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듯 평범하지 않은 어린이날

21.05.05(수)

by 어깨아빠

지난 주말부터 해 주기로 약속하고 못 해 준 프렌치토스트가 오늘의 아침이었다. 그게 뭐라고 소윤이와 시윤이는 아침부터 좋다고 방방 뛰었다. 시간 단축에 욕심을 내서 프라이팬을 세 개나 가동했더니 세밀한 불 조절과 뒤집기에 실패했는지 약간 탔다. 너무 많이 탄 부분은 잘라 내거나 내가 먹고 아내와 아이들에게는 ‘약간 탄 듯도 하지만 먹기 괜찮은’ 것만 줬다.


엄마와 언니, 오빠가 뭔가 맛있게 먹는 걸 보자 서윤이는 흥분했다. 크게 소리를 내며 엉겨 붙었다. 이제 완전 유아식에서는 벗어났지만 아무리 그래도 기름과 설탕에 풍덩 빠진 빵까지 주지는 않는다. 모르는 척 외면하기에는 서윤이의 난동이 너무 심해졌다. 이럴 때는 아무리 안아줘도 안 된다. 하긴, 기분이 좋을 때도 내가 안으면 갑자기 울 때도 많으니까.


“서윤아. 알았어, 알았어. 이거 먹을까?”


맨 식빵을 집어 들자 서윤이는 괴성을 멈추고 식빵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서윤이의 눈빛에 식빵이 익을 것 같았다. 토끼 소파(소윤이가 어릴 때 형님이 사 준 낡디낡은 소파. 요즘은 서윤이가 자기 것처럼 쓴다)에 앉혀 놓으니 순한 양이 되었다. 눈은 오로지 식빵에 고정하고. 식빵 한 조각을 모두 먹을 때까지 서윤이는 자리를 뜨지 않았다. 자리를 뜨기는커녕 자기 몫을 다 먹고 나니 또 달라고 떼쓰며 울었다.


아내가 나에게 청소기를 돌려 달라고 했다. 원래 청소에는 흥미가 없는 사람이지만 아주 가끔씩 열심을 내기도 한다. 물론 열정과 결과가 항상 비례하는 건 아니다. 열정은 있으되 결과는 허술할 때가 훨씬 많다. 뒤집어엎기만 하고 세심한 마무리는 안 한달까. 아무튼 오늘도 갑자기 열심을 내게 됐다. 작은방은 감히 함부로 건드리기 어려운 상태라 어쩔 수 없이 드러난 곳만 하고, 거실은 나름대로 열심히 했다. 바닥을 모두 덮은 매트까지 들춰가며 구석구석.


“여보. 안방은 어떻게 해?”

“안방은 이불 다 털고 해 보통. 놔 둬. 나중에 내가 할게”


아내 말대로 그냥 둘까 하다가 너무 한 게 없는 것 같아서 안방도 하기로 했다. 무지개떡처럼 겹겹이 쌓인 이불을 하나씩 걷아내고 베란다에서 털었다. 그러다 보니 소윤이와 시윤이가 여기저기 처박아 둔 인형들이 자태를 드러냈다. 아마 거기 있었는지도 몰랐을 거다. 이때가 기회다 싶어서 인형 대학살을 시작했다.


“너네 딱 하나씩만 고르고 나머지는 다 버릴 거야”


때아닌 날벼락에 소윤이와 시윤이는 크게 당황했다. 선언만 있었을 때는 실감하지 못하다가 거실 바닥에 버릴 인형들이 하나씩 던져지기 시작하자 급격히 표정이 굳었다. 소윤이의 오랜 애착 인형이었던 토야(토끼 인형)와 아내와 연애를 할 때 선물했던, 애들보다도 연수가 긴 곰돌아지(곰 인형)만 살아남았다. 토야는 소윤이가, 곰돌아지는 시윤이가 골랐다. 소윤이랑 처음 야구장에 가서 사 줬던 엘지트윈스 키티 인형도 선택받았다. 나머지 인형은 전부 버리겠다고 하자 드디어 소윤이와 시윤이의 울음이 터졌다. 일단 각자의 사연을 들어보기로 했다.


시윤이는 이케아에서 산 강아지 인형의 구원을 간청했다. 생각해 보니 온전히 시윤이 것으로 사 준 유일한 인형이었고 시윤이의 실질적인 애착 인형이었다. 정상참작이 됐다. 생명이 연장됐다. 소윤이도 강아지 인형을 택했다(같은 인형이 두 개다). 강아지 인형을 사러 간 날의 기억이 너무 좋았다고 했다. 마찬가지로 다시 생명을 얻었다. 그래도 선택받지 못한 인형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여전히 슬픔에 잠겨 있었다.


오늘은 어린이날이었다. 어린이날에 갑자기 인형 대학살을 거행했고, 두 명의 어린이는 큰 폭격을 맞았다. 조금 미안하긴 했지만 남은 시간이 많았으니 그때 더 즐겁게 해 주면 된다고 생각했다. 인형과 이별하는 슬픔이 그리 오래가지 않을 거라는 생각도 했다. 아내는 이 상황이 너무 재밌었는지 막 웃었다. 소윤이와 시윤이도 웃는 엄마를 보니 괜히 웃음이 나오는지 피식피식거렸지만 그냥 막 웃기에는 민망했는지 애써 슬픔을 잡으려고 했다. 내 예상대로 그렇게 오래가지 않았다.


아내와 나는 오전이 다 지나도록 어린이날의 영원한 고민을 해결하지 못했다.


‘사람도 없고 한가하면서 재미있고 아이들도 좋아할 만한 곳’


을 찾고 싶었지만, 그런 곳은 없었다. 오히려 어딜 가도 모두 반대의 상황이 펼쳐질 가능성이 농후했다. 멀리 나가는 건 차도 막히고 웬만한 곳은 사람도 많을 테니 그냥 가까운 공원(사실 공원도 아니다. 그냥 넓게 잘 조성되고 가꿔진 광장이랄까)에 가기로 했다. 날씨가 너무 좋아서 어디를 가도 좋을 것 같긴 했다. 소윤이와 시윤이도 가서 자전거도 타고 킥보드도 타겠다며 좋아했다. 애들은 괜찮았을 텐데 내가 뭔가 아쉬웠다. 그래도 어린이날인데 조금이나마 특별한 무언가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윤아, 시윤아. 혹시 버스랑 지하철 타고 나가는 건 어때?”

“어, 좋아여”

“대신 거기는 자전거 타거나 킥보드 타거나 그러지는 못 해. 그냥 바람 쐬고 앉아서 쉬고 그러는 거야”

“좋아여”

“너네가 지하철이랑 버스 타고 싶다고 해서. 공원에 가는 것보다 그게 더 좋겠어?”

“네, 좋아여”


소윤이와 시윤이 모두 대중교통 나들이를 더 좋아했다. 버스랑 지하철을 타는 것 자체가 아이들에게는 특별한 일이었나 보다. 자전거와 킥보드를 포기하다니. 가는 곳이 정확히 알지도 못했는데 선뜻 새로운 제안을 받아들였다. 사실 아내와 나도 구체적인 목적지는 정하지 않았다. 애들이랑 대중교통 타고 나가면 주로 가는, 안국역 근처에 일단 가기로 했다.


서윤이를 데리고 대중교통을 탄 건 처음이었다. 서윤이는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다 유모차에 앉아 잠들었다. 다행히 사람이 없어서 유모차를 가지고 타고 내리는 게 어렵지는 않았다. 버스에서 내려 지하철역으로 가다가 갑작스럽게 점심을 먹기로 했다. 서윤이가 자고 있는 게 가장 큰 이유였다. 눈에 보이는 여러 식당 중에서 그나마 메뉴가 가장 다양한 곳을 골라서 들어갔다. 순댓국 가게였다. 아내는 육개장, 나는 순댓국, 애들은 보쌈 정식을 시켰다. 대낮부터 술에 흥건히 젖으신 분들도 계셨다.


“여보. 어린이날 점심에 순댓국 집이라니”


아침부터 어린이날과는 다소 어긋난 행보의 연속이라 내심 미안했지만, 소윤이와 시윤이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나들이를 간다는 기쁨에 이미 특별한 하루였다. 소박한 녀석들. 서윤이는 밥을 거의 다 먹었을 때쯤 깼다. 덕분에 아주 편안한 식사를 했다.


잠에서 깬 서윤이를 보고 옆 자리에 앉으신 어르신들이 말을 거셨다. 서윤이는 성별 공지용 헤어 밴드를 착용하고 있었다.


“얘는 딸이에요?”

“아, 네 딸이에요”

“어쩐지 눈빛이 딸이더라”


난 느꼈다. 딸이냐고 묻는 어르신의 말에 묻은 ‘의심’을. 서윤이가 착용한 헤어 밴드는 성별 공지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걸 깨달았다. 딸이라는 것을 밝혔을 때 의심을 거두는 걸 도와주는 보조 수단에 불과하다는걸.


지하철에도 사람이 엄청 많지는 않았다. 앉을 자리는 없었다. 대신 어떤 분이 소윤이와 시윤이를 위해 자리를 양보해 주셨다. 서윤이는 아내가 아기띠로 안고 있어서 조용했다.


“아빠. 근데 우리 어디를 가는 거에여?”

“글쎄. 엄마, 아빠도 딱 어디를 정한 건 아니야. 그냥 가서 바람도 쐬고 그러면 되지 뭐”

“산책도 하고 앉을 데가 있으면 앉아서 쉬기도 하고?”

“어, 맞아”


목적지를 정하지 않는 게 충분히 용인될 만한, 어디를 가도 기분이 좋을 화창하디 화창한 날씨였다. 5월의 봄날을 떠올리면 생각나는 딱 그런 날씨였다. 그 동네에 갈 때마다 아내랑 연애하던 시절이 생각난다. 애들도 아마 여러 번 들었을 거다.


“소윤아, 시윤아. 엄마랑 아빠가 여기서 데이트 진짜 많이 했는데”


생각보다 사람이 많지는 않았다. 애 둘과 함께 유모차까지 끌고 걷는 게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다. 그래도 어쨌든 아이들을 위한 장소라고 보기에는 어려우니 내심 신경이 쓰이기는 했다. 소윤이한테 슬쩍 물어봤다.


“소윤아. 그냥 이렇게 걷기만 하는 건데도 괜찮아?”

“네, 좋아여”

“재미없지 않아?”

“그냥 엄마랑 아빠랑 이렇게 나와서 걷는 것도 좋져”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그 일대를 조금 걸어 다녔다. 아내는 분주하게(아내의 머릿속을 들여다보지는 않았지만 그랬을 것 같다) 빵 가게 동선을 짰다. 아내의 심장을 뒤흔들, 유명한 빵 가게가 많았다. 아내는 집에 가는 길에 순회를 하기로 정했는지 일단 파악만 했다. 그렇게 동네 구경을 조금 하다가 정독 도서관으로 갔다. 앉을 자리(야외)는 많았고,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애들이랑 쉬기에 딱 좋았다. 아담한 잔디밭도 있었다.


서윤이는 아내의 품에서 또 잠이 들었다. 소윤이와 시윤이가 먹을 간식을 좀 사려고 나랑 아이들은 다시 거리로 나왔다. 뭘 살까 고민을 하며 걷다가 아이스크림 가게를 발견했다.


“아, 보니까 아이스크림 먹고 싶다”

“그래? 그럼 아이스크림 먹어”

“진짜여?”

“어, 어린이날인데 뭐. 저걸로 정할래?”

“네, 좋아여”


세 가지 맛을 골랐다. 소윤이는 엄마가 좋아하는 맛 하나, 자기가 좋아하는 맛 하나. 시윤이도 자기가 좋아하는 맛 하나. 다시 도서관에 갔을 때도 서윤이는 여전히 자고 있었다. 아내는 나에게 통이 크다고 했다. 아내의 평이 무색하게, 아이스크림은 게 눈 감추듯 사라졌다. 아내와 나는 별로 먹지도 않았다.


그 뒤로는 그야말로 일광욕이었다. 앉아서 쉬기도 하고, 잔디밭을 뛰기도 하고,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도 하고. 서윤이도 깨고 나서는 잔디밭을 아주 조금 걸었다. 아직 바깥에서 걷는 건 겁이 나는지 집에서처럼 걸으려고 하지는 않았다. 아무것도 가지고 간 것 없이 몸만 갔는데, 꽤 오랜 시간을 재밌게 보냈다. 소윤이와 시윤이도 즐거워 보였다. 직접 물어보기도 했다.


“아빠, 재밌어여. 날씨도 좋고. 공원은 나중에 언제든지 갈 수 있잖아여”


실컷 놀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자리를 정리했다. 시윤이가 물었다.


“아빠. 갈 때도 지하철 타는 거에여?”

“그렇지”

“왜여어?”

“차를 두고 왔잖아”

“하아. 힘들다아”


좀 힘들긴 했나 보다. 시윤이의 그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 알 것 같았다.


아내는 본격적으로 빵 가게 순회를 시작하려고 했다. 아내에게 모든 걸 일임하고 아내가 이끄는 대로 따라다니려고 했다. 일단 첫 번째 빵 가게에 들러서 빵을 샀다. 난 들어가지도 않았다. 밖에서 서윤이랑 기다렸다. 그다음 빵 가게를 들어갔는데 아내가 그냥 돌아 나왔다.


“왜?”

“줄이 엄청 길어”

“무슨 줄? 우리는 앉아서 먹는 것도 아니잖아”

“계산 줄이 엄청 길어”

“아, 그래?”


그러고 보니 처음 왔을 때만 해도 사람이 별로 없었는데 거리에 사람이 많아진 게 보였다. 또 다른 빵 가게로 가는 길에 사람들이 거리까지 나와 길게 줄을 선 게 보였다. 속으로


‘와 저긴 뭐지. 맛집이 있나’


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아내가 가려고 했던 빵 가게의 줄이었다.


“헐, 대박”

“아니 무슨 줄이 저렇게 길어. 그냥 사서 나오는 건데”


거기는 앉아서 먹을 공간도 없는 곳이었는데 줄이 그렇게 길었다. 아내는 빠르게 포기했다.


“여보. 그냥 커피나 한 잔 더 사서 가자”

“그래”


기다려 볼까도 싶었지만 빵을 사서 나오는 어떤 사람이 하는 말을 듣고 완전히 마음을 접었다.


“와, 40분 걸렸네”


아내는 아쉬워했다. 첫 빵 가게에 들렀을 때 ‘앞으로 들러야 할 빵집이 많으니 소소하게 사자’라고 생각했다고 했다. 실제로 몇 개 안 샀다. 그게 아내의 유일한 빵이 될 줄이야. 어린이날에 사리사욕 채우려고 해서 벌받았나.


저녁은 동네에 가서 먹기로 했다. 그게 마음이 편할 거 같았다. 카레를 먹기로 했다. 점심과는 다르게 서윤이가 무지 활발했다. 이것저것 줘도 성에 차지 않는지 금방 목소리를 높이며 언제라도 뒤엎겠다는 태도였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다행히 애초에 마음을 비우고 들어가서 크게 타격을 받지는 않았다. 다 먹고 나오며 아내가 나에게 물었다.


“여보. 괜찮아? 배부르게 먹었어?”

“나? 어, 잘 먹었어”

“맛있었어? 제대로 못 먹은 거 아니야?”

“여보. 난 아무런 의지가 없었어. 맛있게 먹을 의지도, 배부르고 싶은 의지도”


소윤이와 시윤이는 그냥 집에 들어가는 게 아쉽다고 했다. 잠시 마트에 들렀다. 아내는 소소하게 장을 보고 소윤이와 시윤이는 구경하고. 아주 짧은 시간이었다. 마트 입구에 홈런볼을 묶어서 판매하고 있었다.


“아, 보니까 먹고 싶다”

“그래? 그럼 사 줄게”


“진짜여? 왜여?”

“어린이날이니까. 아빠가 사 줄게. 엄마랑 가서 사 와. 대신 먹는 건 내일”


집에 돌아와서는 부지런히 씻기고 잘 준비를 했다. 둘 다 엄청 피곤해 했다. 차를 타고 다니는 거랑은 차원이 다른 피로였을 거다. 물론 아내와 나도 마찬가지였고. 자기 전에 읽을 책을 고르라고 했더니, 읽어주는 책 중에 가장 긴 걸 골라왔다. 읽는 데만 15분 정도 걸리는 책이었다.


“소윤아, 에이. 그건 너무 길다”

“아, 그래여? 아쉽다”

“아, 아니다. 읽어 줄게. 읽어 줄게. 어린이날이니까”

“아빠는 뭐 다 어린이날이라고 하면서 해 주네?”


뭐 번지르르하게 해 주지는 않았지만,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평소보다는 더 수용하려고 노력했다. 소윤이와 시윤이도 만족스러운 하루였던 것 같고. 아침의 인형 대학살은 역시나 까맣게 잊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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