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 빠진 독

21.05.04(화)

by 어깨아빠

아침에 아내에게 장문의 카톡을 보냈다. 뭐랄까, 충고나 조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넋두리도 아닌, 남편으로서의 솔직한 소회이자 아내를 격려하고 응원하는 내용이었다. 아내는 고맙다면서 오늘 하루 잘 살아보겠다고 했다. 그러고 나서 한 시간쯤 뒤에는


“같이 한참 기도했네. 나만 울었지만”


이라고 카톡이 왔다. 또 뭔가 힘든 일이 생긴 건가 싶어서 물었는데 그건 아니고, 그냥 애들이랑 같이 예배드리면서 기도했던 것 같다. 하루 단위로 쪼갤 것도 없다. 아침에는 웃다가 점심에는 울다가 저녁에는 또 웃다가. 이걸 수도 없이 반복하는 게 아이들과 함께 보내는 일상이다. 그런 시간이 켜켜이 쌓여서 결국 멋들어진 추억이 되는 거고.


하루 종일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순간순간 빗줄기가 거세지기도 했다. 이런 날씨에 아내는 커피를 사러 나왔다며 아파트 복도를 걷고 있는 세 남매의 사진을 보냈다.


“비 안 와?”

“비를 뚫고!”


아이들에게는 외출인 듯 외출 아닌 외출이었다. 아마 아내가 커피 사고 또 어딘가를 들러서 뭘 사는 동안 차에서 대기할 거라고 생각했다. 퇴근해서 물어보니 역시나 그랬다고 했다.


요즘 서윤이는 완전한 걷는 인간이 되었다. 이제 ‘걷기’를 주 이동 수단으로 삼는다. 집 밖에서도 제법 잘 걷는다. 현관문을 열고 나가서 엘리베이터까지 가는 동안 언니와 오빠의 손을 꼭 잡고 걷는다. 집 밖은 아직 두려운지 손을 놓으면 그 자리에 멈춰 선다. 그러고는 소리를 지른다.


“앙앙. 에에. 이이”


뭐 대충 언니와 오빠에게 얼른 손을 잡으라고 얘기하는 거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서윤이가 걷는 게 너무 신기한지 조금도 귀찮아하지 않고 손을 잡아준다. 가만 보면 소윤이와 시윤이도 나랑 비슷한 심정인 듯하다. 웬만해서는 엄마에게서 떨어지지 않는 서윤이가 뭔가 자기들에게 의지하는 것 자체가 너무 좋은가 보다. 나도 그럴 때가 있다. 접착제 혹은 자석처럼 붙어 있어야 하는 아내의 괴로움은 일단 제쳐 두고, 그냥 서윤이가 나를 찾아주는 게 그렇게 좋다 못해 고마울 때가 있다. 소윤이와 시윤이도 대략 이런 느낌인 것 같다.


퇴근했을 때도 딱 현관문에서 신발 벗을 때까지는 엄청 웃어주는데 막상 안아준다고 하면 오지는 않는다. 물론 올 때도 있지만, 딱 거기까지다. 안기자마자 바로 나가려고 한다. 서윤이가 내 품에 더 머무르려고 하는 건, 나를 이동 수단으로 생각할 때다. 닿을 수 없는 곳에 나를 이용해 닿으려고 하거나, 엄마에게 안기는 중간 정거장으로 여기거나. 소윤이를 보며 희망을 가지고 있다. 7년 정도 키우면 아빠의 지분율도 꽤 높아진다는걸, 소윤이를 통해 경험했다. 언젠가 너도 언니처럼 아빠 냄새를 그리워하는 인간으로 만들 테다.


아내와 아이들과 집에서 저녁을 먹는 게 무척 오랜만이었다. 계속 저녁에 무슨 일이 있거나 나가서 먹었거나 그랬다.


“소윤아, 시윤아. 역시 엄마가 해 준 밥이 제일 맛있다. 그치?”

“맞아여”

“아, 너무 맛있다. 너무”

“엄마는 진짜 요리사라니까여”


반찬은 여러 개가 있었다. 김치찌개와 계란말이, 그 외 기본 반찬들. 아내는 ‘나도 많이 먹으라고’ 계란말이도 많이 했다고 했다. 아내는 늘, 나의 절제하는 젓가락질을 신경 쓴다. 남편이 절제하지 않고 양껏 먹기를 누구보다 바란다. 사실 내가 좀 많이 먹기는 한다. 계란말이도 내가 참 좋아하는 반찬인데 어렸을 때 엄마가 일을 갔다 오면 저녁에 주로 이런 얘기를 많이 했다.


“아우 야. 이렇게 많이 먹었어?”


아무튼 오늘도 양껏 먹지는 않았지만 뭐 상관없다. 구멍 뚫린 항아리에 물을 붓는 심정으로 남편의 양을 채우기 위해 애쓰는 아내도 있고, 엄마나 아빠가 자기들 때문에 안 먹는 걸 알고 한사코 계란말이를 양보하는 아들과 딸이 있으니까. 그리고 김치찌개는 원 없이 먹었다. 애들이 못 먹으니까.


저녁에는 목장 모임이 있었다. 그래도 오늘은 육아 퇴근을 위한 진행이 빨라서 목장 모임이 시작되기 전에 애들도 누웠다. 나는 나대로 목장 모임이었고, 아내는 아내대로 성경 공부가 있다고 했다. 오늘부터 시작하는 거라고 했다. 애들 재우러 들어간 아내가 시작 시간이 되도록 나오지 않길래 카톡을 보내봤는데 자는 건 아니었다.


잠시 후 아내가 나왔고 아내는 작은방으로 들어갔다. 시작한 지 30분쯤 지났을 때 아내가 나에게 카톡을 보냈다.


“어떡하지. 강의 너무 좋은데 졸 거 같네. 하품 백 번 나옴”


졸음이란 게 그런 거다. 난 신입사원 연수 받으면서,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위세가 높은 간부님들 앞에서도 졸았다. 나라고 뭐 졸고 싶어서 그랬겠나. 눈이 감기는 건 무슨 수를 써도 안 되는 거다. 참지 못하는 일이니 졸음 쉼터까지 만들어 주면서 쉬고 가라고 하는 게 졸음인데, 가만히 앉아서 그걸 참는 게 이상한 거지. 졸음은 참는 게 아니다. 타고 나는 사람이 있고 아닌 사람이 있는 거지. 아무튼 내 목장 모임이 먼저 끝났고 아내의 성경 공부는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으려고 방에 들어갔는데 아내가 손을 모으고 기도를 하고 있었다. 왠지 모르겠는데 그 모습을 보니 웃음이 터져 나왔다. 뭐랄까, 조금 가증스러웠…


내일이 휴일이니 영화라도 한 편 볼까 싶었는데 뭐 하는 것도 없이 시간이 후다닥 지나버렸다. 영화는 보지 못했고, 대신 과자를 먹었다.


“여보. 내일 우리 어디 가지? 뭐 하지?”

“그러게”


이제 뭘 좀 아는 어린이 두 명을 보유한 부모의 고민을 나누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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