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몸이 가능한 그대여, 떠나라

21.07.24(토)

by 어깨아빠

오전에 미용실을 예약해 놨다. 시윤이랑 나랑 머리를 하기로 했는데 사실 이것 때문에 겸사겸사 아내가 선물로 가게 된 거다. 평일 저녁에 아내 혼자 파주에 다녀오는 걸로 처음 시작이 됐다가 토요일에 어차피 그쪽으로 가야 하니 아내는 먼저 가서 자고, 우리는 오늘 오전에 넘어가고.


미용실 예약 시간에 늦으면 안 되니까 알람을 맞추고 잤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아침잠을 잃은 인간 알람이 세 개 아니 세 명이나 있었으니까.


“아빠. 왜 이렇게 안 일어나여”

“아빠 알람 8시에 맞췄어. 그러니까 그때 일어나야지”


일어나자마자 주방으로 갔다. 계란밥. 육아인의 피난처, 육아인의 구원, 육아인의 생명줄인 계란밥. 곧 시들시들해질 것 같은 방울토마토가 옆에 있길래 그것도 익혀서 같이 비벼줬다. 아주 조금 마음이 가벼워졌다. 방울토마토는 완전식품이니까.


“아빠. 저는 방울토마토 빼주세여”

“소윤이도 건강을 생각해서 조금은 먹어”


건강을 생각했다면 계란밥이 너무 과한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0.3초 정도 머리를 스쳤다. 난 커피만 마시려다가 배가 너무 고파서 냉동실에 있던 식빵 두 장을 데워 먹었다. 전자레인지에서 꺼낸 게 식빵이라는 걸 인지한 순간, 서윤이가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자기 주는 줄 알았나 보다. 소윤이는 그걸 보고 막 웃었다.


“서윤아. 니꺼 아닌데. 이거 아빠꺼야”

“으으. 으으”

“아니야. 너는 밥 먹어. 이건 아빠 아침”

“으아아아아아아아앙”


정말 실망한 표정이었다. 두 돌도 안 된 애송이에게도 ‘실망’이라는 감정이 있다.


시간의 압박 없이 혼자 외출 준비하는 것도 힘들 텐데, 맞춰야 하는 시간까지 있으니 더 바빴다. 아침을 다 먹고 설거지를 하는 동안 소윤이와 시윤이는 씻으라고 했다. 시윤이는 매우 어설프겠지만 아침에는 자주 혼자 씻게 한다. 바쁘니까.


소윤이와 시윤이 옷도 골라 놓고(사실 소윤이가 많은 영향력을 행사했다. 고맙게도) 갈아입으라고 했다. 서윤이 옷과 기저귀는 소윤이가 다 갈아입혔다. 엄마, 아빠처럼 단호한 구석이 없으니 이리저리 도망가는 서윤이를 딱 잡아두지도 못하고, 쫓아다니느라 진땀을 뺐다.


“아휴, 서윤아. 좀 가만히 있어 봐. 언니 힘들어”


소윤이는 여러 의미에서 정말 귀한 존재다. 우리나라 대표팀 축구로 치면 박지성 같은 존재다.


“소윤아. 힘들면 그냥 둬. 아빠가 이거 하고 갈아입힐게”

“아니에여. 괜찮아여”


재활용 쓰레기와 음식물 쓰레기, 쓰레기봉투까지 챙겨서 나왔다. 현관문을 열고 엘리베이터까지 가는 동안 벌써 땀이 나기 시작했다.


“우와. 소윤아, 시윤아. 엄청 덥다”

“아, 덥다. 아빠 차 지하에 있져?”

“어 다행히 지하에 있어”

“엄마 보고 싶다아”

“그치?”


나 혼자 서윤이를 데리고 미용실에 갈 수는 없으니 서윤이는 아내에게 맡기고 가야 했다. 딸과의 데이트 시간을 너무 짧게 드린 것 같아서 좀 죄송했다. 아마 논의의 시작이 ‘딸과의 데이트’였으면 아예 토요일도 뺐을 텐데. 그래도 한참 재롱 많이 피우는 3호 손주니까 아쉬움이 덜하지 않을까 싶었다.


아내와 장모님이 주차장으로 내려오셨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차 안에서 인사를 나눴다. 무척 아쉬워했지만 ‘코로나 키즈’인 소윤이와 시윤이는 왜 그래야만 하는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아빠. 그래도 이렇게 잠깐 보는 건 줄은 몰랐어여”

“아, 그랬어?”

“미용실 다 끝나고 이따가도 잠깐 보기는 할 거져?”

“응”

“어디 가지는 않고 지금처럼 인사만?”

“그래야지”


시윤이랑 나랑 둘 다 펌을 하는 거라 시간이 꽤 걸렸다. 한 2시간 정도 걸렸다. 소윤이가 제일 심심했을 거다. 소윤이는 아무것도 안 하고(컷트나 펌이나) 기다리기만 했으니까. 가방에 챙겨 온 색종이를 가지고 종이접기를 하며 무료함을 달랬다. 소윤이가 종이접기 할 때마다 자주 놀란다. 나에게는 전혀 없는 능력이라서 그렇다. 난 책을 보고 해도 어떻게 하라는 건지 이해가 안 되던데, 소윤이는 아주 능수능란하다. 자주 접은 건 많이 외우기도 했고.


아내는 중간에 서윤이 카시트를 가지러 잠시 미용실에 들렀다. 점심을 먹으러 가는 길이었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엄마와 서윤이, 특히 서윤이가 할머니, 할아버지와 어디를 가길래 카시트를 옮기는지 매우 궁금해했다. 소윤이와 시윤이도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가고 싶은 강렬한 갈망이 있었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매우 아쉽게 엄마와 서윤이를 떠나보냈다.


“소윤아, 시윤아. 우리는 탕수육 맛있게 먹고 팥빙수도 먹자. 알았지?”


아, 시윤이가 머리를 하면서 돈까스에서 탕수육으로 점심을 바꿨다. 혹시 몰라서 탕수육은 어떠냐고 물어봤는데 좋다고 했다. 돈까스 말고 탕수육이 더 좋냐고 다시 물어봤는데도 탕수육이 더 좋다고 했다. 그럼 진짜 탕수육이 더 좋은 거다. 어제는 돈까스에 꽂혀서 생각을 못 했을 뿐.


머리를 다 하고 미용실에서 나왔다. 탕수육을 먹으러 가야 했는데 아는 곳이 없었다. 차에 앉아 검색을 해봤지만 뭔가 여기다 싶은 곳이 없었다. 그나마 괜찮다 싶은 곳이 있어서 후기를 스윽 내리다 보면 꼭 ‘너무 더럽다’ 같은 평이 보였다. 적어도 비위생적이라는 평이 없는 곳을 하나 골라서 갔다.


탕수육은 가장 작은 걸 시키긴 했지만 어쨌든 소윤이와 시윤이가 거의 다 먹었다. 난 한 두 점 먹었나. 아, 그렇다고 내가 엄청 배고프게 먹었다는 뜻은 아니다. 다른 것도 시켜서 배불리 먹었다.


“아이고, 아빠가 너무 많이 시켰다”


음식을 주문하고 나서 아주머니가 이렇게 얘기하셨다. 아주머니가 날 몰라서 하시는 말씀이었다. 맛이 없어서 먹지 않은 짬뽕밥의 ‘밥’ 빼고는 다 먹고 왔다. 탕수육을 먹을 때마다 시윤이를 보면 너무 흐뭇하다. 다른 거 신경 안 쓰고 오로지 탕수육을 먹는 것에만 집중하는 그 모습에 빠져들게 된다. 오늘도 배가 부르다며 포크를 내려놓길래 입까지 닦아줬는데 마지막 남은 한 점을 보더니


“아, 배불러도 하나만 더 먹어야겠다”


이러면서 야무지게 마지막 한 점까지 씹어 넘겼다. 탕수육 백 그릇이라도 사주고픈 마음이 절로 솟아난다.


소윤이와 시윤이 둘 다 배가 부르다는 말을 자주 했다.


“소윤아, 시윤아. 그렇게 배불러서 팥빙수 먹을 수 있겠어? 배부르면 다음에 먹자”

“무슨 소리에여. 팥빙수는 당연히 먹져”

“배부르다며”

“배불러도 팥빙수 먹을 때는 또 괜찮져”

“맞아여 아빠아. 팥빙수는 꼬옥 먹어야 돼여어”


장모님 댁 근처에 맛있는 팥빙수 전문점이 있어서 거기로 갔다. 깜짝 놀랐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자리가 없어서 기다려야 할 정도였다. 주문하고 나서도 꽤 기다렸다. 처음에 빙수 하나만 샀다가 아무래도 너무 적을 것 같아서 하나를 더 시켰다. 역시 그게 옳은 선택이었다. 막상 시키고 보니 또 ‘너무 많은가’ 싶었지만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많기는커녕 순식간에 사라졌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다 먹고 없는 팥빙수 그릇을 긁으면서 얘기했다.


“아, 더 먹고 싶다”

“너무 많이 먹으면 배탈 나. 아쉽지만 이 정도 먹어야 다음에 또 맛있게 먹지”

“맞아여”


시윤이는 확실히 먹을 때는 본인에게 집중하는 편이다. 팥빙수에 떡이 네 개가 올려져 있었다. 시윤이는 빠르게 떡 두 개를 떠 먹었다. 어떤 계산이나 의도가 있었던 게 아니라 그냥 본능이 이끄는대로 움직였던 것 같다. 소윤이는 남은 떡 두 개를 보더니 나에게 물었다.


“아빠. 아빠는 떡 몇 개 먹었어여?”

“아빠? 하나도 안 먹었어”

“그래여? 자, 아빠 그럼 이거 하나 먹어여”

“아니야. 아빠는 안 먹어도 돼. 진짜 괜찮아”

“아니에여. 얼른 먹어여. 빨리”


결국 소윤이가 먹여주는 떡을 받아 먹었다. 그걸 보던 시윤이가 말했다.


“아빠. 저는 떡 한 개밖에 안 먹었어여”

“시윤이? 두 개 먹었잖아”

“아니에여어. 한 개 먹었어여”

“에이 아니야. 아빠가 봤는데? 아까 나오자마자 두 개 먹었잖아. 기억 안 나?”

“아, 맞다 맞다. 나 왜 이러냐”


치밀한 계산이나 전략이 없어서 좋다. 시윤이는 그냥 몸이 이끄는대로 움직일 뿐이다. 아까 탕수육 먹을 때도 소윤이는 소스에 있는 파인애플을 찾아서 시윤이를 먼저 먹여줬다. 시윤이는 그제서야 자기도 파인애플을 찾아서 누나에게 먹여줬다. 소윤이의 배려는 흐뭇하고 시윤이의 본능은 귀엽다.


“소윤아, 시윤아. 아빠랑 데이트하는 것도 재밌네”

“아빠아. 엄마도 좋지만 아빠랑 있는 것도 좋기는 해여어”


나도 좋았다. 애가 많으니 다양한 조합으로 데이트를 즐길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나중에 서윤이가 더 크면 조합은 더 다양해질 거다. 난 더 늙어 있겠지만 그래도 기대가 된다.


“아빠. 근데 서윤이가 없으니까 진짜 편하다여”

“그치? 그래도 보고 싶지 않아?”

“맞아여. 서윤이 너무 보고 싶어여”

“그러게. 없으니까 너무 편하고 좋기는한데 또 보고싶네”


참 희한한 게 서윤이는 오늘 아침에 보낸 건데 꼭 어제부터 떨어져 있는 느낌이었다. 나중에 아내랑 얘기해 보니 아내도 비슷하게 느꼈다고 했다. 소윤이랑 시윤이도 고작 몇 시간만에 보고싶다고 하는 걸 보면, 우리 가족 모두에게 서윤이의 존재감이 꽤 커졌나 보다.


아내에게 전화를 해봤더니 아내는 점심을 먹고 카페에 있다고 했다. 아내가 있는 쪽으로 갈까 했는데 장모님이 반찬 챙겨주실 게 있다고 해서 그냥 장모님 댁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집에 올라가면 또 소윤이랑 시윤이가 ‘가기 싫다’, ‘10분만 더 있다 가자’ 이러면서 질척거릴까 봐 차에서 기다리려고 했다. 막상 차에서 기다리려니 안 그래도 밖에 못 나가는 애들 가둬두는 거 같아서 미안했다. 밖에 있으려니 너무 덥고.


“소윤아, 시윤아. 그럼 이따 할머니랑 할아버지 오시면 바로 인사하고 나오는 거야. 더 있자고 조르거나 울면 안 돼. 알았지?”

“네”


소윤이와 시윤이는 약속을 잘 지켰다. 아내는 서윤이가 잠들어서 올라오지 않고 차에서 기다렸다. 장모님과 장인어른만 올라오셔서 반찬을 챙기셨다. 우리가 내려갔을 때도 서윤이는 계속 자고 있었다. 장인어른 차에서 자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 차로 옮겨야 했는데 곤히 자는 걸 깨우기가 아쉬워서 카시트를 들고 통째로 옮겼다. 정말 오랜만이었다. 소윤이 때는 자주 카시트를 통째로 옮기곤 했다. 그때는 정말 하나도 안 힘들었는데 오늘 서윤이를 옮길 때는 고작 20-30미터인데도 너무너무 힘들었다. 늙어서 그런 걸까 살이 쪄서 그런 걸까.


아무튼 그렇게 짧은 아내의 친정 데이트가 끝이 났다. 아내에게 들어보니 가자마자 상전 대우를 받았다고 했다. 아무것도 하지 말고 받아먹기만 하고 가만히 앉아서 쉬라는 행복한 명령이 떨어졌다고 했다. 밤에는 장모님이 여기저기 마사지도 해주시고. 아내도 갈 때는 덤덤했지만 막상 가서는 좋았던 것 같다. 섬김과 헌신을 위해 빚어진 인생인가 싶다가 오랜만에 순도 100%의 사랑과 섬김을 받고 왔으니 당연한 소리지만.


이제 아이 셋을 혼자 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아예 없다. 아내는 몇 년 동안 쉴 새 없이 낳고 기르느라 홀몸이기 힘들었다. 이제 더 머리를 굴려야겠다. 아내 혼자 하면 좋을 일이 뭐가 있을지.


여보. 뭐 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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