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만나러 혼자 갑니다

21.07.23(금)

by 어깨아빠

영원히 내 품에 있을 줄 알았던 소윤이가 어느새 어른이 되어서 결혼을 했다. 아이도 셋이나 낳고 이제 나의 딸이었던 시절은 아득하고 누군가의 아내, 세 자녀의 엄마가 더 잘 어울린다. 얼굴을 보는 것도 힘들다. 애 키우느라 바쁘기도 하고 주말에는 자기 가족과 시간을 보내야 하니 어쩌다 한 번씩 만나 밥 먹고 커피 마시는 게 전부다. 그나마 가까이 살아서 드문드문 볼 수 있으니 다행이다. 그런데 갑자기 소윤이가 오늘 우리 집에서 자고 간다고 했다. 그것도 혼자서.


아직 전혀 실감 나지 않는 일이지만 소윤이가 결혼한 뒤에 이런 일이 생기면 난 기분이 정말 좋을 것 같다. 그냥 좋다는 말로는 표현이 안 되고 이루 말할 수 없는 깊은 기쁨에 사로잡히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아내를 장모님과 장인어른께 보냈다. 사실 처음부터 이런 생각을 한 건 아니고, 그렇게 하기로 결정하고 나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내는 오늘 친정에 혼자 가서 하룻밤을 자기로 했다. 소윤이와 시윤이, 서윤이는 나랑 자고.


“여보. 내가 결혼하고 나서 혼자 가서 잔 적이 있었나?”

“뭐 아플 때 말고는 처음인 거 같은데”


내리사랑이라고, 아내는 그냥 덤덤했다.


“엄마. 엄마 오늘 엄청 설레겠네여?”

“엄마? 왜?”

“할머니랑 할아버지랑 같이 데이트하잖아여”

“아, 아, 그렇지”


오늘도 무척 더웠다. 점심에 뭘 먹을지 고민은 한가득이지만 준비된 건 아무것도 없고, 준비할 체력도 없는 아내를 위해 샌드위치를 배달시켜줬다. 애들이 너무 잘 먹어서 아내는 그야말로 허기만 달래는 수준이었다고 했다. 한 2개 더 시킬 걸 그랬나 보다.


소윤이와 시윤이도 오늘 밤에는 엄마가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내가 퇴근하면 아내는 떠나기로 했다. 장인어른이 집에 오셔서 아내를 데리고 가신다고 했다. 장인어른도 잠깐 들어오셔서 손주들 얼굴을 보셨다. 아내는 괜히 미안한 마음에 가기 전까지 설거지를 했다.


“여보. 그냥 두고 얼른 가”

“하던 것만 마저 하고 갈게”


시윤이는 오늘 낮에 아내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했다.


“엄마 저는 울산에서 간 계곡보다 음 그 3층에서 놀았던 데보다 하나 카페? 거기보다 엄마가 더 좋아여어”


그렇게 좋아하는 엄마를 할머니와 할아버지에게 양보했다. 내 기억에도 처음이었다. 아이 낳고 아내 혼자 친정에 간 건. 시윤이는 농담인 듯 장난인 듯 가지 말라며 엄마에게 매달리고 현관을 막겠다며 두 팔을 벌리고 섰다. 막을 수 없다는 걸 알지만 진짜로 막고 싶은 시윤이의 진심이, 나는 보였다. 소윤이는 누구보다 엄마를 좋아하지만 동생이 그러는데 자기까지 그러면 안 된다는 생각과 할머니가 얼마나 좋아하실까 하는 마음에 꾹 참는 게 보였다. 서윤이는 아무것도 몰랐다. 아무 생각 없이 엄마한테 손을 흔들며 안녕을 건네다가 막상 진짜 나가니 놀란 토끼 눈으로


“암마아아아. 암마아아아”


를 외쳤다. 그래도 막 울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뜬금없이 엄마를 찾으며 작은방에도 들어가고 화장실에도 가고 그러기는 했지만 울지는 않았다.


“소윤아, 시윤아. 우리 엄마라는 단어는 이제 좀 쓰지 말자”

“왜여?”

“아, 서윤이가 들으면 괜히 엄마 생각나서 울지도 모르니까”

“그래여. 알았어여”


지키지 못했다. 그 누구도. 나도 무슨 말만 하면 ‘엄마가’, 애들도 무슨 말만 하면 ‘엄마가’. 우리 집에서 아내의, 엄마의 존재감이 얼마나 큰지 새삼 실감했다. ‘엄마’ 빼면 대화가 안 되는구나.


아내는 떠났고 우리는 치킨을 저녁으로 먹었다. 소윤이는 치킨이 먹고 싶다고 했고 시윤이는 돈까스가 먹고 싶다고 했는데, 내일 점심에 돈까스와 팥빙수를 먹는 것으로 절충했다. 이제 소윤이는 자기가 알아서 발라 먹는다. 오늘 시킨 곳은 닭 조각이 작아서 소윤이가 발라 먹기에 더 좋았다. 시윤이도 충분히 능력은 되지만 발라 달라고 했다.


“시윤아. 시윤이는 왜 아빠가 발라주는 게 좋아?”

“손에 기름 묻는 게 싫어여어”


그래. 너도 상전이구나. 엄마가 애써 채워놓은 사랑의 그릇을 아빠가 깨뜨리지 않기 위해, 기꺼이 발라준다. 서윤이도 발라줘야 한다. 더 섬세하게. 그러다 보니 눈앞에 치킨이 있는데도 먹고 싶은 생각이 안 들었다.


‘아, 차라리 애들 재우고 나와서 혼자 여유 있게 먹어야지’


치킨 먹고 치우고 샤워시키고 책 읽어주고 재워주는, 매일 하는 일에 유독 숨이 찼던 건 아내가 없기 때문이었을 거다. 애들이 아내를 더 진하게 그리워하지 않도록, 웬만하면 애들 비위를 다 맞춰가며 잠자는 시간까지 도달했다. 문득문득 ‘만약에 진짜 아내가 없으면 이런 모습일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애들한테도 ‘얘들아, 만약에 엄마가 진짜 안 계시면 엄청 보고 싶겠다. 그치?’ 이런 말을 나도 모르게 하려다가 참았다. 언제가 됐든 혹시라도 그런 날이 오면, 저 말을 한 걸 후회할 것 같았다.


애들을 재우고 나오니 치운다고 치운 거실이 아직 어수선했다. 마저 정리를 하고 식탁도 다시 치우고 애들이 먹다 남긴 치킨(남긴 것치고는 양이 꽤 많았다)을 가지고 와서 바닥에 앉았다. 건조기에서 빨래 더미도 꺼내왔다. 치킨을 먹으면서 유튜브를 보면서 빨래를 갰다. 덕분에 빨래 개는 속도는 매우 더뎠지만 어쨌든 다 개긴 갰다.


안타깝게도 코로나 시국이라 아내와 장모님, 장인어른이 함께 들어갈 수 있는 식당이 없었다. 가기 전에 미리 전화를 해봤는데 역시나 다 불가능했다. 초밥과 물회를 포장해서 집에서 먹었다고 했다. 커피까지 집에서 마시는 건 너무 기분이 나지 않으니 저녁 먹고 커피를 사서 드라이브를 나갔다고 했다. 아내랑 이때 통화를 했다.


장인어른은 시간이 아깝다는 얘기를 자주 하셨다고 했다. 모처럼 아니 처음으로 홀몸이 되어 온 딸이랑 보내는 시간이 너무 빠르게 흐른다는 뜻이었다. 그 얘기를 몇 번이나 하셨다고 했다. 먼저 주무시러 들어갈 때도 ‘밤새 놀아야 하는데’라고 말씀하시고. 장모님은 선물을 보내줘서 고맙다고 표현하셨다.


아내를 잘 보낸 것 같다. 내가 보내고 말고 할 것도 아니지만 어쨌든. 평소에 좋은 사위는 아닌 데다가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은 적기 때문에, 아내를 앞세우는 전략은 좋았던 것 같다. 그래 봐야 고작 하룻밤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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