찍 오니까 괜찮아"
"그런가"
집이 조금 난장판이고 저녁 식사가 좀 늦어져서 퇴근이 미뤄진다한들 아내가 조금이라도 스트레스를 덜 받는다면 뭐 충분히 치환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본다.
비록 한 가지 반찬이었지만 고기라 그런지 둘 다 엄청 잘 먹었다. 오늘만큼은 소윤이도 척척 쉬지 않고 숟가락을 입에 넣었다. 먼저 식사를 마친 시윤이를 아내가 씻겼는데 그러고 났더니 다시 울보 모드를 가동하려고 했다. 살살 장난을 걸어 봤는데 시윤이가 실실 웃으며 좋아했다. 이 때다 싶어 쉬지 않고 시윤이가 좋아할 만한 장난을 계속 쳤고 시윤이는 울어야 한다는 의지를 망각하고 소윤이가 씻을 동안 나랑 꽤 즐겁게 놀았다.
소윤이가 없을 때, 시윤이랑 둘이만 있을 때 최대한 사랑스러운 눈빛과 말투를 많이 전해주려고 한다. 부디 시윤이도 잘 알아주고 받아주길.
오늘도 소윤이는 침대에서 자겠다고 괜히 한 번 투정을 부렸지만 바닥에 내려가서 자야 한다는 아내와 나의 말에 순순히 자리를 옮겼다. 아내에게 애들 재우는 걸 맡기고 난 운동하러 나왔다. 한 시간쯤 운동하고 씻으려는 찰나 아내에게 카톡이 왔다.
[시윤이 지금 잠]
씻고 나와서 아내에게 전화했는데 아내의 목소리에 허망함이 한가득이었다.
"여보. 또 패배자처럼 소파에 앉아서 멍 때렸어?"
"그렇지 뭐"
운동하고 잠깐 카페에 들러 일기를 쓰면서 아내에게 카톡을 보냈다.
[여보는 아마 커피 머신 옆에 있는 크로와상과 호두 파이(?)를 기웃거리다가 한 점 한 점 뜯어먹겠지]
약 30분쯤 뒤 답이 왔다.
[여보 천재야? 나 크로와상 다 먹음]
한참 동안 또 카톡이 없는 걸로 봐서 소파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거나 아니면 누군가와 카톡 하면서 내 카톡은 무시하고 있거나. 그럴 거다. 난 다 알고 있다 보지 않아도.
집이 난장판이었는데 (우리 엄마와 장모님을 포함한 세상의 모든 엄마들이 얼마나 짜증 났을까. 어지르는 사람 따로 있고, 치우는 사람 따로 있냐는 엄마의 푸념이 귀에 들린다. 집안일만큼 돈이 샘솟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망상을 해본다) 시윤이와의 사투에 진력을 쏟은 아내는 아무것도 하기 싫다고 했다.
"하지 마. 빨래는 내일하고 집은 내가 치울 게"
모든 육아의 순간이 비슷한데 예상치 못하고 맞닥뜨리면 짜증도 나고 그러는데 단단히 각오를 하면 의외로 할 만하다. 이제 노트북을 접고 집에 갈 건데 계속 마인드 컨트롤과 시뮬레이션을 해야겠다.
'그래. 집 치우는 거 금방이다. 집에 가면 옷도 벗지 말고 일단 치우자'
혹시 알아 사랑스러운 우리 여보가 또 집을 깨끗이 치워 놨을지.
지금 확인하러 갑니다.
(혹은 지금 치우러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