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7.14(수)
“시윤인 진짜 어이없고 귀엽네”
아내가 오늘 시윤이에 관해 얘기한 첫 카톡이었다. 보통은 시윤이 때문에 너무 힘들다거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내용인데, 마지막 ‘귀엽네’라는 구절에 한결 마음이 놓였다.
누나랑 놀던 시윤이에게 이제 정리하라고 했더니 또 버티면서 짜증을 냈다고 했다. 요즘 이런 식이다. 기분 좋게 잘 놀다가도 아내가 뭘 하라고 하거나 누나랑 갈등이 생기면(사실 갈등도 아니고 순 억지일 때가 더 많다고 했다) 갑자기 틀어지는 거다. 아내도 이골이 났다. 지긋지긋해서 다 때려치우고 싶은 걸 꾹 참고 시윤이를 불러서 차분하게 이야기를 했다고 했다. 아내는 지난번 성품 훈련 때 배웠던 내용을 다시 떠올려 주며 최대한 인격적으로 접근하기 위해 노력했다. 시윤이는 엄마의 노력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자기는 하나도 기억이 안 나고 다 모른다는 태도로 일관했다. 그래도 아내는 희망을 가지고 열변을 토했다. 하기 싫어도 힘을 다해서 해야 하는 일이 있고 때가 있는 거라고. 시윤이가 두 귀를 쫑긋 세우고 들었을 리 만무하다. 아내가 얼마나 처참한 상황 속에서 꾸역꾸역 노력했는지 상상이 됐다.
한결같이 자기는 아무것도 모르고 기억이 안 난다던 시윤이가 갑자기 하나 기억이 났다고 하길래, 아내는 얼른 말해 보라고 했다.
“하나 생각난 게 있어여어. 너무 힘들 때는 엄마나 아빠한테 말해서 쉴 수 있다고 한 거”
아내가 유쾌하게 전해줘서 그렇지 사실 마찬가지로 엄청 힘든 시간이었을 거다. 그래도 시윤이의 귀여운 선택적 기억 상실 덕분에 아내의 마음이 조금 더 말랑말랑하지 않았을까 싶다. 아, 이렇게만 써 놓으면 또 오해할지도 모르지. 아내는 요새 시윤이랑 그렇게 힘든 시간을 보내고도 그 순간만 지나면 또 시윤이를 얼마나 예뻐하는지 모른다. 잠든 시윤이를 보고도 마찬가지고. 아마 여러 감정이 교차하지 않을까.
퇴근하고 나서는 산책을 나가기로 했다. 소윤이와 시윤이가 그저께부터 단 한 발자국도 밖에 나가지 못한 게 안쓰러워서 계획한 일이었다. 퇴근해서 저녁 먹고 나가면 너무 늦어지니 애들은 내가 퇴근하기 전에 밥을 먹이기로 했다. 산책이라고 해 봐야 공원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산책로라도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차를 피해 가며 동네 상가 한 바퀴 도는 것뿐이다.
퇴근하면서도 집안의 동태를 살피느라 촉각을 곤두세웠다. 내 느낌에 시윤이가 자주 뒤집어지는 또 하나의 경우가 바로 옷을 갈아입을 때였다. 혹시라도 밤 산책 준비를 하면서 불의의 시간이 벌어지지는 않았는지 매우 신경이 쓰였다.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다. 소윤이와 시윤이, 서윤이는 저녁으로 삼계탕을 먹었다. 퇴근했을 때는 다 먹고 나갈 준비를 하는 중이었다.
해가 진 뒤였지만 날은 무척 더웠다. 문을 열고 나서는 순간 더운 기운이 훅하고 들어왔다. 소윤이와 시윤이도 문을 열자마자
“와, 덥다”
라며 흠칫 놀라는 모습이었다. 덥고 졸리기까지 해서 힘들었을 테지만 밤 산책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이틀 동안 집에만 있었으니 아무리 덥고 졸리다고 해도 얼마나 소중한 외출이었을까. 문제는 ‘산책’이지만 산책할 곳이 없다는 거였다. 산책의 재미와 기분을 더하기 위해 꽈배기랑 핫도그를 샀다. 아내는 스타벅스에 가서 라떼도 샀다. 그런 가게들을 들르기 위해 걷는 게 산책이었다. 상가 광장에 앉아서 꽈배기와 핫도그를 먹었다. 서윤이에게는 사과칩을 줬는데 의외로 언니와 오빠가 먹는 걸 탐내지 않았다.
한 시간 반 정도 밖에 있었나 보다. 소윤이와 시윤이도 너무 덥고 힘드니까 집에 들어가자는 말에 별로 토를 달지 못했다. 짧은 외출이자 산책이었지만 나름 즐거운 시간이었다.
“여보. 우리 오늘은 애들이랑 밤에 산책했으니까 내일은 일찍 재우자”
“그래”
잠깐 나갔다 왔지만 체감상으로는 퇴근 시간이 몇 시간 지연된 느낌이었다. 사랑과 행복은 거저 얻는 게 아니다. 시간이든 돈이든 마음이든 아무튼 뭐든 들어가야 한다.
사실 오늘은 아내와 내가 만난 지 12년째 되는 날이다. 소개팅을 하고 몇 번의 만남을 더 가지다가 정식으로 ‘1일’을 세기로 한 날. 비가 억수같이 내리던 날, 아내와 나는 신촌에서 만났다. ‘1일’을 축하하는 의미를 담아 직접 만든 케이크(라떼는 이런 게 유행이었다)와 꽃을 아내에게 선물했다. 마침 구글 포토에서 10년 전 오늘부터 차례대로 사진을 보여줬다. 거기 아내와 나는 없었다. 어디선가 본 듯하지만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강지훈’과 ‘이가영’만 있었다.
12주년을 핑계 삼아 치킨을 한 마리 시켰다. 저녁을 굶은 탓에 12주년이고 뭐고 허겁지겁 먹어치웠다. 배가 좀 차고 나니 정신이 들었다. 그제서야 12년의 추억도 다시 꺼내 이야기하고, 오늘도 여전했던 시윤이의 만행(?)도 듣고. 마지막으로 어디에도 공개하지 못할 소장용 사진을 몇 장 남기는 것으로 조촐한 12주년 파티를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