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1.28(수)
소윤이랑 시윤이는 굉장히 이른 시간부터 일어나서 아내와 나를 깨웠지만 아내와 나는 꿋꿋하게 자리를 지켰다. 물론 잔 것 같지도 않고 기분도 썩 유쾌하지 않아서 이럴 거면 차라리 애들이 처음 깨울 때 일찍 일어나서 애들이랑 놀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잠이 가득 찬 상태에서는 도저히 그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 더군다나 오늘은 차를 가지고 출근하기로 미리 마음을 정해놔서 그만큼 확보된 수면 시간을 더 지키고 싶었다.
소윤아, 시윤아 미안. 일찍 일어나서 기분 좋게 놀아주면 좋으련만 아침마다 참 힘들구나.
낮에 아내랑 통화하면서 이런 얘기를 했다.
"여보. 나머지 돈은 어떻게 하지?"
"그거? 그냥 뭐 적금 들어 놓은 거 써야지. 소윤이 이름으로 모아 놨던 거에서 좀 빼야지"
옆에서 아내의 통화를 듣고 있던 소윤이가 치고 들어왔다.
"엄마. 내가 모아 놓은 거 쓴다고?"
"어? 어. 어"
"안 돼에에에. 쓰지마아아아"
"아니. 그게 아니라"
"아. 싫어어어어. 내 꺼 쓰면 안 돼에에에에"
미안하다, 소윤아. 너도 이 집에 사는 일원이니까. 꼭 목적에 어긋나게 쓰는 건 아닐 거야.
아내는 어젯밤 오늘 아무 일정이 없다며 뭘 해야 할까 고민하며 잠들었는데 결국 하루 종일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계속 집에만 있다가 막판에 잠깐 장 보러 나갔다 오기만 했다. 일 처리할 게 있어서 하루 종일 통화를 자주 했는데 때때로 아내의 목소리가 힘겨운 순간도 있었다. 하루 종일 애 둘과 갇혀 있으면 그런 순간이 하루에도 몇 번씩 찾아 올거다. 내가 집에 도착했을 때쯤 아내도 505호 사모님의 차를 타고 장을 보러 갔다가 막 들어오는 길이었다. 차에서 내리고 있는 아내와 아이들을 만나려고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소윤이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내리고 있었고 아내가 얘기했다.
“소윤이가 아빠 오는 게 싫대요”
“뭐어? 소윤이가 그랬어?”
“아니. 아빠 오는 건 좋은데 밤이 돼서 싫다고”
아마 소윤이가 바라는 건 아빠도 퇴근하면서 해도 지지 않고 영원히 밝디 밝은 햇볕을 받으며 밤새 노는 거겠지. 집에 들어가서는 요즘 루틴처럼 행하고 있는 내 몸 짓밟으며 오르기를 했는데 날이 갈수록 버겁다. 아직 시윤이까지는 괜찮은데 소윤이는 한걸음 한걸음이 내 뼈를 으깨는 것 같다. 다른 놀이를 개발하든가 해야지. 소윤이는 요즘 밥 먹을 때 부쩍 힘겨워한다. 다른 건 아니고 졸림의 강도가 그때 최고치를 찍나 보다. 한동안 낮잠 안 잔 애가 맞나 싶을 정도로 멀쩡함을 과시하더니 아내 말로는 요즘은 내 퇴근 1-2시간 전쯤이 가장 고비라고 한다. 예민하고, 피곤하고. 그래도 신속하게 밥도 먹이고 씻기고, 옷도 갈아 입히고 그랬다. 유난히 신속하게. 왜냐하면 수요일이니까.
애들 밥 먹이고 있는데 아내가 작은 방에서 뭔가를 감추듯 들고 안방으로 들어가길래 뭔가 하고 봤는데 내가 축구할 때 입는 운동복이었다. 뭔가 부자연스러움이 느껴지긴 했지만 아내는 금방 다시 나왔고 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정신없이 애들 재울 준비를 하면서 어쩌다가 안방에 들어갔는데 아내가 뭐 훔치다 걸린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서 나를 쳐다봤다. 한 손에는 섬유탈취제를 쥐고 있었다. 아내는 민망했는지 웃었고 나도 어이없어서 웃었고. 축구할 때 입는 옷 중에 위에 입는 옷 두 개가 싸구려라 물이 좀 빠지고 그 덕에 세탁기로 돌이지 않고 따로 손빨래를 한다. 미처 그걸 빨아놓지 못한 게 생각난 아내는 빤 것처럼 위장해보려다가 발각된 거다. 그러고 보니 아까 안방에 들어갔을 때 아내는 뜬금없이 제습기 물통을 들고 나와서 물을 버렸다.
“그냥 안 빨았다고 하면 되지”
”아냐. 그런 거 아냐”
뭐가 그런 게 아닐까.
“미안. 여보. 빠는 걸 깜빡했네”
“아니. 뭘 미안해. 다른 거 입으면 되지”
아내와 아이들이 누운 걸 보고 인사를 나눈 뒤 옷을 챙겨 입고 집에서 나왔다. 아내가 빤 것처럼 위장하려고 했던 옷은 쿰쿰한 장 냄새가 나서 도저히 입을 수가 없었다. 아내는 굉장히 피곤해 보였고 재우다 함께 잠들 가능성도 커 보였다. 아내는 잠들지는 않았지만 시윤이를 재우는데 무려 1시간을 썼다. 그래도 오늘은 용케 살아남아서 자유를 즐기고 있었다. 집이 정말로 난장판이었다. 발 디딜 틈이 없는 건 물론이고 소파에도 이것저것 잔뜩 쌓여 있어서 제대로 앉을자리가 없었다. 아내와 나는 오늘도 치우지 않기로 했다. 소파에 있는 잡동사니를 바닥에 내던지며 자리를 마련하는데 묘한 쾌감이 느껴졌다.
"아 여보. 이래서 애들이 막 다 던지는구나?"
"그러니까. 스트레스 풀리는데?"
치킨 먹은 지가 너무 오래돼서 그런지 한 번 머리를 점령한 치킨 생각이 좀처럼 떠나가지 않았다.
"여보. 치킨 먹을까?"
"지금?"
"그렇지? 좀 심했지? 됐다"
"먹고 싶으면 먹어"
"아니야. 됐어"
"아 먹어 먹어"
"아니야. 먹으면 살이나 찌지"
"마지막으로 물어본다. 안 먹어?"
"아 여보가 알아서 해"
아내는 치킨을 시켰고 난 신들린 듯 먹었고 먹을 생각이 없다던 아내도 나의 먹는 모습을 보고는 자리를 잡고 앉았다. 정신없이 닭을 뜯고 있는데 갑자기 덜그럭 하더니 안방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소윤이가 부스스한 얼굴로 등장했다. 미처 치우지도 못하고 잠시 정지 상태로 소윤이를 맞이했다. 자다 깨면 발산되는 아무 이유 없는 투정과 짜증을 달래주려고 아내가 소윤이를 안고 있는데 시윤이도 일어나서 울었다. 아내가 소윤이 수발(화장실, 물 마시기 등)을 드는 동안 서둘러 먹던 치킨 조각을 마저 먹고 대충 자리를 정리했다.
밤에 치킨 먹다 걸린 건 처음인 것 같은데?
"엄마, 아빠는 왜 안 자여?"
"어 엄마, 아빠는 할 얘기가 있어서"
"무슨 얘기여?"
"엄마는 하루 종일 소윤이랑 시윤이랑 같이 있고 아빠는 회사에서 일하고 그러니까 하루 종일 소윤이, 시윤이가 어떻게 지냈는지 얘기할 시간이 없잖아. 그래서 소윤이랑 시윤이 재워 놓고 밤에 얘기도 하고 할 일도 하고 그러는 거야"
소윤아, 시윤아. 앞으로도 혹시 이런 경우가 생긴다면 그냥 모른 척하고 다시 눈 감아주지 않으련.
이 시간마저 빼앗기면 엄마, 아빠는 호흡기 떼는 거나 마찬가지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