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드를 그렇게 뒤집어도 채워지지 않는

21.05.01(토)

by 어깨아빠

아침부터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길래 진작에 외출할 생각은 접었는데, 비는 오후 늦게나 돼서야 내리기 시작했다. 괜히 억울한 기분이었다. 대신 집에서 실컷 놀았다. 우노를 한 10판은 넘게 했다. 그나마 우노가, 내가 많이 노력하지 않아도 골고루 승리의 기쁨을 맛보기 좋은 게임이다. ‘운’의 요소가 많이 작용하는 게임일수록 시윤이도 이길 기회가 많아진다. 시윤이는 우노의 규칙을 완벽히 이해하고 있다. 다만 자기가 가진 카드 중에 한 장을 골라서 내리는 동안 다른 사람에게 자기 패를 모두 보여줄 뿐이다.


아무튼 우노를 계속했다. 소윤이와 시윤이가 그만하자고 하기 전에는 내가 먼저 그만하자고 말하지 않았다. 서윤이와 아내가 방에서 자는 동안 내내 우노만 했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뒤늦게


“아빠. 레고 할까여?”


라고 했지만


“지금은 너무 늦었어. 곧 서윤이가 깰 거 같아. 레고는 서윤이가 잠들자마자 해야 돼”


라며 다음을 기약했다. 우리 집에서 ‘레고는 서윤이에게 독극물’ 정도로 여겨지고 있다.


오후에는 팝콘과 함께 동물 다큐멘터리 영상을 봤다. 소윤이가 이번에는 캬라멜 팝콘을 꼭 해달라고 해서 기꺼이 설탕을 녹여 캬라멜 소스도 만들었다. 서윤이가 아주 강력하게 자기도 팝콘을 달라며 손을 뻗고 소리를 질렀지만, 차마 팝콘은 줄 수 없었다. 먹을 것에 대한 집중도가 매우 높아진 서윤이는 꽤 끈질기게 팝콘을 요구했다. 물론 주지 않았다.


동물 다큐멘터리는 열대우림 편을 시청했다. 저번처럼 정말 재밌었다. 생전 처음 보는 동물도 많이 나오고 영상미도 뛰어났다. 정말 재밌게 봤다. 한 20-30분까지는. 정말 재밌게 보고 지루하지 않았는데, 어느 순간 잠들었다. 오늘은 아내도 마찬가지였다.


“아빠. 엄마. 끝났어여”


“아빠. 아빠랑 엄마는 왜 동물 영상만 보면 자여?”

“그러게. 엄마, 아빠가 너무 피곤한가 봐”

“엄마, 아빠는 이거 재미없어요?"

“아니. 아빠도 엄청 재밌어. 엄청 재밌는데 아빠도 모르게 잠들어”


엄마와 아빠의 피로가 신비의 열대우림보다 광활한가 봐.


저녁에는 아내가 지난번 시윤이 생일에 못 간 식당에 가자고 했다. 아내가 굉장히 좋아하는 곳이다. 주기적으로 ‘먹고 싶음’을 느끼는 곳이기도 하고. 소윤이와 시윤이에게도 얘기했더니 좋아했다. 지난번에 갔을 때 어땠나를 떠올려 보다가 흠칫 놀랐다. 굉장히 쉽지 않았다는 게 생각났다. 모든 순간이 명확히 기억나지는 않았지만 월남쌈 먹을 때만큼이나 쉴 틈 없고 정신없이 애들을 챙겼던 기억이 났다. 그렇다고 엄청 악몽 같은 기억은 또 아니었다. 힘들었지만 맛있고 즐거웠던 기억이기는 했다.


“여보. 그래도 서윤이 양호한 편이다”


아내의 표현 그대로였다. 뭐가 됐든 일단 의자에 ‘조용히’ 앉아 있어 주면 그걸로 족하다. 그 시간을 위해 끊임없이 먹을 걸 대령해야 하는 수고가 필요하지만, 아무리 먹을 걸 갖다 올려도 진정되지 않아서 결국 안아야만 하는 사태가 벌어지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소윤이와 시윤이도 챙기고 서윤이까지 챙기려면 보통 바쁜 게 아니지만, 아내와 나눠서 할 수도 있고 이제 어느 정도 인이 박혔기 때문에 괜찮다.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밖에 나와서 이 고생인가’


같은 생각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도록 정신을 똑바로 차리면 된다.


밥 먹고 바로 집에 가는 건 아쉽다는 소윤이와 시윤이의 성화에 근처에 있는 쇼핑몰에 잠시 들렀다. 목적 없는 방문인 만큼 할 게 없었다. 잠깐 옷 구경 좀 하고 나왔다. 별로 볼 게 없기도 했지만, 실내 공기가 너무 답답하기도 했다. 소윤이와 시윤이도 막상 가 보니 재미가 없었는지 집에 가자는 말에 별로 슬퍼하지도 않았다.


“아빠. 오늘은 아빠랑 별로 못 놀았네”

“뭘 못 놀아. 아까 우리 우노 실컷 했잖아”

“아니, 그건 그런데 그래도 아빠랑 뭔가 더 놀고 싶어여”


우노만 했을까. 아침부터 하루 종일 붙어서 보낸 시간이 얼만데. 많이 못 놀았다니. 우리가 숱하게 뒤집은 우노 카드는 무엇이었단 말인가. 내일도 주말이니 너무 아쉬워하지 말라고 달랬다.


아내는 오늘도 푹 자고 나왔다. 그렇게 실컷(?) 재우고 나왔는데 얼마 안 돼서 서윤이가 깨서 울었다. 아내가 미처 잠기운을 떨쳐 내기도 전에. 아내가 다시 나오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아내가 한참 안 나오길래 역시나 잠들었구나 싶었는데, 방에서 ‘잠들지 않았을 때’의 아내 기침 소리가 들렸다. 카톡을 보냈다.


“여보 안 자?”

“응. 나갈 거야. 정신력으로 버텼음. 빨래 돌려야 함”


슬프다. 정신력으로 잠들지 않고 버틴 이유가 빨래 때문이라니. 아내는 나와서 세탁기의 빨래를 건조기로 옮기고 건조기에서 꺼낸 빨래는 갰다.


“빨래 개면서 잠이라도 깨야지”


그때가 이미 자정이 넘은 시간이었다. 그녀는 왜 자정이 넘은 시간에 잠이 깨고 싶었을까. 육아인은 그 심정을 잘 알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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