씹어 먹는 행위의 위대함

18.12.07(금)

by 어깨아빠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걱정이 됐는지 한나네 보일러는 밤새 쌩쌩하게 돌아갔다. 덕분에 다소 더위가 느껴졌고 습관적으로 웃통을 벗으려다가 다행히 잠결에도 여기가 우리 집이 아니라는 걸 꽉 붙잡고 기억해서 그런 참사는 없었다.

이번 울산 방문의 주목적은 울산에서 운영되고 있는 [에녹처치홈스쿨] 견학이었다. 물론 견학이 51이라면 지인과의 만남이 49 정도였지만 어쨌든 주목적은 그랬다. 9시 30분까지 교회로 가야 한다고 했다. 한나네는 100일도 안 된 시온이를 포함해 애가 셋인 데다가, 어찌 됐든 손님인우리가 있으니 아침도 차려야 하고 나갈 준비도 해야 하니 굉장히 분주했다. 아내가 전해주길 한나와 승아 사이에서 나는 굉장히 [잘 먹는 오빠]로 정체성이 확립되어 있다고 했다. 아내랑 단 둘이 먹는 자리 말고는 나름 자제와 절제, 인내를 실천하며 본모습을 감추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송곳은 아무리 깊은 주머니에 있어도 그 끝이 드러나기 마련인가 보다. 어차피 뭐 연기해봐야 먹히지도 않고 분주한 아침에 부지런히 움직이기 위해서 한나가 아침으로 차려준 카레를 허겁지겁 먹어 치웠다.

하준이는 능동형 근면성실 남편이다. 호들갑은 떨지 않는데 뭔가 쉬지 않고 계속 움직인다. 뭔가를 하고 있는데 한나가 추가로 자주 시키기도 하고 자기가 찾아서 집안일도 하고 그러면서 입으로는 찬양도 흥얼거리고.


하준이는 하준이고 난 나니까 배우지 말고 나대로 살아야지.

시안이네(홈스쿨 동지)는 오늘 새벽에 출발해서 시작 시간인 10시쯤 교회에 도착했다. 10시부터 5시까지 교회에 머물며 처치홈스쿨 견학 및 관찰을 했다. 소윤이는 처음에 특유의 뚱한 기운을 풍기며 꿔다 놓은 보릿자루를 자처하다가 점점 적극적으로 참여하긴 했다. 시윤이는 역시 넓고 광활한 곳에 풀어놓으니 전혀 손이 가지 않았고.

홈스쿨을 마치고 나서는 시안이네랑 저녁을 먹었다. 근처에 있는 연어 요리집에서 먹었는데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어디 카페라도 가서 이야기를 좀 나누면 좋았겠지만 애들 때문에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시안이네는 호텔로 우리는 승아네 (아내 친구, 은율 가을 엄마, 대성씨 남편) 로 갔다.

오늘과 내일은 승아네서 자기로 했다. 우리가 갔을 때는 대성씨가 아직 퇴근하지 않았고 은율이는 홈스쿨 마치고 한나네가 데리고 가서 저녁 먹이고 돌아오는 길에 잠이 들었다. 은율이네 집에 가서 은율이랑 놀 생각에 들떴던 소윤이는 잠들어 복귀한 은율이의 모습에 실망했다. 소윤이랑 시윤이는 조금 더 놀다가 데리고 들어갔다.


견학차 손님으로 방문한 것이니 최대한 방해가 되지 않기 위해 하루 종일 소윤이한테 잔소리를 많이 했다. 소윤이도 잠이 부족해서 일찍부터 피곤이 찾아와 고집도 많이 부리고. 왜 애들 잠든 걸 보면 미안함이 밀려오는 건지. 시윤이 덕분에 적지 않은 시간을 쓰고 나서야 애들을 재우고 나왔다. 그 사이 대성씨가 왔고 은율이는 일어났다.


은율이는 7시쯤 잠들었다가 10시쯤 깬 거다. 아까 소윤이랑 있을 때도 한참 동안 퍼즐이랑 씨름을 했는데 은율이랑도 오랫동안 퍼즐을 했다. 소윤이나 은율이나 둘 다 자기가 퍼즐 잘한다고 말은 엄청 하면서 정작 나만 고생했다. 그렇게 힘겹게 맞춘 퍼즐이 정리 시간이 되면 지퍼백 안에서 허망하게 흩어졌다.


어른들이 식탁에 둘러앉아 늦은 시간까지 수다를 떠는 동안 은율이도 자지 않고 함께 있었다. 주로 거실에서 혼자 장난감을 가지고 놀았다. 중간에 소윤이를 깨우고 싶다고도 하고 계속 엄마나 아빠한테 같이 놀자고 하는 걸로 봐서는 혼자 노는 게 좋은 건 아니지만 그 시간에 자지 않고 깨어 있는 것에 대한 나름의 염치를 차리는 것 같았다. 막판에는 식빵을 구워 잼을 발라 먹기도 했다. 우리 집에서는 볼 수 없는 생경한 모습이었다.

대성씨랑 승아를 보고 있자니 난 너무 야박한 부모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물론 아무리 그런 생각을 한다한들 우리 집에서 12시에 소윤이가 깨어 있는 경우는 앞으로도 아마 없을 거고 설사 있다 해도 그 시간에 토스트를 구워 먹는 경우는 더 없을 거다. 그래도 그들의 너그럽고 부드러운 태도는 언제나 존경스럽다.

5개월쯤 된 가을이의 젖병이 싱크대에 줄지어 있었다. 수다 떠는 중간중간 가을이가 시도 때도 없이 깼다. 시윤이 때 먹이느라, 재우느라, 젖병 닦느라 고생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말도 못 하는 돌도 안 된 아기한테 분노와 짜증을 느낄 수 있으며 표현할 수도 있다는 걸 그때 알았다. 우린 젖병 네댓 개로 돌려 막았던 것 같은데 은율이네는 그보다 훨씬 많았다.

'우리도 젖병 더 사자고 할 걸 그랬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쌓여 있는 젖병을 두고 자기 전까지 대성씨와 승아 사이의 미묘한 신경전이 이어졌다. 지금 씻어 놓으라는 女와 아직 괜찮고 내일 씻으면 된다는 男.


먹이다 남아도 다시 먹일 수 있는 분유, 버튼 하나만 누르면 셀프 세척, 소독되는 젖병이 개발되지 않는 이상, 남은 생에 젖병 세척하는 일은 만들지 않겠다고 다시 한번 다짐했다.


다행이다. 소윤이, 시윤이가 꼭꼭 씹어 먹을 수 있는 인간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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