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5.06(목)
낮에 갑작스럽게 (내) 엄마가 집에 오셨다고 했다. 얼마 전 (내) 동생이 출산을 했고 엄마도 덩달아 바빠졌다. 시간이 날 때마다, 시간이 안 날 때도 만들어서 동생 집에 가서 산후조리를 도왔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할머니가 우리는 안 만나는데 고모 집에는 자주 간다’며 서운함을 토로했다. 조금 진지하게 생각해 보면 소윤이와 시윤이가 그렇게 생각할 법도 하다. 유일한 손주였는데 처음으로 사촌 동생이 생긴 거니까. 소윤이와 시윤이가 전화를 할 때마다 ‘고모 집에서’ 나중에 만나자는 말을 전하는 게 미안했던 엄마는, 애써 시간을 만들어 오신 거다.
“소윤아, 시윤아. 할머니 오셔서 좋았겠네?”
“네. 그렇게 오래 있지는 않으셨어여. 그래도 좋았어여”
오랫동안 누려온 독점적인 손주의 지위를 나눠야 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할머니, 할아버지들도 피곤하시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집 저집 고르게 사랑을 나눠주려면.
아내가 서윤이가 안방 베란다 창문에 눈을 부딪혔다면서 사진을 보냈다. 사진으로 봤을 때는 자세히 보이지 않아서 그냥 그런가 보다 했는데, 퇴근하고 집에 가서 보니 꽤 흔적이 컸다. 다행히 찢어지거나 그러지는 않았지만 시퍼렇게 멍이 들었다. 그렇다고 막 마음이 찢어지게 아프고 그렇지는 않다. 아이들이 집에서 자잘하게 다치는 걸 볼 때마다 다행이라는 생각을 한다. 한 끗 차이다. 딱 한 뼘, 한 걸음 더 나가거나 모자랐으면 크게 다칠 일이 부지기수다. 직접 볼 때도 더러 있다.
‘와, 진짜 큰일 날 뻔했다’
자려고 누웠을 때 돌이켜 생각해 보면 아찔할 때도 많다. 그러니 오늘 서윤이처럼 다친 걸 보면 물론 걱정도 되지만 사실은 감사한 마음이 더 크다.
아내가 저녁으로 카레를 준비했다. 아내는 어제 카레를 먹었다는 걸 깜빡하고 또 카레를 준비했다면서 미안하다고 했다. 미안할 일도 참 없다.
“소윤아, 시윤아. 엄마가 해 준 카레는 훨씬 맛있잖아. 그치?”
“맞아여. 밖에서 먹는 거랑은 다르져”
아내는 서윤이를 위한 카레도 따로 만들었다. 여느 때처럼 틈을 주지 않고 맛있게, 빠르게 잘 먹다가 갑자기 심통을 부리며 울기 시작했다. 이유는 모르겠다. 분명히 뭔가 원하는 게 있었을 테고, 그걸 파악하지 못한 아빠에게 짜증이 났을 거다. 그래도 잘 먹다가 갑자기, 1초 만에 국면을 전환시키니 당황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나마 안아주니까 조금 진정이 되는 듯하다가도 또 막 울고. 그냥 이 시기의 아기를 키우는 부모가 지나야 하는 피할 수 없는 터널 같은 시간이다. 아마 소윤이랑 시윤이도 그랬을 거다. 그래도 오늘은 그러다 금방 기분이 좋아지기는 했다.
무척 피곤했다. 자러 들어간 애들한테 기도를 해 주고 거실로 나와서는 바로 소파에 쓰러지듯 앉았다. 애들을 재우고 있던 아내가 카톡을 보냈다.
“여보 뭐해? 어디 안 나갔다 올래?”
사실 조금 놀랐다. 아내가 말하기 전에 ‘아, 어디 카페라도 좀 갔다 올까’라고 생각하긴 했다. 물론 100% 부부의 특별한 교감이라고 말하는 건 무리가 있다. 원래대로면 오늘 일정이 있었는데 그게 취소됐다. 그러다 보니 아내도 나도 ‘원래 나가는 거였으니’라는 이유로 그런 생각을 한 거다. 나갈까 말까 고민을 많이 했는데 좀 피곤하고 귀찮았다. 갈 데도 없었다. 나가 봐야 카페인데, 10시까지밖에 못 있으니 시간이 짧았다. 아내처럼 차에 앉아서 수다를 떨 누군가도 마땅히 없었다. 동네에 친구라도 살면 그냥 밤바람맞으면서 이야기라도 나눴겠지만. 결국 나가지 않고 소파랑 진하게 사귀었다.
애들을 재우고 나온 아내가 말했다.
“아, 애들 빨리 재우고 커피라도 사러 갈까 했는데 너무 늦었네”
“그래? 그럼 나한테 사다 달라고 하지 그랬어”
“아니 뭐 그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고”
“지금 문 연 곳은 없나?”
그 시간에 갈 만한, 가까우면서도 맛도 어느 정도 수준이 되는 카페는 한 곳 정도였다. 아내는 커피를 사러 나갔다 왔다. 평일 저녁에는 커피를 마시지 않지만, 목요일이니(내일 하루만 버티면 주말이니) 나도 한 잔 마시겠다고 했다.
아내가 사다 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일기를 쓰다가 갑자기 아이쇼핑을 했다. 종종 축구 관련 제품을 사는 사이트에서 초특급 할인을 시작했다. 이번 달에 아내가 용돈에 보너스를 얹어서 줬다는 걸 생각하며, 뭐라도 하나 사 볼까 하며 기웃거렸다.
“여보. 뭐해?”
“나? 쇼핑중이야”
아내는 휴대폰 보고 있으면 거의 세 가지다. 하나는 친한 친구랑 연락. 또 하나는 그냥 웹서핑. 나머지 하나는 쇼핑. 물론 실제 구매로 이어지는 건 엄청 많지도 않고 주로 애들 옷이다. 그에 비해 나는 쇼핑이라는 걸 거의 하지 않는다. 그러니 아내 귀에 굉장히 신기하게 들렸나 보다.
“뭐? 뭐 사려고?”
“아, 그냥 축구 바지나 하나 살까 싶어서. 세일한다고 하길래”
“아, 그래? 하나 사. 내가 사 줄게”
“진짜? 왜?”
“그냥. 하나 골라”
“진짜? 대박. 오예. 바로 사야지”
아내를 볼 때마다 ‘선녀와 나무꾼’, ‘날개 없는 천사’ 따위의 설화가 그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이야기’가 아닌 ‘실제’라는 걸 확인한다. 2021년에도 선녀와 천사가 존재한다. 우리 집에.
사이트가 마비될 정도로 할인율이 높은 행사였다. 사이트 폭주의 험난한 과정을 뚫고 주문에 성공했다. 아내가 사 주는 바지 하나, 내가 사는 티 하나.
“여보. 사이즈가 잘 맞아야 할 텐데”
“그러게. 잘 맞으면 좋겠다”
“아니다. 지금 내 몸이 그런 몸이야. 어떤 옷도 잘 안 맞을 몸”
그래도 공짜 옷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