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2.05(수)
슈퍼맨이 돌아오기는 했는데 엄청 늦게 돌아왔다. 저녁에 수요축구팀 회식이 있는 데다가 뭐 살 것도 있어서 퇴근 후 집에 들르지 않고 쇼핑몰에 들렀다가 바로 회식 장소로 가기로 했다.
저녁에 약속이 있기도 하고 그렇지 않더라도 오늘은 도저히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출퇴근을 할 수가 없어서 차를 가지고 출근했다.
"아빠. 어제오늘 일어나면 바로 책 두 권 읽어주기로 했잖아여"
"아. 맞다. 그래 아빠가 읽어주고 출근할게"
자신에게 유익한(?) 약속은 깨알 같이 기억하는 소윤이다. 오전 10시쯤 아내가 사진을 하나 보내왔다. 냄비에 담긴 라면 사진이었는데 아내가 함께 보낸 카톡이 모든 걸 설명해주고 있었다.
[뭔가 처참한 기분이다]
라면만 놓고 봐도 얼핏 보면 먹다 남은 건가 버리려고 모아둔 건가 싶을 정도로 맛이 없어 보이는 모습이고 식탁 위에 놓인 냄비 주변에는 온갖 잡동사니들이 무질서하게 널려 있었다. 소윤이 칫솔, 택배 봉지, 바나나 껍질, 향초, 부모교육 강의자료. 압권은 먹다 남은 떡볶이 용기에 던져진 타이레놀 상자였다. 도무지 하나의 주제로 묶으려고 해도 묶을 수 없는 조합이었다. 사진에는 없었지만 아내의 모습도 눈에 선했다. 그나마도 애들 뒤치다꺼리하느라 허겁지겁 먹다가 멈추다가를 반복할 게 뻔했다. 아니나 다를까 둘이 뽀로로 카트 때문에 싸우고 난리라는 현장 상황이 전해졌다. 그러고 나서 한두 시간쯤 뒤에 또 한 장의 사진이 도착했다. 시윤이가 아내의 무릎 위에 앉아 잠들어 있는 사진이었다.
[성경 읽기 할 때 안고 했는데 잠들었음]
앞으로 재울 때 성경책을 읽어줘야 하나 생각했지만 동화책도 버거운데 성경책을 읽어준다면 애들보다 내가 더 빨리 잠들지 않을까 싶었다. 언젠가는 성경책을 읽어주며 잠을 청하는 기적이 일어나기를.
그저께, 어저께 내가 고됐던 만큼 그 몫을 고스란히 짊어졌던 아내도 많이 소진된 상태였기 때문에 걱정이 컸다.
"여보. 괜찮아?"
"어. 뭐 기왕 힘든 거 오늘까지 힘들지 뭐"
"회식은 안 가도 돼"
"에이. 아니야. 자주 하는 것도 아닌데"
"그래도. 힘들까 봐"
"힘들어도 괜찮아"
아내가 결혼하고, 애들 낳고 걸린 큰 병이 하나 있는데 이른바 [괜찮아병]이다.
"여보. 이거 유통기한 많이 지났는데?"
"괜찮아. 안 깐 건 괜찮아"
"여보. 이거 좀 상한 건가?"
"괜찮아. 그 부분만 잘라 내면 돼"
"여보. 괜찮아? 힘들지 않겠어?"
"괜찮아"
"여보. 언제든 연락해"
"괜찮아"
저녁 시간 다 되었을 무렵 소윤이의 반복되는 채근으로 장모님께서 집에 오셨다고 했다. 밖에 나가서 저녁을 먹는다고 했는데 나중에 들어보니 강시윤 덕분에 혼돈의 시간이 되었다고 했다. 그 시간에는 아무리 장모님이라도 이미 아내의 에너지가 많이 소모된 시간이라 아내가 큰 힘을 얻지는 못하는 것 같다. 거기에다 오늘도 시윤이가 질척거린 덕분에 거의 9시가 다 돼서야 방에서 나왔다고 했다.
회식을 마치고 아내가 주문한 카라멜 마끼아또를 한 잔 사서 집에 갔다. 내일 퇴근하고 나면 울산에 가야 했고 원래는 출근하는 길에 아내도 함께 파주 처갓댁에 가서 기다리다가 퇴근 시간에 맞춰 사무실에 나오기로 했었다.
하지만 3박 4일의 여정을 위한 짐 싸기를 비롯해 여러 준비가 미비했고 아침에 출발하기에는 여러모로 힘겨웠다. 난 아침에 대중교통으로 출근하고 아내는 준비를 마치고 오후쯤 파주에 오는 것으로 계획을 변경했다. 일단 짐 싸기의 압박에서 벗어난 아내는 폭풍 설거지와 집 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아내의 습성 중 하나인지 대부분의 가정 주부의 공통된 행태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아내는 장시간 집을 비울 때 특히 더 집을 깨끗이 치운다. 오늘도 설거지와 주방 청소를 비롯해 재활용 쓰레기, 일반 쓰레기, 음식물 쓰레기 등을 열심히 처리했다. 버려야 하는 쓰레기들은 현관 앞에 줄지어 서서 나를 압박했다.
"여보. 재활용이랑 음식물은 내가 버릴 게"
어차피 할 거면 시키기 전에 자진해서 하는 게 기분도 내고 좋을 때가 있다. 아내는 울산에서 신세를 지게 될 한나네랑 승아네 갖다 줄 반찬을 만든다고 아주 늦은 시간까지 가사 노동의 혼을 불태웠다.
"여보. 먼저 잘 게"
본인이 하기로 마음먹은 모든 일을 끝낸 뒤 아내는 장렬히 전사했다. 정말 월, 화, 수 모든 진을 빼고 껍데기까지 불태운 듯한 모습이었다. 원래 자기 전에 각종 쓰레기들을 버렸어야 했는데 게으름 피우다 시간이 지체되었고 막을 수 없는 졸음이 쏟아져서 그대로 눕고 말았다.
'아. 내일 출근하는 길에 버려야겠다. 버스 타야 되는데 엄청 귀찮겠네'
라고 생각하면서도 오늘 일을 내일로 미루는 어리석은 스스로를 또 발견했다. 자면서 뇌에게 계속 암시를 걸었다.
'아무리 귀찮아도 내일 아침에 저 쓰레기 친구들을 외면하면 절대 안 된다. 말은 안 해도 아내가 엄청난 분노를 느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