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1.29(목)
아내가 대학교 친구들을 만나기로 한 날이었다. 아내를 포함해 총 4명이 구성원인데 이제 네 명 모두 아기 엄마가 되었다. 아내만 둘이고 나머지는 하나씩. 진작부터 예정되어 있었던 약속이라 아내는 소윤이에게도 미리 말을 해놨다. 어제 현정이(대학친구 중 한 명, 서우 엄마)는 서우가 아파서 못 올 것 같다는 연락을 받았다고 아내가 얘기해줬다. (현정이는 천안에 거주하고 있다) 소윤이에게도 얘기를 전했는데 소윤이가 매우 낙심했다고 한다. 아내가 묘사한 소윤이의 표정과 말투를 들어보니 그건 진심이었다. 아마 지난번에 현정이네 놀러 갔을 때 현정이가 소윤이를 굉장히 아기처럼 대해주고 친절하게 상대해줬던 게 좋았던 것 같다고 아내가 얘기했다. 엄마, 아빠는 훈육이랍시고 이것도 못하게 하고 저것도 못하게 하고 밥 먹듯이 혼내고, 만나는 이모, 삼촌은 다 자기 자식 챙기기에 여념이 없는 와중에 조금이라도 자기를 따뜻하게, 사랑을 담아 대해주는 게 느껴지면 소윤이도 사람인데 어찌 좋지 않을 수 있을까.
아내는 점심때쯤 가서 내가 퇴근할 때까지 머물렀다. 엄마 셋에 아이 넷이니 함께하는 시간이 결코 녹록지 않은 시간일 테다. 그래도 비교적 이것저것 신경 쓰거나 재지 않아도 되는 마음 편한 친구들이라 같이 하루의 시간을 보낸다는 것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을 것 같다. 오늘의 호스트였던 은영이(친구 중 한 명, 단이 엄마, 장소 제공자)가 점심 메뉴로 월남쌈을 할 거라는 얘기를 어제 아내로부터 전해 들었다.
"월남쌈? 가능한가?"
나는 걱정과 의문을 담아 질문을 했었다.
아내는 거나하게 차려진 한 상을 보며 은영이에게 물었다.
"언니, 괜찮아? 안 힘들었어?"
"괜찮아"
은영이는 나중에 모임을 파할 때쯤 실토했다고 한다.
"애들 데리고 준비할 메뉴는 아니더라"
월남쌈 준비하다 월남전의 고통을 느낄 가능성이 다분하다. 손님이었던 아내와 아이들은 덕분에 양질의 월남쌈을 먹을 수 있었지만 애 엄마가 손님 접대용으로 함부로 덤빌 메뉴는 아니다.
한참을 은영이네 집에 머물다가 내가 원흥역 도착할 시간에 맞춰 아내가 날 태우러 왔다. 차에 타자마자 아내가 얘기했다.
"여보, 오늘 야근이야"
"왜?"
"소윤이랑 목욕하기로 했어"
"아 그래? 갑자기 왜?"
"아니 은영 언니네서 단이 목욕한다고 그러니까 자기도 할 거라고 막 졸라서"
"그래. 집에 가서 목욕하자"
목욕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소윤이의 낮잠이 사라진 후로는 저녁 시간에 뭘 할 수가 없었으니 소윤이는 물론이고 시윤이까지도 욕조에 몸을 담근 게 언제인지 기억이 안 날 정도였다. 둘 다 굉장히 좋아했다. 시윤이는 나가기 싫다고 버티기까지 했다. 부지런히 한다고 했는데 역시 샤워는 시간을 많이 잡아먹었다.
"오늘은 아빠도 같이 잘 거에여?"
"아니야. 아빠는 이제 운동 가셔야 돼"
"아빠도 같이 자는 게 좋은데"
"오늘 너무 늦었어. 아빠는 운동 가시라고 하고 엄마랑 자자?"
"그래도 아빠랑 자고 싶은데여"
소윤이가 짜증 하나 없는 애교 가득한 말투로 얘기했다. 사실 나도 내심
'오늘은 운동 가지 말까'
고민하던 찰나였다.
"그래 소윤아. 아빠도 같이 자자"
그리하여 네 식구 모두 자러 들어갔다. 물론 아내와 나는 진짜 자려는 건 아니었지만.
"나는 바닥에 눕고 엄마는 내 옆에 누워서 나 잠들 때까지만 있다가 나 잠들면 올라가여"
"그럼 아빠는?"
"아빠는 침대에 있어여"
뭐지. 나 빼고 나머지는 바닥에 나란히 누워 잠을 청했다.
"소윤아. 이럴 거면 아빠는 그냥 나가시라고 하자. 아빠는 아무것도 안 하시잖아"
틀린 말이 아니었다. 난 그냥 누워서 휴대폰을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결국 소윤이로부터 출소(?)를 명 받고 방에서 나왔다. 운동은 가지 않기로 했다. 아내가 애들을 재우고 나올 때까지 소파에서 탱자탱자 놀았다. 아내도 거실에 나와서 한참 동안 소파에 앉아 있었다. 어제 아무것도 하기 싫다는 아내에게
"여보. 치우지 말고 둬. 내일 내가 치울 게. 오늘은 치울 힘이 안 남아 있고"
라고 얘기했었다. 뱉은 말을 지키기 위해 슬슬 몸을 움직여 싱크대로 가고 있는데 아내가 얘기했다.
"여보. 내가 설거지할 게. 여보는 그냥 여기 집 치워줘"
내가 설거지를 가장 좋아하기도 하고 빨아야 할 것과 빨아놓은 것이 섞여 있는 거실의 옷감을 분류하는 건 내 영역 밖의 일이었다. 차라리 계속 앉아서 놀든가 하지 내 나름의 템포와 결대로 움직이려고 하는데 아내가 제동을 거니까 기분이 좀 상했다. (지금 와서 보면 이게 그럴 껀덕지가 되나 싶지만, 그땐 그랬다)
'그럼 진작에 하던가. 내가 하려고 하니까 태클이네'
티를 좀 내니 아내도 감지했는지 기분이 상했냐고 물었다. 당연히 아니라고 대답하고 거실을 치우다가 한 쪽에 쌓인 옷더미를 보며 물었다.
"여기 있는 거 다 빠는 거야?"
"아니야. 그건 그냥 거기 둬. 내가 나중에 분류할 게"
"여기 있는 게 보기 싫으니까 그렇지. 그러니까 여보가 이거 하고 내가 설거지 한다고 그랬더니"
더 적극적으로 기분이 좋지 않다는 걸 표현했다. 아내도 불쾌하다는 티를 내기 시작했다. 보란 듯이 설거지를 열과 성을 다해 공들여했다. 마치
'니가 하는 설거지랑 내가 하는 설거지는 급이 다르다'
는 걸 증명이라도 해 보이려는 듯.
'누가 자기보다 집안일 잘 한다고 했나 그냥 나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두면 되는 거지'
내가 할 수 있는 분량의 집 치우기를 마치고 일찌감치 소파에 앉아 노트북을 폈다. 아내는 그때도 여전히 설거지 중이었다. 몇 번 아내에게 말을 걸었으나 돌아오는 말투에 냉랭함이 묻어 있길래 굳이 분위기 개선을 위해 노력하지 않고 내 할 일을 했다. 그러다 아내는 소윤이가 깨서 먼저 자러 들어갔다.
앞으로 집안일은 그냥 아내의 지시에 전적으로 따르는 게 모두에게 좋을 것 같다. 일을 미루다가 싸우기도 하지만, 하려고 달려들다가도 다툴 수 있다는 걸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